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어둠이 필요한 이유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기생충>과 <유포리아> 그리고 빌리 아일리시까지. 올해 우리를 매료시킨 디스토피아적 무드에 관하여.

“착한 소녀들은 결국 지옥에나 가게 되겠지. 신조차 적을 두기 마련이니까(All the good girls go to hell, ‘cause even god herself has enemies)” 지난 3월 발표된 빌리 아일리시의 데뷔 정규 앨범 의 수록곡인 ‘All the good girls go to hell’ 속 가사다. 세상에 정의는 사라졌다고, 미래는 어두울 뿐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나이는 겨우 만 18세. 미래를 책임져야 할 10대가 세상은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형국이라니, 이 세상은 정말 괜찮은 걸까? “저는 원래 비관적인 사람이에요. 물론 밝고 낙천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겠죠. 뭐, 그건 개인의 차이일 뿐이에요.” 우울하고 비관적인 서사에 관심이 많은 것이 이 반항적인 소녀의 취향이라 단정짓기엔 올 한 해 디스토피아적 경향은 다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유토피아의 반대편에 놓인 디스토피아.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디스토피아는 가장 어둡고 타락한 세계를 보여주며 현실을 비판하고 장밋빛 미래를 부정한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랬다. 기택(송강호)의 가족과 박사장(이선균) 가족을 통해 자본주의 시대의 계급 문제를 꼬집는 영화는 계층간의 불통과 피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는 열린 결말의 형태를 취하지만 기우(최우식)의 ‘계획’은 결코 실현될 수 없으리란 걸 우리는 알기에 비극은 한층 짙어진다. 마블 코믹스 최초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조커>는 또 어떤가. 타고난 가난과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 때문에 평생 멸시받아온 아서 플렉이 고담 시를 깊은 암흑으로 몰고 갈 희대의 악당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은 디스토피아를 넘어 이미 종말해 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역시 우울한 분위기가 각광받은 건 마찬가지다. 바르게 자라야 할 청소년들이 학교 폭력에 아무렇지 않게 가담하며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가 되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와 최첨단 미래 사회를 시종일관 우울한 디스토피아로 관망하는 <블랙 미러>,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 소년과 반항기 가득한 소녀가 세상을 등지며 강도와 살인을 자행하는 <빌어먹을 세상따위>까지 모두 마니아 팬을 이끌며 후속 시리즈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섹스 앤 더 시티> <왕좌의 게임> 등 초거물급 드라마를 탄생시킨 HBO가 올해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인 동시에 평론가와 시청자 모두에게 후한 평가를 받은 작품 또한 공교롭게도 <체르노빌>과 <유포리아>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을 다루는 <체르노빌>은 폭발이 발생한 시점에도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한 연구소장과 위기 대처 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데다가 무지하기까지 한 정부 고위 관료의 모습을 보여주며 보는 내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든다. <유포리아>에서 마약과 섹스에 탐닉한 채 ‘내일은 없다’고 외쳐대는 10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도 그다지 밝지 않은 듯하다. 조울증 환자이자 약물중독자인 루(젠데이아 콜먼), 진지한 관계를 거부하는 트랜스젠더 줄스(헌터 셰퍼)가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가는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 소녀들에게 미래란 가망 없는 현재일 뿐이므로.

국내 문학계에서는 특히 중심 세대로 거듭난 70년대생 작가들 사이에서 디스토피아에 대한 담론이 늘어 가는 모양새다. 갑자기 닥친 유행병의 유일한 치료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 숙주를 옮기는 것뿐이라는 종말론적 상황을 다룬 최정화 작가의 <흰 도시 이야기>가 올해 8월 출간됐고, 4월 출간된 임성순 작가의 소설집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역시 세상의 끝을 향해 가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주목한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를 맞닥뜨린 세계, 모든 통신망이 끊겨버린 외로운 세상에서 인간은 결국 서로의 손을 맞잡지 못한 채 종말을 기다릴 뿐이다(세상의 끝). <82년생 김지영>보다 한층 더 불길한 사회를 비추는 공상적 소설 <사하맨션>으로 돌아온 조남주 작가가 이번에 그린 세상 역시 어둡기만 하다.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낙오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기이한 도시 국가인 사하 맨션. 건설업, 쓰레기 처리반 등에 종사하며 생존 문제에 매달리는 사회 하층민들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꿈조차 꾸지 못한다. 조남주 작가가 디스토피아 이야기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출간기념회에서 “늘 세상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다. 이번 소설의 메시지 역시 ‘내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꿔달라’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녀 말에 따르면 디스토피아 서사는 필요한 담론을 적시에 쏘아 올리며 ‘내가 속한 공동체나 사회, 국가가 어떤 문제를 잘못 풀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직면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니 디스토피아는 개인의 노력을 하찮게 여기고 삶의 의지를 꺾는 우울하고 위험한 소재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명사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는 모두 제국주의 시대에 출판돼 파시즘의 위험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들의 상상은 결국 현실이 되지 않았다.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는 건 현재의 우리들이기에 디스토피아는 결국 예언이 될 수 없고, 지금의 잘못된 방향을 점검하고 수정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미래연극제’의 올해 주제는 ‘인권과 디스토피아’로 노동자를 사지로 내모는 사내의 구조적 문제를 다룬 개막작 <메이데이>부터 심각한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조인간을 창조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아웃팅> 등이 초대됐다. 인권과 디스토피아라는 서로 다른 단어가 하나의 주제 아래 엮인 데는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뒷받침된다. 간접적으로나마 디스토피아를 체험한 관객들은 그 즉시 눈앞에 펼쳐진 비극에 자신의 현실을 비춰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를 응시하고 돌파해야겠다는 용기도 함께 피어 오른다.

디스토피아가 힙스터들의 문화라는 재미있는 시각도 있다. 올해 초 <워싱턴포스트>는 한 기사에서 <워킹 데드>와 <헝거 게임>을 비롯한 어두운 서사를 다루는 영화, 드라마 시청자들의 연령대가 낮다는 점을 지적하며 디스토피아의 유행을 견인하는 주체가 젊은 세대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디스토피아 서사가 특히나 별나고 기괴한 이야기에 이끌리는 젊은 세대에게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어 기사는 비관적인 서사가 이들로 하여금 폭력과 파괴를 문제 해결의 돌파구로 여기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를 덧붙인다. 과연 그럴까? 앞서 말했듯 디스토피아는 미래적 선언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과 고민이 집약된 결과에 훨씬 가깝다.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맞닥뜨린 우리는 세상을 파괴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더 먼저 작동하는 것을 느낀다. 매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수많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비극과, 정치 부패, 계층 분열 그리고 나날이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를 접하며 우리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굳이 영화나 드라마를 들여다볼 필요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이미 디스토피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때때로 터져나오는 목소리를 통해 적어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됐다는 것 아닐까? 실제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커다란 담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 담론이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광경을 우린 종종 목격했으니까. 그러니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뒤에는 이런 문장이 따를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생충>과 <유포리아> 그리고 빌리 아일리시까지. 올해 우리를 매료시킨 디스토피아적 무드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