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소박한 동네 꽃 가게. 지하철역과 가판대, 매점에서 꽃을 사는 풍경도 익숙하다.
베를린의 소박한 동네 꽃 가게. 지하철역과 가판대, 매점에서 꽃을 사는 풍경도 익숙하다.
현대미술가들의 에너지가 가득했던 베를린 거리는 고풍스러운 파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가는 곳마다 꽃과 풀이 함께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낭만적인 필터를 걷고 상상하려 해도 각각의 생명력을 뽐내며 활짝 피어 있는 ‘그로브(Grove)’의 꽃을 볼 때면 역시나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플라워 디자이너 하수민의 ‘그로브’는 브랜드와 매거진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플라워 숍이다. 확신을 가지고 그은 붓질처럼 선명한 유화 같은 꽃들, 소재의 질감이 살아 있는 건축적인 균형. 이 모든 표현은 그로브의 스타일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그런 그가 파리와 베를린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해졌다. 플라워 디자이너가 바라본 도시는 어떻게 다를지, 외국의 플라워 아카데미나 스튜디오에서 유학한 경험 없이 순수하게 서울에서 감각을 쌓아온 그에게 그곳의 꽃들은 어떻게 다가왔는지, 개인적으로 어떤 경험을 기대하며 휴가를 떠난 건지도.
“11년 가까이 그로브를 운영하면서 내내 달리기만 했어요. 이러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건 아닐까,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죠.” 한번 결심을 내리고 나니 이후의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뭔가 채워서 오기보다 비워내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열흘 남짓의 여행이었다. 행선지를 파리와 베를린으로 고른 것도 직감에 가까웠다. “주변 사람들이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도시가 베를린이더라고요.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에너지가 쏟아지는 이 도시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파리는 워낙 이미지 노출이 많은 곳이다 보니 오히려 그걸 보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마침 파리에 살고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유할 겸 들렀던 게 신의 한 수가 됐어요.”
파리의 풍경. 어딜 가나 자연스럽게 꽃과 식물이 놓여 있다.
파리의 풍경. 어딜 가나 자연스럽게 꽃과 식물이 놓여 있다.
파리의 풍경. 어딜 가나 자연스럽게 꽃과 식물이 놓여 있다.
18년 차 플로리스트이자 10년 넘게 ‘그로브’를 운영 중인 하수민.
플로리스트의 순례기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여행 목적은 ‘꽃’이 아니었다. 낱개의 플라워 디자인이나 기술은 이미 책과 웹을 통해 차고 넘칠 정도로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 그보다 하수민 대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공간 그 자체였다. “화려한 프렌치 스타일, 최근 인기를 끄는 이케바나 스타일 등 요즘 인스타그램 피드만 둘러봐도 정말 다채로운 스타일을 볼 수 있으니까요. 꽃과 조명, 가구, 그림…. 아름다운 것은 너무 많죠. 꽃이 도시의 일상과 분위기에 어떻게 어울리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파리와 베를린은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는 도시다. “고풍스러운 건물, 잘 차려입은 우아한 사람들. 파리는 뭘 해도 아름답잖아요. 한국에서는 예쁜 사진을 남기려면 옆에 건물을 자르거나 창틀이 보이지 않게 찍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죠. 남성 플로리스트가 운영하는 ‘아르튀로 아리타(Arturo Arita)’라는 숍은 추천받아 간 곳인데, 들어가는 순간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어요. 그로브가 있는 거리에도 꽃집이 10여 개쯤 되는데 이 가게들의 개성이 명확하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사람이 자신만의 취향을 키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요.” 어디를 가도 우아한 풍경이 이어지는 파리가 ‘엄친아’ 같은 도시라면 전쟁과 학살, 분단의 역사가 예술 에너지와 함께 뒤엉킨 베를린은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짧은 체류였지만 사람들에게서 단단한 확신이 느껴졌어요. 유명한 플로리스트 그레고어 레르슈(Gregor Lersch)의 ‘마이스터(Meister)’ 스타일처럼 꽃도 아름답고 감성적이라기보다 멋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더군요.” 오히려 ‘핫 플레이스’라는 곳을 찾았을 때 서울과 파리, 베를린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일상 공간에서 느끼던 공기보다 더 큰 차이를 느낀 건 꽃을 대하는 현지인의 태도였다.
그로브의 인기 아이템 중 하나인 ‘그리너리 백’은 갓 산 꽃을 조금 더 잘 보관하고 싶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챙겨 간 그리너리 백은 여행 중에 유용하게 쓰였다.
계절감이 넘치는 꽃을 장식한 파리의 플라워 숍 ‘스테파넬 샤펠(Stephanel Chapelle)’. 빈티지하면서도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취향이 드러난다.
계절감이 넘치는 꽃을 장식한 파리의 플라워 숍 ‘스테파넬 샤펠(Stephanel Chapelle)’. 빈티지하면서도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취향이 드러난다.
디자이너의 개성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던 ‘아르튀로 아리타’의 오너.
“파리는 작은 공간에 조화라도 가져다 놔요. 꽃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 때문이겠지요. 베를린에서도 지하철역, 거리, 동네 슈퍼 등 생활 가까이에서 다양한 꽃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요. 한국에서 플라워 시장이 커지고 있다지만 아직 특정 지역 위주다 보니 장바구니 속에 꽃을 슬쩍 꽂아 들고 가는 풍경이 부럽더라고요.” 여기에는 최근 ‘꽃꽂이 수업’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의 꽃 시장에 대한 걱정도 있다. 꽃을 보는 방법이나 취향을 고민하기보다 따라하기 식의 수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그마저도 인스타그램에서 봤을 때 예쁜, 정해진 몇몇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게 없는 상태에서 그냥 따라하는 거죠. 소비자 입장에서 꽃을 사서 레슨을 받으려고 꽃 시장에 처음 간 사람은 시장 꽃이 저렴하게 느껴져요. 그 꽃다발을 실제로 판매하려면 30만~40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시장 물량이나 적절한 가격과는 상관없이 무작정 1회성으로 고민 없이 만드는 경우를 봐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긴 하죠. 수요가 있으니 어쨌든 상인들은 인기 있는 꽃을 계절과 상관없이 높은 가격에 판매하니까요.”
물론 자신감을 얻은 부분도 있다. “꽃을 소비자에게 상품화하는 부분에서는 한국 플로리스트들이 가진 장점이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용도로 누구에게 줄 건데 한 시간 뒤에 가져갈게요’ 같은 주문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것도 실력이고 예술 아닐까요.” 포장된 채로 선물 받은 꽃을 각자의 집에 꽂는 과정까지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국내 플라워 디자이너다운 발언이다. 아주 오랜만에 혼자 떠난 휴식이 하수민 대표에게 선사한 것은 ‘다음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