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동안 60여 개의 의자를 디자인한 건축가
의자 하나로 역사를 말할 수 있을까? 비코 마지스트레티의 작품은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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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의 의자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그가 남긴 스케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정갈하게 정리된 도면부터 생각이 앞서 손이 먼저 움직인 듯한 습작까지. 겹겹이 포개진 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에게 드로잉은 단지 결과를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앉는 방식과 머무는 시간을 끈질기게 되짚는 연필 끝에서 마지스트레티의 의자는 조금씩 형태를 갖춰 나갔다.
1981년 까시나를 위해 디자인한 소파 ‘신드바드 스케치.
흘러내리는 양탄자 같은 형태에 말 담요에서 영감받은 컬러를 더한 ‘신드바드’. 손쉬운 커버 교체가 가능하며,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무드를 선사하는 소파다.
“커다란 천이나 가죽 조각을 소파나 안락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보고 그 모습이 어떤지 바라보는 제스처만큼 멋진 건 없습니다.” 마지스트레티는 1981년 까시나를 위해 디자인한 ‘신드바드(Sindbad)’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흘러내리는 양탄자 같은 형태의 출발점은 소파 위에 무심히 던져진 천 조각이었다. 종마 목장에서 본 말 담요(Horse Rug)에서 영감받은 커버는 단추로 고정해 손쉽게 색과 소재를 바꿀 수 있다. 마지스트레티에게 의자는 완결된 조형이라기보다 일상의 리듬과 사용자의 기분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친근한 사물에 가까웠다.
비코 마지스트레티.
1920년 밀란에서 태어난 비코 마지스트레티는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조 콜롬보와 같은 시대를 통과한 전후 이탈리아 디자인의 중심 인물이다. 마흔 살까지 건축가로 활발히 활동하다 1959년 밀란 북부의 ‘카리마테(Carimate)’ 골프 클럽을 위해 디자인한 다이닝 체어가 1960년 트리엔날레에서 체사레 카시나(Cesare Cassina)의 눈에 띄었고, 이를 기점으로 까시나 · 아르테미데 · 데 파도바 · 카르텔 · 프리츠한센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기 시작했다. 개기 월식을 모티프로 한 테이블 램프 ‘에클리세(Eclisse)’, 접이식 소파 ‘마랄룽가(Maralunga)’, 버섯 모양의 테이블 램프 ‘아톨로(Atollo)’로 세 차례의 황금콤파스상(Compasso d’Oro)을 받았다.
카테고리에 구애받지 않고 수많은 디자인을 남긴 그였지만, 마지스트레티의 시선은 늘 의자로 되돌아왔다. 86세까지 살며 무려 60여 년 동안 60여 개의 의자를 디자인했고, 그중 일부는 미세한 조정을 거치거나 리에디션돼 여전히 출시되고 있다. 밀란 비코 마지스트레티 재단은 의자를 향한 마지스트레티의 집념과 애정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More or Less 60 Chairs in 60 Years>라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자전거 체인을 숨겨 넣어 머리 받침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1973년 작 ‘마랄룽가(Maralunga)’. 마지스트레티는 이 소파로 1979년 황금콤파스상을 수상했다.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일상에서 포착한 사소한 관찰과 생각의 파편은 각기 다른 의자의 형태로 자라났다. 첫째는 장식을 덜어낸 단순한 구조다. 현재는 프리츠한센에서 생산되는 ‘카리마테 체어’와 까시나에서 재출시한 ‘905’처럼 모던한 디자인뿐 아니라 찰스 레니 매킨토시 전시에서 영감받은 ‘골렘(Golem)’이나 “사람이 없어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간을 만드는 의자 ‘판(Pan)’이 그렇다.
1960년대 플라스틱 사출 성형 방식으로 제작한 ‘셀레네(Selene)’. 뉴욕 현대미술관(MoMA) 영구 컬렉션에 소장된 비코 마지스트레티의 아이코닉한 디자인이다.
이처럼 마지스트레티의 디자인에는 절제와 실험이 공존한다. 그는 수공예에서 산업화로 넘어가는 시대 흐름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신소재와 대량생산 기술을 과감히 시도하면서도 과시적 형태를 강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플라스틱 사출 성형 방식으로 하나의 곡면이 좌석과 등받이, 다리까지 이어지는 ‘셀레네(Selene)’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영구 컬렉션에 포함된 마지스트레티의 역작이다. 플라스틱 사출 성형 의자는 다리가 약해 대부분 다리가 굵거나 아래로 갈수록 얇아지는 형태를 취하는데, 마지스트레티는 두께 3mm의 플라스틱 시트를 S자 형태로 설계함으로써 뛰어난 균형과 비례, 내구성을 두루 갖춘 형태를 구현했다.
조개껍데기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유기적 디자인의 암체어 ‘바스켓(Basket)’.
2004년 데 파도바를 위해 디자인한 모델로, 낮고 푹신해 소파 옆에 둬도 자연스럽다.
