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나와 남편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결혼요? 혼인신고를 한 지 햇수로 5년 되었네요.”
“결혼식은요?”
“아, 결혼식은 따로 안 했고, 부모님과 직계 가족들만 모여서 밥 먹었어요.”
종교가 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어쩌다 한 번씩 성당에 가는 편이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혼배성사 (미사로 진행되는 혼인 식인 혼인성사 전에 간단하게 증인을 두고 서약만 하는 카톨릭 신자라면 해야 하는 것)를 하고 그날 가족들과 밥을 먹었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서로 사랑하고 특별한 서약이나 서류 없이도 평생을 함께 살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과 바람이 있는데 굳이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려는 생각도 없는데. 하지만 12년의 연애, 동거를 부모님들이 알고 계셨고,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숙제를 끝마치고 싶어 하셨다. (부모님 세대의 단계별 숙제: 출산, 양육, 완벽히 출가 시키기-결혼, 이후 번외의 자발적 숙제는 손주 낳으라 하기 그리고 손주 봐주기)
혼인신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효도 중 가장 큰 하나였다. ‘어차피 평생 살 것이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않을까?’ 부모님들의 그 말에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그깟 서류가 뭐라고, 하지, 뭐. 2015년 3월 내 생일에 맞춰 구청에 갔다. 혼인신고를 올렸다. 공식적인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내 생일이다. 기념일을 몰아 버리자는 취지였다.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일가친척과 부모님들의 친구, 친하지 않지만 그들의 결혼식에 다녀왔으니 오라 말해야 되는 지인, 친구, 일로 만난 사이 등을 초대하고 일일이 식사 자리를 만들어 청첩장을 건네고, 스드메 (웨딩사진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삼종 세트를 고르며 떨리는 안면 근육을 부여잡고 웃는 얼굴을 장착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는 식순에 맞춰 인형놀이 하듯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초대를 받아 축하하러 갔었던 남의 결혼식에서 그날의 진정한 주인공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야말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가 바로 여기였다.

그렇게 결국 양가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설득 당하셨다. 좋은 의미로 도전에 함께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도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친구들과 일가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번거롭게 우리의 의도를 설명하고 계신다.
“애들이 허례허식 없이 낭비도 안 하고, 덕분에 우리도 홀가분하고 골치 아플 일 없었지! 모아 남편? 멀쩡해! 너무 착하고 건강해! 일도 잘하고. 모아한테 잘하고. 어? 서울 살아. 사돈어른분들? 다 너무 좋으시지. 모아를 너무 예뻐해 주시고…”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수고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한 번에 인사를 드리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한방에 얼굴을 비쳤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왜곡되고 변형된 공장형 웨딩홀은 정말 답이 없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해된다. 작은 땅, 타임 푸어, 즉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공장형 웨딩….

우리는 진짜 필요한 것을 말하라는 지인들로부터 혼수라고 해야 할까,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축의금과 편지, 맛난 식사 자리 등을 선물 받았었다. 살면서 만나는 친척들에게 주례사를 대신한 좋은 말씀을 들었고 말이다.

결혼식을 안 해보고 나니 결혼’식’, ‘식’의 필요성이 하나둘 보인다. 삶은 너와 나, 둘로만 살아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변에 우리의 결혼을 공포하는 필요와 의미가 여러모로 있다는 게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게다가 축하를 건네고 싶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받는 게 연인에서 가족이 되는 챕터를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기쁨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받았지만. 공장형 결혼식을 가든 스몰 웨딩이나 서구식 결혼식에 가든 가장 예뻐 보였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건네는 진심의 축하와 마음과 얼굴이었다. 되새기는 것, 그날의 선택과 축하를 기억하는 것. 일상을 보내느라 흩어지는 그 날의 그것을 하루에 쏟음으로써 묵직한 무게를 달아놓는 것. 그것은 결국 ‘책임’이었다. 결혼을 지키라는 책임이 아닌 서로의 사랑을 지켜나가는 책임.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다.
개별적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시대에서 아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결혼을 알리는 번거로움을 ‘식’의 날로 몰아 해결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해보지 않아서 느껴지는 ‘식’의 필요성. 그렇지만 우리는 좀 덜 후회하는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실 그 선택을 잘했다고 끄덕인다.
요즘에는 시청의 공간을 적은 비용으로 빌려 혼인신고와 식을 한꺼번에 하기도 하고 기념사진도 친구들이 찍어 주는 등 다양한 방식의 결혼식이 생겨나고 있다.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음에 기쁘다.

사실 결혼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건, 노력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가족이든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한 노력.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이 아닌 경제적 이유로 함께 사는 사람이든. 인생, 혼자 살 수 없다.
단 1%라도 후회가 적은 선택을 해가며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 결혼식 안 한 유부녀로서의 리뷰는 여기까지다.
*김모아 작가의 '무엇이든 감성 리뷰'는 매주 화요일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