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레드 카펫은 내가 깐다" 이제라도 나를 잘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jtbc 심수미 기자가 전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레드카펫을 직접 깔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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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다. 출간 논의를 시작한 지 무려 6년만의 결과물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2019년 번역서를 낼 때도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를 2년 동안 외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는데, 이번에는 그 고통을 3배로 길게 겪었다. 특히 내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번역서와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었다. 내가 지난 17년간 직업으로 해왔던 ‘기자로서 글쓰기’는 철저하게 나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작업이다. 기자의 주관이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묻어나게 마련이지만 최소한 객관적인 장치를 두고 ‘남의 입’을 빌어서 드러나게 해야 한다. 반대로 에세이는 한없이 솔직한 글이어야 한다. 내 일기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느낌이 들어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책을 막 쓰기 시작하던 2020년 무렵의 나는, 과장 조금 보태서 말하면 ‘셀럽’ 기자였다. 2016~2017년 국정농단 사건 당시 ‘태블릿 PC’ 보도를 포함해 다수의 주요 기사를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하거나 중계를 탔다. 길거리 혹은 식당에서 꽤 잦은 빈도로 사인이나 ‘셀카’ 요청을 받았다. 그 덕에 2019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환호에 둘러싸인 나날이었다. 그런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에세이를 쓰자니, 자칫 자화자찬이 돼서는 안 된다는 자기검열에 시달렸다. 주로 실패하고, 고민하고, 실수했던 기자 초년 시절의 일화를 맴돌았다.
©unsplash
그렇게 에세이 작업에 속도가 안 붙던 차에 안면마비를 겪었고 임신과 출산을 관통하면서 시간이 속절없이 지났다. 불법 계엄과 ‘키세스단’의 응원봉 덕분에 대통령이 달라졌고, 국정농단 사건은 어느덧 10년 전 ‘근현대사’가 돼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농단 사건을 구체적으로 적지 않은 내 에세이 초고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내 자랑’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건 ‘그 사건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오만함이었다.
출간 직전에 많은 부분을 다시 썼다. 실패와 방황, 고민만큼이나 내가 뭘 잘했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 성과로 이어졌는지를 기록했다. 자연 분만 경험을 한 내 친구는 ‘열차가 몸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라고 했는데, 제왕절개를 해서 몰랐던 그 느낌을 막연하게 출간하면서 느꼈다. 출판사와 약속한 마감일에 쫓기다 보니 전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던 ‘내 자랑’이 어찌저찌 밀려나왔다. ‘이래도 괜찮을까?’를 수없이 자문자답하며 잠 못 이룬 나날이었지만 막상 출간이 된 책을 보니 세상 이렇게 뿌듯하고 감격스러울 수가 없다. 17년 기자 인생이 단단한 텍스트로 정제돼 눈앞에 놓였다. ‘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세일즈하기에 이보다 더 명확하고 정교한 명함이 또 있을까.
‘셀프 자랑’이 아무래도 간지러워 멈칫거릴 때마다 이 문장을 일부러 외쳤다. “내 레 드카펫은 내가 깐다!” 책에도 담은 일화지만 일간스포츠 편집국장을 거쳐 중앙그룹 계열사 대표를 거친 이경란 선배가 4년 전 나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당시 선배가 내게 깔라고 독려했던 ‘레드 카펫’은 사실 앵커라는 자리였다. “선배, 제 외모에 무슨 앵커예요?” 거북 목을 하고 손사레를 치는 나에게 선배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미야, 아무도 너를 위해 레드 카펫을 깔아주지 않아. 네 레드 카펫은 네가 까는 거야.” 당시 나는 이 조언에 힘입어, 나름의 ‘레드 카펫’을 깔아보았다. 언론사에서 상징적인 시경 캡(기동팀장) 자리를 과감하게 외쳤고, 약간의 어려움을 거쳐 결국 그 자리를 꿰찼다. 원하던 자리였던 만큼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안면마비를 겪고 회복하기 어려운 손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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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눈부시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앵커라는 레드 카펫도 한 번쯤 욕심을 내볼 걸 하는 후회도 했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그저 부럽다. 취재도 야무지게 하고 기사도 날카롭게 쓰면서, 자신의 외적인 매력과 방송 역량을 가꾸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꿈을 꾸는지 세상에 알리는 데도 거침이 없다. 스스로 레드 카펫을 깔고 그 위를 경쾌하게 걸어가는 후배들의 모습은 예전의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이제라도 나를 잘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또 다른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기 전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그 방향의 길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오늘 이 글을 쓰는 것도 레드 카펫의 일환이다. 한 분의 독자에게라도 더 닿을 수 있다면, 그 작은 인연이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라는 멋진 목적지에 닿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과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수상한 JTBC 기자. 최근 17년간의 취재기를 담아 <매일 저녁 90초를 위한 시간>을 발간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심수미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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