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귄 지 5년 만에 처음 그와 함께 자기로 결심한 날, 마음이 앞선 그는 오직 힘으로만 내 안에 들어오려고 했다. 이러다간 다음 날 호텔 방을 네 발로 기어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난 그때 전신 마비가 온 척 연기했다. 옷을 벗은 채로 대(大)자로 누워 꼼짝하지 않았고 입이 돌아간 사람처럼 어눌한 발음으로 “그만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메소드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그는 이성을 찾았고 마비된(?) 내 몸을 마사지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31세, 여, 약사)
나는 섹스 불감증이다. 친구들의 경험담처럼 황홀해서 눈물이 난다거나 어느 순간 종소리가 들린 적도 없다. 23세 때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눈만 끔벅이며 누워 있는 내게 “좋은지 싫은지 표현 좀 해 봐”라며 잠자리에서도 연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그 후로 남자들과 잘 땐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더라도 겉으론 ‘야동’에 나오는 여자 배우처럼 몸을 비비 꼬는 열연을 펼친다. (29세, 여, 은행원)
남녀가 함께 자는 데 연기는 필수이자 매너 아닌가. 아무리 자신이 꿈꾸던 섹스가 아니라도 상대 앞에서 실망한 표정을 드러낸다면 상처가 될 테니까. 실제로 입대 전에 사귄 전 여자친구는 나와 만난 2년 동안 오르가슴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지만(그녀의 친구에게 들었다) 매번 눈꺼풀을 뒤집어가면서 분위기에 흠뻑 빠진 듯한 내면 연기를 보여줬다. (28세, 남, 온라인 마케터)
하얀 피부에 아기처럼 귀여웠던 첫사랑과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다가 분위기가 야릇하게 흘렀고 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런데 달콤한 솜사탕 향이 날 것 같던 그녀에게서 정체 모를 냄새가 났다. 깜짝 놀랐지만 난 정신을 가다듬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듯 “냄새가 너무 좋아” “오늘은 네 허벅지를 베고 잘래”라고 자주 말해줬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말이다. 사랑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게 있더라. (34세, 남, 경찰)
오래 전 한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일이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20대 초반 알바생끼리 술자리를 자주 가졌는데 어쩌다 보니 평소 호감을 느꼈던 여자아이와 단둘이 밤을 보내게 됐다. 당시 4개월간의 짧은 연애 경험이 전부였던 난 능숙한 척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긴장돼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겨우 제멋대로인 다리를 진정시키고 나니 이번엔 ‘이놈’이 작동을 안 하는 거다. 끝내 ‘그놈’은 말을 듣지 않았고 ‘지켜주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녀를 안아주며 착한 오빠 코스프레를 하다 잠들었다. (29세, 남, 수학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