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그린스페셜] 제주 포구, 그 완전히 사라진 풍경에 대해

사진가 서재철이 담은 1960-1980년대의 제주포구 72개 중 지금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단 하나도.

프로필 by 이마루 2024.04.09
제주도 옆 우도에도 포구가 존재했다. 육지에서 작은 배 한 척에 한 명만 들어왔다 해서 '독진개'라고 불렸던 현 우도 하고수동 포구.

제주도 옆 우도에도 포구가 존재했다. 육지에서 작은 배 한 척에 한 명만 들어왔다 해서 '독진개'라고 불렸던 현 우도 하고수동 포구.

“바다는…. 바다를 보면 누구나 ‘아!’ 하고 탄성을 지르잖아요. 수없이 생각합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바다가 없는 나라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답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바다 없이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를 기록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에 국무총리상까지 수상한 70대 사진가에게 “(당신에게) 바다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심 너무 구태의연하고 뻔한 질문을 했나, 쑥스러웠다. 하지만 천천히 “바다는…”이라고 운을 떼며 “바다를 보면 누구나 ‘아!’ 하고 탄성을 지르잖아요”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밝은 빛, 사람의 본성과 같은 일차원적 감상을 언급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바다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포 포구 중심지에 있는 소나무 사이, 그 옛날 불을 밝혔던 등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포 포구 중심지에 있는 소나무 사이, 그 옛날 불을 밝혔던 등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재철은 1947년 제주 위미포구에서 태어났다.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 선배들과 오른 5월 중순의 한라산에는 안개비가 내렸다. “산록이 우거진 숲속에 제주참꽃(연산홍)이 피었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그때 같이 올랐던 선배 중 한 명이 구닥다리 카메라를 갖고 있었는데, 제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니까 몇 장 찍어보라더라고요. 그런데 필름 현상을 맡긴 사진관 주인이 제 사진을 콕 집어 ‘잘 찍었다’며, 다른 사진보다 크게 현상해 줬어요. 돌아보면 그 칭찬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 여객선의 기항지이기도 했던 앞개(위미 1리 포구)는 수심이 깊어 천연 항구 조건을 갖췄다. 그곳을 거니는 아이들.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 여객선의 기항지이기도 했던 앞개(위미 1리 포구)는 수심이 깊어 천연 항구 조건을 갖췄다. 그곳을 거니는 아이들.

완전한 수동카메라의 시대, 필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다 보니 피사체를 발견해도 한두 컷밖에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이런 물질적인 제약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것은 그의 사진전을 본 신문사에서 기자직을 제안하며 1972년 특채로 사진기자 발령을 받은 이후다. “사진의 원래 목적은 기록이잖아요. 지금도 아쉬운 게 원래는 무명옷을 입었던 해녀들이 물속이 추우니까 잠시 팬티스타킹을 그 위에 덧입었던 시기가 있어요. 미관적으로 보기 좋지 않다며 찍지 않았는데 그 다음에 바로 지금의 고무 옷을 입게 됐죠. 그 잠깐의 시기를 왜 안 찍어뒀을까! 바퀴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필요하듯 사진은 멋진 풍경 하나만 있으면 안 돼요. 어느 하나도 놓치면 안 됩니다. 그게 지역 기자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야생화와 조랑말, 노루, 곤충, 새, 버섯…. 제주의 생태를 성실히 포착하며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의 카메라는 어쩌다 포구를 집요하게 담게 됐을까? “제주 사람에게 포구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에요. 으레 들르는 곳이죠. 어린 시절에는 놀이터였고요. 취재를 위해 한라산 오름을 드나들던 때부터 포구에 들르면 습관적으로 한두 컷 찍곤 했는데 70년대 초반일 거예요. 평소처럼 한 포구에 들렀는데 포구를 현대식으로 만든다고 돌을 쌓아둔 위에 그대로 시멘트를 바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작업 속도가 또 엄청나게 빨라요. 그때 알았습니다. 아, 이거 완전히 변하겠구나.”




안캐와 밧캐로 나눠진 조물캐(용운 포구). 밧캐에는 넓은 백사장이 비스듬히 펼쳐진다. 안캐 쪽으로 흐르는 용천수는 한때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안캐와 밧캐로 나눠진 조물캐(용운 포구). 밧캐에는 넓은 백사장이 비스듬히 펼쳐진다. 안캐 쪽으로 흐르는 용천수는 한때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배가 드는 어귀를 일컫는 ‘포구’의 우리말은 ‘개’. ‘갯마을’ ‘갯벌’같이 익숙한 단어도 여기서 파생했다. 제주 자연의 특성상 포구는 우리가 ‘포구’ 하면 흔히 떠올리는 만 위에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과는 다르다. 파도와 태풍 등 유난히 거친 날씨로부터 배를 지키기 위해 자연지형물 여(작은 바위)와 코지(곶)가 형성된 작은 틈에 자리한 제주 포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세 가지 칸 모양으로 생겼다는 점. 배를 수리해야 하거나 태풍 때는 맨 안쪽인 안캐에, 물 때를 맞춰 나갈 때는 중캐에, 수시로 바다에 드나들 때는 맨 바깥쪽인 밧캐에 배를 대곤 했다. 배를 타고 ‘개’를 파고드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을 이기려 들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바다와 함께 살겠다는 제주인들의 해양 개척 정신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애초에 마을이 있어 그곳에 포구를 만든 게 아닙니다. 해안 자체가 사람이 사는 데 적합하지 않아요. 디딜 만한 언덕이 있든가, 사람들이 마실 용천수가 나오든가, 신앙을 모시고 살 만한 터가 있는가…. 이 모든 걸 고려해서 개척한 거죠.” 옛 제주 포구를 담은 유일한 기록물이 된 서재철의 사진집 <제주포구>가 ‘바다의 길목에서 섬을 지키다’라는 부제를 단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포구는 삶의 터전인 바다밭과 소금밭이 있고, 표류와 유배가 시작되는 곳’이므로. 제주 사람들이 산 곳이 민포라면, 관리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관포는 공납물과 선물이 드나들고 전선과 병력이 배치되기도 하며, 뭍과 제주를 이었다. 서재철이 ‘제주 선인들이 남긴 가장 뛰어난 제주의 유산이 포구’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나 기록을 결심한 이후에도 포구를 찾아다니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라 교통편이 여의치 않았고, 그러다 보니 결국 찾지 못한 곳도 있다. 주변에 높은 건물도 없던 시절이기에 전신주 혹은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광각 렌즈 없이 표준 렌즈로 촬영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는 흑백으로 사진이 남은 걸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재철은 1968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10년 넘는 시간에 걸쳐 72곳의 제주 포구를 기어코 기록했다. 포구는 해안도로가 개발되고, 어선의 크기가 커지며 배가 드나들 수 없게 되자 주민들이 직접 매립하기도 하며 예상대로 본모습을 잃어갔다. 원래는 파도로부터 배들을 지켜주던 작은 바위 ‘여’들은 방해물 취급을 받으며 UDT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폭파되기도 했다. 세 칸 형태의 포구는 죄다 매립되거나 사라졌지만 망장포에는 아직도 일부가 남아 있다.


