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완벽한 믹스매치! 아티스트 크리스틴 선 킴의 베를린 아파트

“마침내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을 만난 크리스틴 선 킴의 베를린 아파트는 소리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온 그녀의 예술처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교차하며 하나의 서사로 살아 숨쉰다.

프로필 by 윤정훈 2025.10.02
거실에서 바라본 맞은편 아파트 풍경.

거실에서 바라본 맞은편 아파트 풍경.


“여러 도시를 전전했지만 이런 집은 처음이에요. 마침내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사운드 기반의 시각 예술가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은 지난해 베를린의 한 고층 아파트로 이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도심 아파트를 ‘집다운 집’이라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킴은 농인이자 예술가로서 미국 수어(American Sign Language; ASL)를 사용하는 커뮤니티의 소통 방식을 드로잉과 설치미술, 영상 등으로 풀어왔다. 그녀에게 소리는 보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의 영역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무지개에 비유한 드로잉 ‘My Voice Acts Like ROYGBIV’나 표정과 몸짓만으로 완성된 오페라를 담은 ‘Face Opera’ 시리즈 등에서 알 수 있듯 킴의 세상은 또 다른 차원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침실 한편 캐비닛에 등을 대고 있는 크리스틴 선 킴.

침실 한편 캐비닛에 등을 대고 있는 크리스틴 선 킴.


킴의 새로운 집 역시 그녀의 작품 같다.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뽐내는 동양 무드의 미닫이문부터 허공을 부유하는 듯 자유분방한 서랍장 손잡이까지, 제각기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것들로 인해 여느 공간보다 다채롭고 소란한 기운이 넘친다. 킴은 독일인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산다. 아파트는 1970년대에 조성된 대규모 주거 지역에 있는데, 처음부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20세기 말 모더니즘 특유의 질서 정연한 외관은 다소 삭막했고, 실내는 비좁고 천장도 낮았다. 그러나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건축가 친구 플로리안 게더트(Florian Geddert)의 적극적인 권유로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레너베이션 계획까지 세울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집을 고쳤다. 불필요한 벽을 허물어 널찍한 거실과 주방을 확보했으며, 바닥은 콘크리트 벽과 유사한 색감의 에폭시 수지로 마감해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인테리어는 킴의 절친이자 디자이너인 리오 코바야시(Rio Kobayashi)가 맡았다.


일본 전통 문 쇼지에서 영감받은 미닫이문을 침실과 거실 사이에 설치했다. 앞에 놓인 의자는 리오 코바야시가 픽업 스틱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미카도산 체어’.

일본 전통 문 쇼지에서 영감받은 미닫이문을 침실과 거실 사이에 설치했다. 앞에 놓인 의자는 리오 코바야시가 픽업 스틱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미카도산 체어’.


“리오와는 2014년 동네 바에서 남편과 함께 만나 친해졌어요. 한번은 남편에게 리오가 디자인한 ‘미카도산 체어(Mikadosan Chair)’가 마음에 든다고 한 적 있는데, 마흔 번째 생일 선물로 받았어요. 그때부터 리오의 작업을 집에 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이 집을 구했을 때 바로 리오에게 문자를 보냈죠. ‘꼭 우리랑 일해 줘야 해!’ 리오의 미감과 위트를 정말 좋아해요. 동서양의 균형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어 우리 가족에게 이상적 배경이 돼주거든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리오 코바야시는 과감한 형태와 다채로운 색 조합으로 독창적 오브제를 만들어온 디자이너다.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색색의 미카도산 체어와 그림, 초록색 캐비닛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대비가 흥미롭다.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색색의 미카도산 체어와 그림, 초록색 캐비닛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대비가 흥미롭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교한 만듦새, 그리고 오브제가 공간이나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상상하는 즐거움이다. 또 일본계 오스트리아인인 그에게 문화의 융합은 오랜 영감의 원천이자 작업 동력이었다. 거실과 침실 사이 그리고 침실 한쪽에 설치한 두 개의 미닫이문은 일본 전통 가옥에서 쓰는 문 ‘쇼지’를 재해석한 것이다. 마치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를 펜으로 정갈하게 따라 그린 듯 독특하게 교차하는 문살은 코바야시가 서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침실 수납장 문으로 만든 파란색 미닫이문은 가쓰라 황궁(Katsura Imperial Villa)에서 영감받아 파란색과 흰색 체크무늬로 디자인했어요. 바이에른 주의 깃발과 유사한 컬러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또 다른 문화와 연결된 것 같아 기뻤죠. 킴의 남편이 바이에른 주 출신이거든요. 한국 전통 가옥에도 종이 문이 쓰였기에 각 나라의 패턴과 미학적 차이도 함께 연구했어요. 이렇게 문화적 요소를 섞는 것은 제 작업에서 늘 중요했고, 이제는 제 스타일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킴의 침실. 원목 침대의 프레임은 제롬 바이런(Jerome Byron)의 디자인, 퀼트는 제스 사모라 -터너(Jess Zamora-Turner)의 작품. 미닫이문의 스파이 홀 너머로 보이는 킴. 킴의 침실. 가쓰라 황궁에서 영감받은 쇼지 미닫이문에는 각각 한국과 독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부부의 정체성을 녹여냈다. 벽과 모서리를 채운 캐비닛의 손잡이는 불규칙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기능적인 배치.

