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커트러리 디자인 거장이 지은 완벽한 요새

장인의 손길이 깃든 커트러리가 만들어지는 자연 속 원형 공장. 데이비드 멜러가 설계한 ‘더 라운드 빌딩’은 장인정신과 현대적 산업 디자인의 완벽한 합일을 보여준다.

프로필 by 이경진 2026.04.08

영국 더비셔 주의 헤더세이지.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안에 자연의 일부인 듯 완만한 구릉지를 닮은 모습으로 자리 잡은 이곳은 영국 디자인 신에서 ‘커트러리의 왕’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멜러의 영혼이 깃든 공장 ‘더 라운드 빌딩(The Round Building)’이다. 데이비드 멜러는 아름다운 식기뿐 아니라, 영국인의 일상 풍경을 정의한 디자이너다. 1960년대 그가 설계한 현대식 신호등 시스템과 가로등, 공공 우체통 디자인은 영국 거리의 표준이 되기도 했다.


영국 헤더세이지 지역의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내에 고요하게 자리 잡은 데이비드 멜러 팩토리 ‘더 라운드 빌딩’. 건축가 마이클 홉킨스와 데이비드 멜러의 깊은 교감으로 탄생했다.

영국 헤더세이지 지역의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내에 고요하게 자리 잡은 데이비드 멜러 팩토리 ‘더 라운드 빌딩’. 건축가 마이클 홉킨스와 데이비드 멜러의 깊은 교감으로 탄생했다.

“디자인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이의 삶을 개선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멜러의 이런 신념은 작은 커트러리 디자인에서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1953년에 탄생한 ‘프라이드(Pride)’ 시리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데이비드 멜러의 제품은 절제된 미학 속에 고도의 기능성을 품는다.


커트러리 브랜드를 창립하며 멜러는 완벽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완벽한 요새’를 짓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1990년에 완공된 것이 바로 이 팩토리다. 외벽은 지역에서 채굴한 거친 사암을 사용해 국립공원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그 위는 정밀하게 가공한 유리와 강철 지붕으로 덮여 있는 이 건물은 하이테크 건축의 선구자인 마이클 홉킨스(Michael Hopkins)와 데이비드 멜러가 나눈 교감의 산물.


멜러는 마을의 흉물이었던 가스 저장고 부지를 구입해 마이클 홉킨스를 찾았고, 완벽주의 디자이너답게 건축가에게 매우 구체적이고 도전적 미션을 던졌다. 장소의 역사성을 이어가고 싶으니 가스 저장고의 흔적을 지우지 말 것, 금속의 광택을 다루는 작업자들이 눈부심 없이 제품 디테일을 볼 수 있도록 균일하고 풍부한 자연광이 들게 할 것, 국립공원의 주변 경관과 이질감이 없어야 할 것. 건축가와 건축주로서 두 거장의 협업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한 정교한 고민 끝에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자전거 바퀴를 닮은 강철 트러스 지붕 구조. 중앙의 대형 원형 채광창은 내부 기둥이 없는 공간 전체에 균일한 자연광을 공급해 장인들이 커트러리의 미세한 광택을 살피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자전거 바퀴를 닮은 강철 트러스 지붕 구조. 중앙의 대형 원형 채광창은 내부 기둥이 없는 공간 전체에 균일한 자연광을 공급해 장인들이 커트러리의 미세한 광택을 살피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데이비드 멜러는 이 건물을 설계할 당시, 커트러리의 생산 공정을 한 편의 안무로 봤다. 원재료를 자르고, 연마하고, 광을 내고, 포장돼 나가는 과정이 원형 공간 안에서 물 흐르듯 순환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멜러의 요구대로 더 라운드 빌딩은 작업 동선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모든 공정이 중앙에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완성됐다. 특히 건축적으로 놀라운 지점은 ‘자전거 바퀴’의 원리를 응용한 지붕 구조다. 내부 기둥이 전혀 없는 무주(無柱) 공간은 중앙의 압축 링으로 모이는 강철 서까래들이 지탱한다. 이 탁 트인 원형 공간에서 원재료 절단부터 연마, 포장에 이르는 커트러리 제조 전 과정이 시계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스푼의 부드러운 곡률을 결정짓는 묵직한 강철 금형.

스푼의 부드러운 곡률을 결정짓는 묵직한 강철 금형.

포크들이 모여 반복되는 패턴에서도 데이비드 멜러의 디자인 미학이 느껴진다.

포크들이 모여 반복되는 패턴에서도 데이비드 멜러의 디자인 미학이 느껴진다.

황동 리벳과 블랙 핸들의 대조는 데이비드 멜러의 상징적인 디자인이다.

황동 리벳과 블랙 핸들의 대조는 데이비드 멜러의 상징적인 디자인이다.

손때 묻은 연장들이 걸려 있는 작업대 아래에 놓인 데이비드 멜러 디자인의 어린이용 스푼.

손때 묻은 연장들이 걸려 있는 작업대 아래에 놓인 데이비드 멜러 디자인의 어린이용 스푼.

건축물 상단에 길게 띠를 두른 클리어스토리(Clerestory) 채광창은 지붕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시각적 환영을 선사한다. 이 창을 통해 쏟아지는 균일한 자연광은 금속의 미세한 스크래치까지 잡아내야 하는 장인들에게 최상의 작업 환경을 제공한다. 작업 중 고개를 들면 피크 디스트릭트의 아름다운 하늘과 나무 꼭대기를 볼 수 있어, 폐쇄적인 공장이 아닌 자연의 일부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원형 공장의 중심을 향해 배치된 개별 워크스테이션은 효율적인 작업 동선뿐 아니라 작업자의 집중도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묵직한 기계 설비와 장인의 세밀한 수작업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세계 최고의 커트러리가 완성된다.

원형 공장의 중심을 향해 배치된 개별 워크스테이션은 효율적인 작업 동선뿐 아니라 작업자의 집중도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묵직한 기계 설비와 장인의 세밀한 수작업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세계 최고의 커트러리가 완성된다.

데이비드 멜러는 공장 내부의 작업대와 수납 시스템까지 직접 설계하며, 장인이 도구와 일체감을 느끼도록 했다. 데이비드 멜러가 작고한 뒤, 아들 코린 멜러가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은 공장을 넘어 ‘데이비드 멜러 디자인 쿼터’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해, 매년 수천 명의 디자인 전공자와 건축가들이 성지순례처럼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데이비드 멜러.

데이비드 멜러.

물론 공장 내부에선 지금도 10여 명의 장인이 원형 건물에서 수작업으로 세계 최고의 커트러리를 만든다. “일과 디자인 그리고 삶은 분리될 수 없다”고 했던 데이비드 멜러는 모든 면에서 현대적인 산업 디자이너였지만, 정신적 뿌리는 예술 공예 운동에 있었다. 대자연 속에 뿌리 내린 그의 원형 공장은 오늘도 선명하게 살아 숨쉬며, 인간 중심 디자인과 장인 정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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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OURTESY OF DAVID MELLOR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