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긴데,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이 현상에 대한 반응은 세대별로 첨예하게 나뉜다. 기성세대는 ‘기본 상식도 없는 요즘 애들 문제’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니 벌어지는 일’이라며 혀를 차고 주류 언론과 언어 전문가들은 ‘심각한 기초 교육의 붕괴’ ‘젊은 세대의 의지력 문제’라는 뻔한 소리만 되뇐다. 젊은 세대는 ‘금일’ 대신 ‘오늘’을 쓰고, ‘중식’ 대신 ‘점심 식사’를 쓰면 되지 굳이 지나치게 한자어나 관용어 등 기득권에 익숙한 단어로 오해를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고, 이는 일종의 권위 의식일 뿐이라고 응수한다. ‘나흘’ 하나 모른다고 세대 전체가 문해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의견도 있다. 윗세대는 자기 말만 하며 개탄하고, 스마트폰 없이 못 사는 ‘포노사피엔스’들은 빛바랜 신문에 나올 법한 표현으로 독해자를 배려하지 않음을 ‘꼰대질’이라 저격하는 상황인 셈이다. 더 나아가 요즘 SNS와 댓글 창에는 같은 주제에 전혀 다른 핀트로 서로를 ‘난독’ 이라 공격하고, 단어와 문장마다 트집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문해력의 의미조차 서로 달리 받아들이는 세대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 이는 앞으로 펼쳐질 더 큰 갈등과 단절의 전조로 읽힌다.
전문가들은 이 갈등의 기저에 타인에 대한 불신과 배타적 적의가 있다고 해석한다. 〈기생충〉 한 줄 평에 쓴 ‘명징’과 ‘직조’라는 어휘로 한때 엘리트주의라 조롱(?)받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특정 단어에 열 올리고,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낯선 단어를 쓰는 사람에게 적개심을 가지거나 자신이 정해둔 언어의 틀을 벗어나면 화를 내는 지금의 태도”는 “상대 의도를 선의로 유추해 줄 마음조차 전혀 없는, 소통에 마음이 닫힌 한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정확한 뜻을 모르더라도 맥락 차원에서 타인의 말을 유추할 의지, 그조차 사라져 버렸다는 것. ‘심심한 사과’ 현상을 두고 충남대 국문과 교수 윤석진이 “심심한 사과가 조롱의 대상이 된 건 심심한 사과를 기계적이거나 정치적 수사로 받아들여 사과의 진정성 자체를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적극적 오독 행위”라고 한 것이나, 창원대 특수교육과 교수 김혜정이 “이 사과문은 Z세대와의 소통을 전제하기보다 의례적 격식을 갖추려 한 것 같다. 하지만 심심한 사과는 옛 커뮤니케이션에서 선호되던 표현이고 Z세대는 그 사과에 대한 불만족으로 적극적인 오독을 한 것”이라는 분석이 과연 과장된 확대 해석일까? 어쩌면 문해력 위기에 가려진 진짜 문제는 불신과 갈등, 공감력의 결여다. 〈언어의 줄다리기〉의 저자 신지영이 ‘언어 표현의 줄다리기는 사실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며 ‘결국 문해력 논란은 언어의 줄다리기, 즉 말을 둘러싼 세대간 주도권 싸움’이라 정의한 것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문해력의 위기로 봐야 할지, 세상의 변화로 봐야 할지! 해결의 실마리는 분열된 채 서로를 공격하는 요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리터러시(Literacy: 문해력)’를 궁리한 책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15년간 읽기와 리터러시를 교육한 조병영 교수는 ‘사흘’ 같은 지엽적인 단어 차원에서 이 현상을 논할 것이 아니라 리터러시를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볼 것을 당부한다. 문해력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염려는 좋지만, 디지털과 독서를 분리하는 무리한 이분법적 접근은 오늘날 디지털 전환 시대의 환경을 애써 외면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또한 그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미디어는 대부분 문해력을 학교 공부로 귀결시키지만, 리터러시의 경험은 글자라는 기호를 읽고 쓰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확한 낱글자 읽기는 복잡다단한 세상 읽기로 전환되는 과정에 기여하는 매우 정밀하고 섬세한 지적 · 정서적 · 사회적 의미 구성 과정과 실천’이며 문해력 경험은 ‘읽고 생각하고 나누면서 공동체 문제를 협력적으로 파악하고, 변화의 의제를 설정하며, 대안적 미래를 토론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인류 문명사의 수많은 변화와 진보가 함께 읽고 생각하는 경험을 통해 실현됐고, 반대로 잘못 읽고 나쁘게 써서 수 많은 시행착오와 시대적 퇴행을 겪기도 했다’는 것. 즉 문해력은 일종의 ‘역사적 도구’이니 문해력 위기의 접근방식을 달리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말이다. “대화하려는 태도가 결핍된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리터러시 경험을 쌓기 어렵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그럴듯한지, 허술한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요. 제대로 읽는 인간은 리터러시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생각의 틀’을 갖춰나가고, 그것이 어떤 모양일지 확인하고 수정하면서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의 읽기를 만들어나갑니다.”
지금 제기되는 문해력 문제는 난관인 동시에 어쩌면 낯선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 문해력 키우기는 단순 어휘력 증진이 아닌 세대와 젠더, 계층 간의 소통과 포용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그 교육의 방향 또한 읽기 능력뿐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태도 및 균형 있는 안목을 기르는 방식이 전제돼야 한다. 교육 매체 〈민들레〉 발행인이자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의 저자 현병호의 말을 빌려 이를 뒷받침해 본다. “나의 알고리즘이 아닌 다른 알고리즘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 이 알고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배움이다. 아날로그 세계든 디지털 세계든 알고리즘 속에 내재된 위험을 인지하고, 타자를 적으로 돌리는 혐오와 배제의 문법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공생의 문법을 체득하는 것이 리터러시의 본래 의미일 것.” 우리는 ‘똑똑함’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조롱하고 일단 우겨보는 태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문해력 위기를 재정의하고, 과도기에 선 서로를 품고 나아가야 할 때다. 문해력은 곧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