고정형, 회전형, 흔들형 등 다양한 베이스를 선택할 수 있어 호텔이나 회의실에서 쓰기 좋은 의자.
마지스트레티의 디자인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변형’이다. 그의 여러 의자에서 드러나는 접히고 펼쳐지는 구조는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응답이었다. “모든 것은 쿠션이 달린 팔걸이에서 시작됐어요. 그걸 관찰하며 움직이다가 ‘소파에도 움직일 수 있는 머리 받침 쿠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관찰에서 출발해 마지스트레티는 등받이가 구부러지는 ‘마랄룽가’를 만들었다. 내부에 자전거 체인을 넣어 보다 세밀한 높이 조절 기능을 구현했는데, 마지스트레티는 특허받은 이 기술보다 이 소파가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새로운 생활 방식에 응답한 디자인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곤 했다. 마지스트레티에게 가정용과 사무용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의자가 ‘여러 생활 장면’을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위) 손쉽게 접어 의자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1994년 작, 이동식 데이베드 ‘오스텐다(Ostenda)’. (아래) 샤를로트 페리앙의 ‘셰즈 라운지체어’에서 영감을 받아 1997년 캄페지(Campeggi)와 함께 간이 침대로 펼쳐 사용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 ‘샤를로트(Charlotte)’.
1985년 까시나를 위해 디자인한 의자로 뒷다리가 팔걸이로 이어지는 ‘빌라비앙카(Villabianca)’,
‘빌라비앙카(Villabianca)’는 이런 생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의자다. 살짝 접힌 듯한 좌석의 곡선과 팔걸이에서 뒷다리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어떤 공간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뒤집힌 안장 형태의 좌석에 위로 둥글게 솟은 다리를 접목한 ‘인치사(Incisa)’는 유기적 디자인에 어떤 장소에도 잘 어울리며, 네 갈래의 고정 다리 또는 바퀴 달린 다섯 갈래 다리를 선택할 수 있어 더욱 범용적이다.
암체어나 라운지체어처럼 부피가 큰 모델을 통해서는 단순한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넘어 공간 속에서 가구가 차지하는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정의하려 했다. 옛 시골집에서 벽난로 안쪽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따뜻한 불 옆에 앉았던 것처럼 마지스트레티는 ‘포르토베네레(Portovenere)’라는 소파를 언제나 사용자를 맞이할 준비가 된 ‘방 안의 작은 방’이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의 소박한 식당이나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의자 형태를 재해석한 1987년 데 파도파 제품 ‘마로카(Marocca)’
마르셀 브로이어의 ‘811’ 체어를 모티프로 한 ‘실버(Silver)’는 1989년 데 파도바 제품으로 목재 대신 알루미늄 튜브에 도쿄 시장의 달걀 바구니에서 영감받은 폴리프로필렌 시트를 등받이와 좌석에 적용했다.
한편 간단한 조작으로 라운지 체어에서 바퀴 달린 데이베드로 변하는 ‘오스텐다(Ostenda)’는 마지스트레티가 의자를 통해 삶의 장면을 얼마나 유연하게 확장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사실 마지스트레티는 디자이너로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의자의 변형 가능성에 주목했다. 1946년 푸마갈리(Fumagalli)와 함께 만든 접이식 의자 ‘피치(Piccy)’는 간결한 구조와 가벼운 사용성을 앞세운 초기 사례. 이후 2000년 캄페지(Campeggi)를 통해 선보인 접이식 아웃도어 체어 ‘아프리카(Africa)’에 이르기까지 접히고 이동하며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의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형태와 소재를 달리하며 꾸준히 이어졌다.
얇은 자작나무 좌석에 금속 다리를 끼워 만든 1997년 작품 ‘비코듀오(Vicoduo)’.
거꾸로 뒤집힌 안장에 둥글게 휜 곡선 다리를 접목한 1992년 데 파도바 제품 ‘인치사(Incisa)’. 등부터 좌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곡선으로 안정적 구조를 구현한 1996년 카르텔 제작 의자 ‘마우이(Maui)’. 좌석 가운데 두 개의 검은색 포인트로 좌석과 다리를 심플하게 연결한 볼트의 존재감을 드러낸 ‘비코솔로(VicoSolo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남긴 많은 의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그의 디자인이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뿐 아니라 마지스트레티 본인 역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내내 느꼈음을 실감한다. 마지스트레티는 작고하기 3년 전인 2003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의자에 대해 약간 부끄러울 정도로 집착이 있어요. 아마도 의자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타협도 허락하지 않죠. 의자에 만족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일평생 의자를 디자인해 온 이 거장에게 의자란 끝내 풀리지 않을, 어쩌면 영영 풀고 싶지 않을 수수께끼가 아니었을까.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OURTESY ARTEMIDE·CASSINA·CAMPEGGI·DE PADOVA·FRITZ HANSEN·KARTELL
- SCHIFFINI
- ©ARCHIVIO STUDIO MAGISTRETTI – FONDAZIONE VICO MAGISTRE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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