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안토니 곰리는 누구? 안도 타다오와 뮤지엄 산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조각가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안토니 곰리의 조각이 던져온 두 개의 질문이다.

프로필 by 이경진 2025.07.05
뮤지엄 산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안도 타다오와 안토니 곰리 협업 상설관 ‘Ground’의 모형 이미지.

뮤지엄 산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안도 타다오와 안토니 곰리 협업 상설관 ‘Ground’의 모형 이미지.

드디어 뮤지엄 산의 새로운 상설관 ‘Ground’가 공개됐습니다. 당신과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협업했죠. 돔 형태의 공간에 조각과 건축이 하나의 감각적 구조로 공명합니다. 누구라도 깊은 명상에 잠길 듯한 장소입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항상 건축물이 땅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탐구해 왔습니다. 그의 작업은 지면 위에 놓이기도 하지만 지면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도 하지요. 건축의 주요한 터전으로서 ‘대지’와 구조를 드러내는 ‘빛’ 사이의 긴장감은 조각가인 저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안도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건 제게 큰 특권이었어요. 우리는 지구라는 이 행성을 물리적인 질량으로 느낍니다. 이번 협업을 통해 그 질량 안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냈죠. 그 공간을 빛으로 열고, 그 빛 속에 철로 만든 인간의 몸을 닮은 일곱 점의 형상을 놓았습니다. 각각의 조각이 단순한 오브제를 넘어 공간과 우리 존재 자체를 다시 활성화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삶과 예술 그리고 자연이라는 모든 것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열린 대지’를 상상하며 공간을 설계했습니다.


“물리적 공간과 상상적 공간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 이번 전시 <Drawing on space>의 핵심이라 밝혔습니다. 인간에 대해 감각적인 민감성을 기대하는 전시처럼 보이기도 해요

저는 늘 인간의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해 왔어요.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거처이며, 사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장소로 이해하고 싶었죠. 몸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감각이 지나가는 통로입니다. 동시에 서로를 연결하고 인간을 넘는 세계와 이어주는 매개이기도 하죠. 조금 욕심일 수 있지만, 제 작업이 그런 감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반성적 경험을 위한 ‘촉매’나 ‘장소’가 되길 바랐습니다. 철로 된 블록의 배치 안에서 관람자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 위치를 자각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거죠. 이 조각들은 특정 인물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신체 자세의 ‘메아리’입니다. 묘사된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투사에 열려 있는 형상이죠. 몸은 상상력의 터전입니다. ‘Ground’에 놓인 일곱 점의 조각이 우리가 각자의 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요.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Ground: Hold’(2024), ‘Ground: Earth’(2024), ‘Ground: Ache’(2024), ‘Ground: Ward’(2024), ‘Ground: Bare’(2024), ‘Ground: Rise’(2024).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Ground: Hold’(2024), ‘Ground: Earth’(2024), ‘Ground: Ache’(2024), ‘Ground: Ward’(2024), ‘Ground: Bare’(2024), ‘Ground: Rise’(2024).

‘Ground’시리즈처럼 인체를 구조화한 조각부터 ‘Liminal Field’나 ‘Orbit Field II’처럼 비물질적 구조에 가까운 작업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Liminal Field’는 제목 그대로 경계적이고 불확정한 상태를 다루는 연작이죠. ‘Ground’시리즈는 단단하고 구조화된 존재를, ‘Orbit Field’는 흐르고 움직이는 존재를 상정합니다. 물리와 상상이라는 두 영역의 긴장을 공존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가 있나요

이번 전시가 하나의 층위로 읽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단단한 덩어리감의 조각이 있다면, 그와 대조되는 가볍고 공기 속에 그려진 듯한 입체적 드로잉을 함께 배치했죠. 이 조각들은 밀폐된 덩어리라기보다 틈이 있고 숨이 통하는 구조입니다. 다공성이고, 열려 있죠. 무엇보다 관람자의 신체적 경험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고 싶었습니다. ‘Orbit Field II’는 관람자가 자각적 여정을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감각 환경이 됩니다. ‘Ground’에선 누군가의 시선에 놓이는 순간, 관람자도 하나의 ‘형상’이 돼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존재’가 되겠지요.