이곳엔 코바야시가 숨겨둔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바닥에 삽입된 한국 · 미국 · 독일 · 영국 동전은 킴 부부와 코바야시의 문화를 드러내는 작은 디테일이고, 거실 미닫이문에 낸 작은 구멍은 코바야시가 어린 시절 종이 문에 구멍을 뚫고 놀던 기억에서 비롯했다. “문을 열지 않아도 거실을 엿볼 수 있는 이 스파이 홀은 소리 없이 연결될 수 있는 조용한 숨바꼭질 같은 장치예요. 어린 시절의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요. 때론 그런 마음을 붙잡는 게 정말 중요하니까요. 이런 디테일이 공간과 가족이 깊이 연결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아이들 장난감과도 잘 어우러지는 초록색 수납장. 물결을 닮은 패턴의 타일을 부착한 욕실 벽. 동그란 손잡이가 배치된 모습이 악보를 연상시키는 거실 캐비닛.

시간이 흘러 이 집을 떠나더라도 기억은 남으니까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디자인하다 보면 그 사람을 닮은 무언가가 은근슬쩍 나타나기도 한다. 모서리가 둥근 캐비닛에 달린 동그란 손잡이들을 보고 있으면, 킴이 줄곧 작품 요소로 차용해 온 악보나 음표가 떠오른다. 오선지가 아니라 네 줄짜리 사선지에 음표나 미세한 번짐을 더해 소리를 시각화한 킴의 드로잉처럼 이리저리 놓인 캐비닛 손잡이는 리드미컬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악보를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배열이 리듬이나 움직임처럼 보이긴 하죠. 검은색 점 사이사이 빨간색과 파란색 점 같은 포인트들은 대비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구두점이 되기도 하거든요. 크리스틴의 작업이 제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 걸지도 몰라요. 어쩌면 시각적 소리를 더하는 저만의 방식일 수도 있겠네요.”


침실 한쪽 미닫이문을 열면 나타나는 옷장. 바닥에 삽입된 5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은 킴의 한국적 뿌리를 드러내는 귀여운 디테일이다.

한편 킴이 이 집에서 가장 만족하는 점은 효율성이다. 불규칙적으로 배치된 손잡이 위치는 철저히 기능적 이유를 따랐고, 곳곳에 마련된 수납공간 덕분에 정돈된 환경을 유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이 집의 기능적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요. 충전기와 엉킨 케이블을 숨기기 위한 콘센트를 내장한 전용 서랍이 그렇죠. 전 눈에 보이는 게 많으면 쉽게 산만해지거든요.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제게 좀 더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줘요.” 삶의 뿌리부터 지금의 라이프스타일, 머지않은 미래까지 포용하는 이 집에서 킴은 막연한 긍정에너지를 얻는다. “이런 집이 생기니 머릿속 아이디어가 훨씬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제 작업에도 영향을 주겠죠. 하지만 지금으로선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요. 한 10년쯤 뒤에 다시 물어봐줄래요?”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사진가 이민
  • 스타일리스트 김성연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