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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을 노래하는 조각가 존 배

시간을 잇는 철의 대화로서 조각을 창조해온 존 배. 7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예술 여정을 관통한 흔들림 없는 열정과 몰입에 관하여.

프로필 by 권아름 2024.09.27

존 배

존 배는 ‘공간 속 드로잉’이라는 독창적인 예술 언어를 통해 작은 철심 두 조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즉흥적이지만 철저한 대화를 통해 조각과 조각이 맞닿고, 그 결과물은 지나칠 정도로 풍부하고 정교하다.


당신의 작품은 하나의 음표에서 시작된다고 밝힌 적 있습니다. 작은 철 조각을 한 개씩 이어 붙여 완성하는 작업 과정을 음과 음을 이어가는 작곡에 비유한 시작점은 무엇일까요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TV에서 말하길 “음악은 다음 음에 관한 것”이라고 했어요. 당시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되기 시작했죠. 그건 일종의 ‘대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보면 ‘다다다다~’로 시작한 다음에 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음 중에서도 베토벤은 낮은 키로 반복하는 선택을 했어요. 흥미롭게도 베토벤의 아카이브에서 그가 사용하지 않은 음들을 발견했는데, 그 음들은 클래식 음악이 아닌 브로드웨이 곡처럼 들립니다. 결국 베토벤의 선택에는 그가 느꼈던 음과 음 사이의 대화가 반영돼 있는 것입니다. 내 작업도 비슷합니다. 철 조각 사이에서 대화가 이뤄집니다. 대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철 조각 사이의 대화를 이어갈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나요 베토벤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음이 벽돌처럼 쌓여 그 단위들이 끊임없이 소통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내 작업에도 그런 대화를 담으려고 합니다. 여기 있는 한 점이 선으로, 선이 면과 부피로 이어지며 하나의 음량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내적 대화가 이뤄져요. 결국 모든 것은 대화입니다. 질문이 얼마나 깊이 있는가에 따라 양질의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Involution’(1974).

‘Involution’(1974).

‘Heaven and Earth’ 연작 1-7(2024).

‘Heaven and Earth’ 연작 1-7(2024).

작품의 완성을 상정하지 않은 채 작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압니다. ‘공간 속 드로잉’으로 유기적 구조를 만들어나갈 때, 철 조각을 이을 때 오롯이 직관에 의해 움직이나요 직관과 본능에 따릅니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작업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예요. 사물을 가장 작은 단위로 축소한 다음 그것을 다시 쌓아 올립니다. 그런 과정에서 특정한 사고방식이 생겨납니다. 차곡차곡 철심을 잇다 보면 복잡하게 얽힌 선의 집합체가 됩니다. 완성을 상정하지 않아서 창작 도중 길을 잃은 적은 없나요 종종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만, 그건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길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죠. 낯선 길을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지만, 이전에 넘지 못했던 경계를 허물 기회가 됩니다. 길을 잃는 건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라고 여겨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 이런 순간을 해결해 나갑니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작업 중 시간이 주는 압박감을 어떻게 다루나요 시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지만, 나는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부족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죠. 마치 칫솔로 집을 칠하는 것처럼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겠다고 결심하면 그 과정에서 힘이 생겨요. 예술가의 삶은 끊임없는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하죠. 사람들이 내게 “열두 살 이후에 현악기를 배우면 이미 늦었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듣고도 일흔 살에 첼로를 시작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첼로를 배우면서 즐겁고, 그것이 새로운 힘을 준다면 안 할 이유가 없어요.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압박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와 열정이 중요합니다.


갤러리 현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명의 조우> 지하 전시 전경.

갤러리 현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명의 조우> 지하 전시 전경.

‘Chamber to Chamber’(2003).

‘Chamber to Chamber’(2003).

‘Shared Destinies’(2014).

‘Shared Destinies’(2014).

이번 전시에선 종이에 펜으로 그린 존 배 작가의 드로잉과 회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드로잉과 회화도 조각 작품과 같은 방법으로 작업하나요?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드로잉과 페인팅은 색상과 형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 무의식과 환상을 폭넓게 탐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조각에서 성취하기 어려운 부분이죠. 상상을 구현하는 방식도 많이 다릅니다. 회화에서는 최종 결과물에 대한 걱정 없이 점과 선 등의 요소를 공간으로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회화는 조각에 비해 좀 더 유연하고 제약이 적습니다. 때때로 작업의 뿌리를 시작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 띠를 비롯한 수학적 개념, 모호한 공간성과 운동성에 주목하는 과학적 아이디어에 두곤 합니다 과학자들이 현실을 이해하려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질문을 던지고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려고 하죠. 그런 점에서 내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에는 ‘안’과 ‘밖’이 뒤섞이는 위상수학 같은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동그란 형태를 자세히 보면 안쪽이 바깥쪽이 되고, 바깥쪽이 안쪽이 되기도 합니다. 마술 같죠. 이런 개념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때때로 종이로 아이디어를 탐구해요. 테이프처럼 만들어 비틀어 연결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 같은 조각 작품들 사이에 앉아 있는 존 배 작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 같은 조각 작품들 사이에 앉아 있는 존 배 작가.

작업 중 개인 경험이나 감정을 반영하기도 하나요? 특별히 영향을 미친 작품이 있다면 모든 작품에 경험이나 감정을 반영하는 건 아니지만, 영향을 미친 작업은 있습니다. ‘Risen, Fallen, Walken’은 학과장이었던 친구의 어려운 상황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그는 학과장으로서 큰 책임을 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비난도 받았지만 끝내 모든 난제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또 하나는 딸이 임신 중에 응급 심장판막 치환 수술을 받았을 때 그린 드로잉입니다. 딸과 손녀가 무사히 퇴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담았어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10여 년 만의 개인전 <운명의 조우>에서 2024년 작인 조각 작품 ‘Heaven and Earth’를 선보였습니다. 회고전에 가까울 만큼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총망라한 전시로 그동안의 물리적 노동과 창조의 위대함이 느껴졌습니다. 무려 70여 년간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나요 내 작품은 나름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나를 잡아당기며 끝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감을 항상 느끼곤 합니다. 때로는 피곤하거나 산만해서 그런 요구를 놓치기도 하지만 항상 주의하죠. 창작의 답은 늘 가까이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매우 풍부하고 흥미로운 것이 눈길을 끈다 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보지 못할 때가 있어요. 작가는 어떤 창의적 경각심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사진가 김형상(인물)
  • 사진가 GEOFFREY QUELLE(작품)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정혜림
  •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