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일본 최초의 건축가 부부가 설계한 화이트 하우스

90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문을 연 백색의 집,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

프로필 by 이경진 2026.04.05

도쿄 미나토구, 세련된 빌딩 숲이 늘어선 미나미아오야마 한복판에 낯설고도 아름다운 흰 집 한 채가 들어섰다.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과 파사드의 한 면을 과감하게 채운 커다란 창. 반듯하면서도 어딘가 기묘해 보이는 이 집은 일본 근대건축 형성기에 활동한 최초의 부부 건축가 쓰치우라 가메키와 그의 아내 노부코가 설계하고 거주했던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이다.


쓰치우라 부부가 별세한 후 두 사람의 오랜 비서였던 나카무라 조코가 계승 복원하고 이축해 아오야마에서 다시 공개된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

쓰치우라 부부가 별세한 후 두 사람의 오랜 비서였던 나카무라 조코가 계승 복원하고 이축해 아오야마에서 다시 공개된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

거실에서 다이닝 룸과 2층을 바라본 장면. 1층 오른쪽은 천장이 낮고 차분한 분위기의 다이닝 룸. 식탁 옆의 카운터 문 너머에 부엌이 있다. 부엌에서 이 문을 열어 식사를 차릴 수 있게 했다. 2층 오른쪽은 침실 공간, 왼쪽에는 사진용 암실과 화장실, 쓰치우라 가메키의 서재가 있다.

거실에서 다이닝 룸과 2층을 바라본 장면. 1층 오른쪽은 천장이 낮고 차분한 분위기의 다이닝 룸. 식탁 옆의 카운터 문 너머에 부엌이 있다. 부엌에서 이 문을 열어 식사를 차릴 수 있게 했다. 2층 오른쪽은 침실 공간, 왼쪽에는 사진용 암실과 화장실, 쓰치우라 가메키의 서재가 있다.

당시 부부가 꿈꿨던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을 실험한 이 공간은 오늘날 일본 초기 모더니즘 주택 건축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본래 1935년 시나가와구 가미오사키에 지어졌으나 최근 섬세한 복원과 이전 과정을 거쳐 아오야마에서 새롭게 선보였다. 9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건너 이곳에서 다시 공개된 하얀 상자 모양의 집에는 당대 일본 건축가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현대적 삶이 깃들어 있다.


부엌. 준공 당시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싱크대와 작업대는 이후 스테인리스로 변경됐다. 수납 도어는 블루와 옐로 등의 색으로 몇 차례 칠한 적 있지만 지금은 당시의 색으로 복원됐다.

부엌. 준공 당시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싱크대와 작업대는 이후 스테인리스로 변경됐다. 수납 도어는 블루와 옐로 등의 색으로 몇 차례 칠한 적 있지만 지금은 당시의 색으로 복원됐다.


쓰치우라 부부의 건축적 DNA는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서 시작된다. 도쿄대학교 건축학과 재학 시절 도쿄 임페리얼 호텔 현장에서 라이트의 도면 작업을 도와주게 된 운명적 조우를 통해 라이트와 연을 맺은 가메키는 대학 졸업 후 아내 노부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스튜디오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리처드 노이트라와 루돌프 신들러가 라이트의 제자로 있던 시절이었다.


부부는 그곳에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철학을 흡수하는 동시에 유럽에서 불어오던 근대건축의 새로운 물결과 마주했다. 1926년 일본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수의 주택 프로젝트를 통해 건축가로서 입지를 다졌고, 마침내 자신들의 삶을 담아낼 집을 직접 설계하기에 이르렀다.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은 부부 건축가에게 실험의 장이자, 젊은 부부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구상한 실천적 생활공간이었다.


현관의 바닥면은 타일로 시공하고, 기능적인 벤치를 설치했다.

현관의 바닥면은 타일로 시공하고, 기능적인 벤치를 설치했다.

2층 침실에 놓인 오리지널 화장대. 쓰치우라 부부가 직접 디자인했다. 벽 부착형 조명 역시 두 사람이 거주하던 시절 그대로 재현했다.

2층 침실에 놓인 오리지널 화장대. 쓰치우라 부부가 직접 디자인했다. 벽 부착형 조명 역시 두 사람이 거주하던 시절 그대로 재현했다.