 성천포(중문 포구)에 자리한 개당. 마을이 호텔로 변하며 개당을 찾던 주민들 발길은 끊겼지만 여전히 개당은 남아 있다.

성천포(중문 포구)에 자리한 개당. 마을이 호텔로 변하며 개당을 찾던 주민들 발길은 끊겼지만 여전히 개당은 남아 있다.

“2001년부터 우리나라 섬을 찾아다니며 섬 기행을 하고 있어요. 전라남도 신안을 갔는데 그곳에는 물이 솟거나 신앙 터가 있는 게 아닌데도 포구를 지방기념물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더라고요. 제주도 문화재위원 재임 당시 전부는 어렵더라도 우리도 중요한 10~20개라도 지방기념물로 지정해서 보존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고, 호응을 얻었지만 결국 진행되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가장 제주적인 것을 가장 손쉽게 버린 것이 제주입니다. 육지는 ‘하잡은(하찮은)’ 것도 보전되는데 우리는 어느 하나 보존하지 못한 거예요. 제주 포구 복원사업을 펼치자는데, 있는 걸 다시 정비하는 게 복원이지 다 없어졌는데 어떻게 복원합니까? 기껏해야 ‘재현’이겠죠.”




지금은 호텔로 변한 성천포의 전경. 풍부한 용수천량을 자랑했던 이곳은 안캐와 밧캐로 축조돼 있다. 촘촘히 줄을 묶은 제주 전통의 초가지붕 형태도 눈에 띤다.

지금은 호텔로 변한 성천포의 전경. 풍부한 용수천량을 자랑했던 이곳은 안캐와 밧캐로 축조돼 있다. 촘촘히 줄을 묶은 제주 전통의 초가지붕 형태도 눈에 띤다.

수많은 변화를 목도해 온 그에게도 지금 제주 바다의 변화는 가파르게 다가온다. 어느 바다에 가도 게나 작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해초류가 넘쳐나던 시절을 추억하는 게 아니다. 초지를 개간해서 만든 밭에서 사용하는 농약이 여과될 틈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양식장이 늘어나면서 바다의 백화현상이 심해졌다. “해초류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전복과 소라가 점점 잡히지 않죠. 다른 섬사람들도 이 넓은 갯벌에서 낙지가 안 나온다, 큰일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인이 대부분이다 보니 다들 이유와 원인을 적극적으로 찾으려 하지 않아요. 해안가 쓰레기를 줍는 것도 좋지만 바다를, 정말 바다 자체를 먼저 살려야 하는데….”
포구뿐 아니라 제주를 제주답게 만들었던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 그의 마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상실감과 분노가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제주는 화산지대이기 때문에 용암이 흘러내리며 만든 자연경관이 많아요. 계곡 주변에는 원시 식생이 자라요. 제주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많은 이가 남겨뒀습니다. 그러나 용암이 흐르며 생겨난 형상이 마모된 형태들, 그 독특함을 알아보고 찍어둬야 하는데, 아직 그 작업을 못하고 있어요.” 바퀴가 제대로 돌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도 찍어야 한다는 것. 제주를 둘러싼 ‘오션 뷰’나 ‘청정’이라는 피상적 단어 뒤에 감춰진 진짜 아름답고 중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가진 제주 토박이 서재철은 올해로 77세, 여전히 셔터를 누른다.

서재철
1947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30년간 제주신문, 제민일보에 언론인으로 재직하며 기록과 가까운 삶을 살았고, 제주의 모든 풍경을 아우르는 그의 사진은 제주 생태 시리즈와 <바람의 고향 오름> <제주해녀 어제와 오늘> 등 수많은 책으로 나왔다. 지금은 사라진 포구들을 기록한 사진집 <제주포구>(한그루)는 2008년에 펴냈던 <기억 속의 제주포구>를 다시 엮어 2023년에 재발간한 것이다. 폐교한 제주 표선면 가시리의 한 초등학교를 ‘포토갤러리 자연사랑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개관했다. 지금도 제주의 계곡을 기록하기 위해 한라산에 오른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