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어느 도예가의 작업실

도예가 배주현이 경계를 넘나들며 쌓고, 버리고, 빚어온 것.

프로필 by 윤정훈 2024.11.13
도예 작가 배주현의 원서동 작업실. 애정을 담아 수집하고 만든 것들이 펼쳐진 이곳은 긴 시간 동안 가꿔온 갤러리 같다.

도예 작가 배주현의 원서동 작업실. 애정을 담아 수집하고 만든 것들이 펼쳐진 이곳은 긴 시간 동안 가꿔온 갤러리 같다.

서울 원서동 지하에 있는 배주현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다종다양한 기물이 가득한 그곳엔 경계가 없다. 벽이나 파티션 등 공간을 구분하는 요소는 명확하지 않고, 그녀가 부지런히 만들어낸 도자 작품, 이를 하나하나 엮어 완성한 조형물, 긴 시간 틈틈이 수집(또는 수거)해 온 고가구와 골동품 등이 눈 닿는 곳곳, 발 닿는 곳곳에 놓여 있다.

‘원시정원(From Lascaux)’ 옻과 순금으로 그림을 수놓은 도자는 고대 벽화를 연상케 한다.

‘원시정원(From Lascaux)’ 옻과 순금으로 그림을 수놓은 도자는 고대 벽화를 연상케 한다.

산화 철 프레임에 무명사와 도자를 더해 완성한 ‘무위(無爲) 시리즈 1’. 복잡하게 얽힌 가느다란 실에 의지해 서로를 의지하듯 부유하는 다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산화 철 프레임에 무명사와 도자를 더해 완성한 ‘무위(無爲) 시리즈 1’. 복잡하게 얽힌 가느다란 실에 의지해 서로를 의지하듯 부유하는 다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채로운 풍경 속에서 나름의 질서와 의도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공간에 작품을 배치하고 연출하는 걸 좋아해요. 제 작업의 지향점 중 하나이기도 하죠.” 배주현에게 작업실은 단지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흙과 도자를 새롭게 만나는 방식을 탐구하는 곳이다. 가느다란 무명실에 매달린 다구(茶具)는 조명이 되고, 실로 그린 회화를 연상케 하는 설치미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철제 프레임에 백색 식기가 꽂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샹들리에는 ‘그릇을 꼭 장에만 넣어야 할까?’라는 유쾌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도자를 활용하는 방식처럼 배주현의 작업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에게 작업이란 일정한 형상을 반복적으로 빚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업은 쌓아가는 일과 버리는 일의 총합이에요. 아무것도 없을 때 발견한 미미하고 시시한 것에서 출발해 축적되고 복잡해지다가 어느 순간 선회해 버리기 시작할 때, 버리고 버리다 비로소 드러나는 형상을 사랑해요.” 유약 대신 나무를 태운 재를 발라 거친 표면이나 찢긴 듯 울퉁불퉁한 가장자리, 쓰임을 특정하기 어려운 형태. 옻이나 금, 레진 등 흙 이외의 물성을 혼합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고대 유적지에서 토출된 것 같은 원시적인 분위기부터 낯선 행성의 표면을 닮은 것까지 다양하다. 정형성, 실용성과 거리가 먼 배주현의 작품은 작가가 밟아온 삶의 궤적처럼 변화무쌍하고 잠재적이다. 현재 그의 작업실은 태토(胎土)로 가득하지만 20대까지만 해도 흙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님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나 인천시립합창단 소속 성악가로 국내외 무대에 섰다.

“겉으로 볼 땐 그때가 전성기였죠. 음악적 성취도 있었고, 병행하던 가방 디자인 사업도 순항했어요.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었어요. 무대에 서는 일은 화려하지만 공허했어요. 음악을 사랑했지만 늘 부족했고요. 다른 의미의 창작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렇게 서른 후반 동양화 공부를 시작해 독학으로 도예를 터득한 지금의 그는 무대 위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무대에 있다. “과거엔 한정된 시공간인 무대에서 제가 직접 관객과 교류했다면, 지금은 제 에너지가 축적된 작업물이 저 대신 무대에 올라가는 셈이에요.”

각목을 엮듯 조합해 직접 만든 선반부터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된 골동품, 저마다 다른 존재감을 뽐내는 도자 작품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고민의 결과물이 집약된 작업실의 다채로운 면면.

각목을 엮듯 조합해 직접 만든 선반부터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된 골동품, 저마다 다른 존재감을 뽐내는 도자 작품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고민의 결과물이 집약된 작업실의 다채로운 면면.

성악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도예로. 결핍에서 시작된 여정에 정착지는 없고 경계를 넘나드는 일만 남았다. 이제 결핍은 어디에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최근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며 굳게 닫혀 있던 작업실 문을 열 계획도 세웠다. 가마에 굽지 않고 오직 손으로만 흙을 뭉쳐 작은 행성을 만드는 ‘구(球)’ 작업을 워크숍으로 진행하기로 한 것. 배주현은 그렇게 이곳에서 또 다른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사진 이주연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