1930년대 일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기능적 주방과 현대적 욕실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생활양식이 이곳에 반영됐다. 외관은 르 코르뷔지에가 선보인 1920년대 후반의 화이트 큐브를 연상시키지만, 세부적인 미학에선 일본 전통건축 특유의 장인 정신과 소재의 질감이 돋보인다. 목조 건식 구조로 설계된 이 도심형 주택은 정원을 향해 활짝 열린 큰 창과 출입구 옆으로 튀어나온 작은 발코니가 특징이다. 실내는 군더더기 없는 장식과 개방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중심부에 자리한 2층 높이의 ‘보이드(Void; 비워둔 공간)’형 거실을 지나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측면에 갤러리와 발코니가 나타나고, 다시 몇 계단 위로 침실과 서재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높이의 공간이 겹쳐지며 시각적 통일감과 리듬감 있는 변화를 동시에 자아내는 구조다.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설비들도 눈길을 끈다. 효율적 동선의 시스템 키친과 설계 단계부터 계획된 붙박이장, 천장 패널형 난방 시스템, 심지어 전화기를 놓을 수 있는 회전식 벽면 수납장까지 도입됐다.

거실과 부엌에는 회전해서 꺼낼 수 있는 벽면 수납공간을 마련해 전화기를 뒀다.

거실과 부엌에는 회전해서 꺼낼 수 있는 벽면 수납공간을 마련해 전화기를 뒀다.


하지만 쓰치우라 부부는 일본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좀 더 단순하고 효율적인 건축방식을 묵묵히 고수하며 자신들의 길을 개척했다. 비록 작품 전반에서 라이트의 영향력이 느껴지지만, 두 사람은 점점 라이트 스타일의 경직성에서 탈피해 나갔다. 무거운 벽돌 구조 대신 가벼운 나무 틀에 석고 패널을 사용했고, 재료와 구조의 표준화를 통해 경제성을 높여 일본 주택의 질적 향상을 꾀했다. 가구 디자인에서도 이런 실험 정신은 이어진다. 안락의자와 화장대, 발 받침대 등에 당시 유행하던 강철 튜브를 도입했다. 미하엘 토네트의 곡목 의자나 알바 알토의 파이미오 의자같이 실용적이고 편안한 형태를 지향한 것이다.

쓰치우라 가메키.

쓰치우라 가메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 다시 우리 앞에 공개된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은 일본 근대건축이 어떤 실험으로 빚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일본인 부부 건축가가 라이트에게 전수받은 건축적 유산, 유럽 모더니즘 건축의 파동, 일본의 고유한 소재와 생활방식이 이 작은 건물에 정교하게 직조돼 있기 때문이다.

쓰치우라 노부코.

쓰치우라 노부코.


노부코는 주택 설계에서 효율적인 공간 활용과 위생, 종합적인 냉난방 시스템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외관은 국제적인 모더니즘 양식을 따르되, 내부는 일본 기후를 고려해 처마 폭을 조절하는 등 지역적 특색을 영리하게 반영한 점도 흥미롭다. 높은 층고를 활용해 시각적 연결과 유려한 동선을 구현하며, 공간적 통일성과 변화라는 상반된 가치를 조화롭게 결합해 냈다.


외부에서 바라본 집은 백색의 매스가 결합된 형태라 전형적인 국제 양식의 모더니즘으로 보이지만, 거대한 창문 벽과 중앙의 층고 높은 거실 공간에서는 스승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선명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승인 라이트가 이 건물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제자들이 노이트라처럼 가스관 난간이나 댐퍼 스타일 같은 차가운 금속 소재를 선택한 걸 두고 “상상력이 부족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Frank Lloyd Wright: Europe and Beyond> 중에서)며 아쉬움이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얀 상자를 닮은 외관과 큰 창이 특징인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

하얀 상자를 닮은 외관과 큰 창이 특징인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

쓰치우라 가메키 저택은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랜 시간 비서로 함께했던 나카무라 조코가 정성껏 관리하며 보존해 왔다. 1995년 도쿄도 유형문화재 지정을 거쳐 근대건축 보존 단체인 ‘도코모모 재팬(Docomomo Japan)’ 선정 건축물로도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예약제로 내부를 견학할 수 있으며, 90년 전 미래를 꿈꿨던 한 부부의 따뜻한 시선을 직접 마주할 기회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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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사진가 마리코 야사카
  •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