당신의 1980년대 드로잉과 판화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안토니 곰리의 조각과 드로잉은 어떤 인식적 혹은 감각적 차원을 보완하거나 확장하나요

드로잉은 저에게 일종의 춤이에요. 손과 마음, 눈이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표현 방식이라고 할까요. 드로잉 역시 그 자체로 완전한 예술 행위입니다. 조각과 전혀 다른 궤도로 움직이지만, 함께 나란히 존재하며 서로를 비추지요. 드로잉을 통해서만 드러내는 빛과 공간, 물질에 대한 접근법이 있고, 그것은 하나의 ‘발견 과정’입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가장 흥미로운 드로잉 몇몇은 제가 그린 것이라기보다 ‘저를 끌어당긴’ 그림에 가깝습니다. 이 드로잉들은 제 작업이 발생하는 ‘장(Field)’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Liminal Field: Assume’(2015).

‘Liminal Field: Assume’(2015).

당신이 펼쳐온 드넓은 창작의 원점이 늘 궁금했습니다. 예술적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지점 혹은 작업을 시작하게 만드는 내면의 상태는 무엇일까요

작업이 늘 또 다른 작업을 불러옵니다. 지금의 삶에서 저는 작품이 제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체처럼 존재할 뿐이에요. 이를 실현해 주는 놀라운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작은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데, 어떤 생각이나 감정의 첫 발현은 그 안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이 최종 설계도는 아니에요. 어떤 방향을 암시하는 단서일 뿐이지요. 지금은 비록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지만 제 작업은 여전히 철저하게 유기적입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실험하고 부딪혀본 끝에 비로소 하나의 형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죠.


명상, 특히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이 당신의 조형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당신의 사유를 어떻게 바꿨나요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형식’보다 ‘존재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본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을 만들어왔습니다. 그 궁극적 결론이 비어 있음, 즉 ‘수냐타(S´hu–nyata–)’일 수 있지요. 그러나 수냐타는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아나파나(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와 ‘위빠사나(감각에 대한 알아차림)’는 제 삶과 조각가로서의 진화에 있어 핵심적인 수행입니다. 이런 명상을 통해 저는 인간의 가능성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감각은 매우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일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기호를 통한 감각의 보편성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나요

제 작업이 바로 개인과 보편의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이분법을 허물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제 몸을 작업 도구로 삼았지요. 제 몸은 ‘내부에서 작용할 수 있는’ 물질 세계의 유일한 부분이며, 동시에 인간의 공통된 조건을 담고 있는 몸이기도 합니다. 불교 철학이 잘 지적하듯 우리는 유사한 감각을 공유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다양한 속성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감각이 고유하더라도, 예를 들어 우리가 ‘빨간색’을 다르게 느낄 수 있어도 그것이 빨간색이라는 데엔 합의할 수 있습니다. ‘몸’은 존재 탐구의 출발점으로서 색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기반이에요.


안토니 곰리.

안토니 곰리.

당신의 작업은 관람자가 자신의 몸을 낯설게 인지하도록 감각의 경계를 흔들어왔어요. 관람자의 사유가 시각 이전 혹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유를 유도하는 감각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나요

조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물의 세계 속에 사물을 놓고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관람자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감정과 생각,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를 바라는 거죠. 저는 관람자와 작업이 직접 만나고, 몸으로 느끼고, 그 공간 속에서 경험하는 순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어는 그 이후에 올 수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너무 복잡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해석망 속에 갇혀 살고 있어요. 저는 그런 사이버 세계와 가상성의 확장에 저항하며, 몸의 직접적 경험으로 우리를 다시 이끌고 싶습니다. 관람자에게는 휴대폰을 끄거나 집에 두고 와서 자신 안에서 오롯이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길 권합니다. 예술, 특히 조각은 우리가 효과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존재 그 자체로 되돌아갈 수 있는 열린 경험의 공간이니까요.


 ‘Steady Ⅳ’(2018)  ‘Moon Ⅲ’(2017) ‘Run I’(2021).

