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본격 장르 파괴자, 엘리자베스 딜러

세계적인 건축설계사무소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를 이끄는 엘리자베스 딜러의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공간.

프로필 by 윤정훈 2024.07.17
엘리자베스 딜러

엘리자베스 딜러

세계적인 건축설계사무소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 + Renfro)의 공동 설립자인 엘리자베스 딜러(Elzabeth Diller). 올해로 69세가 된 딜러는 1981년 스승이자 남편인 리카도 스코피디오(Ricardo Scofidio)와 사무소를 설립해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건축에 매진했다. 그들은 뉴욕에 근거지를 두고 미국 전역에 공공 건축물을 선보여 왔다. 버려진 고가 철도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하이라인(The High Line)’부터 뉴욕 링컨 센터(Lincoln Center) 리모델링, LA 랜드마크가 된 뮤지엄 ‘더 브로드(The Broad)’, 허드슨 야드의 복합문화공간 ‘더 셰드(The Shed)’까지. 이렇듯 도시 곳곳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온 딜러에 관한 의외의 사실은 건축설계사무소 설립 후 약 15년 동안 실제로 지은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뉴욕 도심의 고가 철도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하이라인’ 프로젝트.

뉴욕 도심의 고가 철도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하이라인’ 프로젝트.

초창기 딜러의 포트폴리오를 채운 것은 대개 페이퍼 워크와 설치미술, 파빌리온 등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전부터 딜러는 예술과 건축의 경계에 있었다. 건축가이기 전에 예술가였으며, 건축가로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예술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딜러는 뉴욕 쿠퍼 유니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20대 딜러의 주된 관심사는 영화와 미디어 설치였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건축 수업을 계기로 그의 시선은 미술을 넘어 건축을 향해 뻗어나갔다. “원래 꿈은 영화를 만드는 거였다. 그러다 ‘아키텍토닉스(Architectonics)’라는 수업을 발견했고, 마냥 재밌어 보여 신청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어떤 점이 딜러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아이디어가 아이디어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 공간과 시간을 직접 다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2 스위스 엑스포에서 선보인 파빌리온 ‘블러(Blur)’. 벽 대신 인공 안개를 형성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건축물을 선보였다.

2002 스위스 엑스포에서 선보인 파빌리온 ‘블러(Blur)’. 벽 대신 인공 안개를 형성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건축물을 선보였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는 현대미술관 ‘더 브로드(The Broad)’ 내부. 벌집 모양의 베일 구조를 통해 외부의 은은한 빛이 실내로 흘러든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는 현대미술관 ‘더 브로드(The Broad)’ 내부. 벌집 모양의 베일 구조를 통해 외부의 은은한 빛이 실내로 흘러든다.


“건축을 배우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이디어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공상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꿔야 했고, 이를 위해 가설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건축학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건축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공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조각과 미디어를 다루고 싶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딜러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바로 2002년 스위스 엑스포에서 선보인 ‘블러 빌딩(Blur Building)’이 그것이다. 뇌샤텔(Neucha^tel) 호수 위에 금속 바닥판과 3만5천여 개의 고압 노즐로 이뤄진 구조물을 설치했는데, 호수의 물을 끌어들여 여과한 다음 미세한 물방울을 분사시켜 거대한 인공 안개를 만들었다. 여기에 온습도, 풍속과 방향에 따라 수압을 조절하는 스마트 기상 시스템을 더해 주변 환경에 시시각각 대응하고 변화하는 공간을 탄생시켰다. 도시 환경과 공간에 대한 딜러의 실험은 지속됐다. 2019년 오픈한 ‘더 셰드’는 건물을 감싸는 U자 모양의 셸을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 앞엔 광장이 있는데, 거대한 셸을 밀면 광장 위로 천장이 형성되면서 커다란 무대가 만들어진다. 건축이 아닌 것으로 자신만의 건축을 실현하는 딜러는 현대 도시에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공공공간, 특히 규정되지 않은 ‘자유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허드슨 야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더 셰드(The Shed)’.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U자형 셸로 가변적인 공간을 설계했다.

허드슨 야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더 셰드(The Shed)’.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U자형 셸로 가변적인 공간을 설계했다.

198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기생충과 관람 경험을 연계한 설치미술 작품 ‘패러사이트(Para-site)’를 전시했다.

198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기생충과 관람 경험을 연계한 설치미술 작품 ‘패러사이트(Para-site)’를 전시했다.

“공공과 민간 사이에 새로운 종류의 방정식을 찾아야 하며, 모든 공간에 라벨을 붙일 필요는 없다. 모두가 일정한 제곱미터 내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만 신경 쓰고 있다.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와 용도의 공간, 즉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공간’은 정량화할 수 없기에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필요한 존재다.” 딜러는 뉴욕의 랜드마크가 된 하이라인에서 흥미로운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비드 랭(David Lang)이 작곡한 음악에 따라 1000명의 공연자가 노래를 부르는 ‘마일-롱 오페라(The Mile-Long Opera)’를 기획한 것. “10년 넘게 하이라인 설계 작업을 하면서 주변 지역의 급속한 변화를 지켜봤다. 기회와 모순으로 가득한 도시의 쇠퇴와 재탄생, 삶의 순환을 생각하게 됐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관객과 공연자들이 만들어내는 오페라를 통해 도시는 다양성을 찬미하는 배경으로 변모할 것이다.” 극적이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건축. 어쩌면 딜러는 이미 도시를 배경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