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 소녀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목소리를 내는 소녀들에게 더 큰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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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핫’하다는 팀들의 제작 비화와 각종 논란이 말 그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모두가 소녀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스타일과 창법, 움직임, 사진, 영상이 누구 것이었는지를 두고 각축전이 벌어졌다. 각계 관계자는 물론 업무와 무관한 네티즌까지 소녀들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누가 진짜인지, 누가 비난받아 마땅한지 공론하기 시작한 터였다. 2024년의 아이돌 산업이 각계 전문가 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모든 협업자가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프로젝트 정체성이자 명백한 당사자인 소녀들에게 발언권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리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무엇보다 팬분들이 걱정된다’는 몇 마디의 말뿐이었다. 이는 결국 상세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메시지 외에 아무것도 발신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응원을 받든, 비난을 받든 간에 지금껏 소녀들이 해온 일이 매우 중대한데도 그간의 성과는 쉽게 지워지고 소녀들이 누구의 작품인지에 이목이 집중됐다. 대중은 소녀들의 얼굴을 보며 또다른 얼굴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대중이 시각 매체를 통해 소녀들을 만나는 상황이지만, 소녀들의 얼굴은 그들의 재능이나 인격보다 다른 사건을 대표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지점이 끝없이 아프다. K팝 산업이 커지고 세대에 번호를 매겨가며 계보를 그릴 정도로 서사를 쌓은 지금, 산업이 소녀들을 소비하고 평가하는 방식은 완전히 모순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점. 라이브 토크 콘텐츠, 유료 문자 소통 앱, SNS, 출근길과 퇴근길, 1:1 팬 사인회, 멤버 혹은 팬과의 관계성…. 산업은 소녀들의 전인격을 두루두루 판매하지만, 동시에 매우 적극적으로 인격체로서의 소녀를 지운다. 컨셉트와 섭외, 곡 선정, 스타일링, 안무 등에서 당사자인 소녀들의 결정권은 점점 흐려지고, 대중도 산업 규모를 감안해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1세대와 2세대 아이돌의 경우 소속사의 철저한 기획으로 내놓았더라도 멤버들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것처럼 대중을 설득하려는 컨셉트를 잡았지만, 최근 K팝 산업은 몇몇 그룹을 제외하고는 노골적으로 멤버들의 크레딧을 지운다. 소녀들과 함께 일하는 어른들이 어느 부분이 내 작품인지를 여러 경로로 인증하는 동안 소녀들은 타인이 한 기획의 훌륭한 수행자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누군가는 여기서 오는 구조적 부당함에 대해 성공한 소녀들이 받을 보상을 언급하지만, 인격권은 보상과 맞교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더 큰 보상을 가져가면서도 원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과도한 사적 자유를 누리는 아티스트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런 아티스트 대부분은 여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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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는 금메달을 획득하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성과를 내지 않으면 어떤 부조리를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겨우 작은 발언권이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선수가 안세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안세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선수일수록 더 목소리를 내야 할 환경에 놓여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세영이 아닌 대다수의 우리는 안세영을 응원하는 만큼 커다란 벽과 마주한다.
그래서 나는 소녀들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기다린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지보다 중요한 승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승리의 말 혹은 승복의 말, 연대, 응원, 주장, 자랑과 사과의 말, 어떤 것이든 여성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 그 자체를 응원하기로 마음먹었다. K팝의 아이콘도, 안산도, 안세영도 아닌 평범한 나에게 가장 절실한 승리의 전리품 또한 거기에서 시작될 것이므로. 그러니 당신도 혼란한 가십 사이에서 함께 그 싸움에 동참해 준다면 더없이 든든하겠다.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곽민지
- 아트 디자이너 구판서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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