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마드리드의 저주받은 건축은 어떻게 위대한 유산이 됐는가

마드리드에 지어진 토레스 블랑카스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다. 스페인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프로필 by 길보경 2026.04.19

마드리드에서 건축가들 사이를 오가다 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토레스 블랑카스에 들어가 본 적 있나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아베니다 데 아메리카 37번지에 지어진 토레스 블랑카스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다. 건축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사엔스 데 오이사와 시공자 후안 우아르테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자칫 ‘저주받은 건축’ 중 하나로 남을 뻔했으나 그 점이 오히려 이 건물의 매력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토레스 블랑카스의 외관 전경.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사엔스 데 오이사(Francisco Javier Sáenz de Oíza)가 설계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토레스 블랑카스의 외관 전경.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사엔스 데 오이사(Francisco Javier Sáenz de Oíza)가 설계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초기 계획은 두 개의 타워를 짓는 것이었지만, 인허가 문제로 하나만 실현됐다. 처음 외관은 콘크리트에 흰 대리석 가루를 섞어 마감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총 23층 가운데 21층은 지금도 105가구의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이사의 구상처럼 이 집들은 나무의 유기적인 성장 패턴을 따라 층층이 이어지며 하늘 위의 샬레처럼 존재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이 건축물이 뿌리처럼 땅속으로 박힌 내력벽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계단과 엘리베이터, 설비가 나무 혈관처럼 수직으로 흐르는 구조적 특징을 단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 곡선형 벽이나 정교한 걸레받이, 난간과 손잡이, 라디에이터 등 건축가가 의도한 디테일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나뭇잎처럼 모여 있는 곡선형 테라스는 이 건축의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세 채의 주거 공간과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작동하는 공용 공간들. 토레스 블랑카스를 걷는 경험은 외관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장엄한 로비에 이르기까지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붉은 컬러의 가구와 창, 벽, 천장 곳곳에 남은 곡선이 레트로 퓨처리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붉은 컬러의 가구와 창, 벽, 천장 곳곳에 남은 곡선이 레트로 퓨처리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71m 높이의 건물 정상에는 360° 전망의 옥상과 수영장이 있다.

71m 높이의 건물 정상에는 360° 전망의 옥상과 수영장이 있다.

이 상징적인 공간에서 두 차례나 작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드물다. 라울 마르틴스는 그중 한 사람이다. 그의 첫 작업은 15년 전, 오랫동안 비어 있던 80㎡ 규모의 주택 레너베이션이었다. 당시 공간은 상당히 낡아 있었지만, 사엔스 데 오이사가 설계한 대부분의 오리지널 요소가 온전히 남아 있어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거의 복원에 가까운 작업이었어요.”


두 번째 챕터는 지난해에 시작됐다. 토레스 블랑카스를 오래도록 동경해 온, 인근에 거주하던 클라이언트를 위한 듀플렉스 레너베이션이었다. “이런 집에 개입하는 일은 늘 도전이죠. 건축 정신을 거스르기보다 그것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주거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끌어올리는 일이죠.” 과거의 무분별한 리모델링으로 이 집은 토레스 블랑카스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라울 마르틴스는 그간의 개입을 하나씩 되돌리는 데서 출발했다.


서가가 중심이 되는 큰 공간. 황동 디테일은 원래 사용된 소재에 대한 은근한 오마주다. 찰스 & 레이 임스가 디자인한 비트라(Vitra) 라운지체어가 공간에 임팩트를 더한다.

서가가 중심이 되는 큰 공간. 황동 디테일은 원래 사용된 소재에 대한 은근한 오마주다. 찰스 & 레이 임스가 디자인한 비트라(Vitra) 라운지체어가 공간에 임팩트를 더한다.

과거 테라스였던 공간을 포함한 마스터 룸. 타워를 지탱하는 콘크리트 기둥 중 하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과거 테라스였던 공간을 포함한 마스터 룸. 타워를 지탱하는 콘크리트 기둥 중 하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석고 보드 뒤에 가려져 있던 물결 형태의 벽을 다시 드러내고, 콘크리트 기둥을 노출시켰다. 욕실에는 그레사이트 타일을, 바닥에는 오리지널을 연상시키는 목재 마감을 적용했다. 일부 도어에는 과거 사무 공간에 사용되던 앰버 컬러 유리를 더해 시간의 흐름을 환기했다. 이후 맞춤 가구와 디자인 피스를 더해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가족을 위한 따뜻하고 절제된 주거 공간을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벽의 곡선을 따라 설계한 맞춤 서가다. 거실·서재·주방이 하나로 이어지는 이 공간은 황동 디테일에 햇빛이 반사되는 순간 비로소 이 집의 진가를 드러낸다. “건축 자체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인테리어가 이를 압도하지 않으면서 ‘집’으로 기능하도록 섬세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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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길보경
  • 글 에두아르도 인판테
  • 사진가 하비 리코 / 마드리드 브루탈리즘
  • 패션 스타일리스트 메르세데스 루이즈-마테오스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