현대 기술은 현실과 가상을 뒤섞고, 감각마저 시뮬레이션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조각이라는 매체는 오히려 느림과 물질성, 공간의 실재성을 회복시키려는 방식으로 작동하죠. 당신에게 조각은 어떤 의미의 실천인가요

조각은 인간의 가장 원형적인 예술 형식입니다. 인류의 과거 속에서 조각은 늘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능을 해왔죠. 조각은 시간을 다시 설정하고, 때로는 그 흐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올두바이 협곡의 석기, 호렌슈타인 슈타델의 사자 인간 혹은 홀레 펠스의 비너스 같은 조각을 보면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깊이 지구와 연결돼 있었는지를 물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는 점점 더 몸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물질적 존재들이 더욱 귀중해지고 있어요.


 ‘Field’(1984).

‘Field’(1984).

신안군 비금도에 설치 예정인 작품에도 뜨거운 기대가 쏟아집니다. 관람자가 걸어 들어와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동선과 경험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밝힌 적 있죠. 이 섬의 풍경이나 자연 환경이 작품 구상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비금도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오랜 시간 그 땅의 독특한 생태계와 맺어온 인간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에요. 조수간만의 차를 따라 살아가는 주민들과 해양 생명체 사이의 조화로운 삶의 방식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 섬의 고립성 그리고 분산된 형태는 한국 본토와는 또 다른 정서를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비금도는 산업화의 흔적도 지니고 있죠. 자연과 산업, 고요와 변화라는 양가적 면모를 함께 품어내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 ‘엘리멘탈(Elemental)’의 핵심이었습니다. 섬의 서쪽엔 항구가, 동쪽엔 대형 풍력발전기가 있어요. 저는 그 사이에 남아 있는 자연적인 숲과 평탄한 해변을 활용해 인간과 비인간의 삶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나의 조각이지만, 사실 저는 그것을 ‘경험을 위한 틀’로 생각해요. 진짜 조각은 제가 설치한 340톤의 강철 덩어리가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고, 거닐고, 바라보며 느끼는 각자의 경험 그 자체예요.


과거 실제 본인의 몸을 통해 조각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개인을 넘어 모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몸과 시간, 공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을 탐색하는 행위였죠. 안토니 곰리의 삶과 작품은 무엇에 맞서왔나요? 혹은 예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 것은 무엇일지

저는 평생 이데올로기와 신념에 맞서 싸워왔고, 그런 과정에서 불교를 접하며 ‘직접적 경험’에 다가가는 도구를 만났습니다. 오래전 베네딕트 수도원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고전 교육을 받으며 문학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방식에 익숙해졌죠. 그런데 인도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배움을 접하면서 그동안 제 삶을 지배해 온 가치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어요. ‘자유’라는 말은 정말 큰 의미를 담고 있잖아요. 사이버 시대에 접어든 지금, 어쩌면 그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우리는 점점 더 ‘지능형 도구’에 기대고, 또 그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저는 예술만큼은 여전히 열린 공간이자 진정한 해방의 장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몰입형 설치’와는 다르게 예술은 우리와 환경(Umwelt)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금도에설치할 작품의 제목을 ‘엘리멘탈’이라고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Orbit Field Ⅱ’(2024)의 스케치.

‘Orbit Field Ⅱ’(2024)의 스케치.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줄곧 던져온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당신 안에서 어떻게 진화했나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남아 있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은 제 예술적 탐구에서 오랫동안 중심에 있었고, 인간 존재를 향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해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제 안에서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어요. 이런 질문은 보통 청소년기에 진지하게 시작되죠.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점이기도 해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세속적 기회나 외부 기준이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착각하게 돼요. 굉장히 위험한 믿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기 위해’ 태어난 존재예요. 자기 형성은 단순히 한 시기의 과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수행해야 하는 과업입니다. 예술은 이 여정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안토니 곰리의 조각은 아직 이 세계에 도래하지 않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 있습니다. 당신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감상 중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느꼈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예술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 것이죠.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 변화하고 있는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이니까요. 저는 무엇보다 지금처럼 제 작업이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인간을 상상하고 제안하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보는 이들에게서 큰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예술은 삶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진실하고 강력한 방식이라고 믿어요.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