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4인조 인디 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프런트맨 미셸 조너(Michelle Zauner)의 정확한 이름은 미셸 정미 조너다. 정미는 엄마의 이름이자 그의 학창시절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은 한때 온몸으로 한국적 정체성을 거부했으며, 밴드를 만들겠다며 집을 나가고, 피어싱과 타투를 ‘쿨’하다고 생각한 고집스러운 외동딸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 2014년,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위트 있는 엄마가 췌장암 4기를 진단받자 곧바로 무거운 슬픔과 상실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런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음악과 가족 그리고 한국 음식이었다. 혼자 김치를 담그고, 서울에 사는 큰이모와 엄마에 대한 추억을 나누며 미셸은 조금씩 빛을 되찾아갔다. 치유 과정 끝에 탄생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두 번째 정규 앨범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2017)은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닿았다. 출간 직후 〈뉴욕 타임스〉, 〈타임〉, 아마존이 앞다투어 ‘올해의 책’으로 소개한 미셸 조너의 첫 책 〈H마트에서 울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좋은 소식은 계속됐다. 세 번째 정규 앨범 〈Jubilee〉가 빌보드가 선정한 2021 상반기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히고, 2022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와 ‘베스트 얼터너티브 뮤직 앨범’ 두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며, 꿈만 같은 미국 〈SNL〉 무대에 호스트로 나섰다. 새소년의 멤버 황소윤과 함께 부른 ‘Be sweet’의 한국어 버전을 들고 3년 만에 한국을 찾은 미셸 조너에게 엄마라면 요즘 당신을 보며 어떤 말을 제일 많이 했을지 묻자 그가 한국식 토스트를 베어 물며 답했다. “더 겸손하라고 했을 거예요. 속으로는 엄청 자랑스러워 했겠지만요. 엄마는 항상 잔소리 거리를 찾아내곤 했거든요. 그리곤 이렇게 덧붙이겠죠. ‘그런데 미셸, 내 샤넬 백은?’”
재킷과 네이비 니트 톱, 레이어드한 화이트 오간자 톱, 치노 스커트, 브리프, 레더 벨트, 삭스, 슈즈는 모두 Miu Miu.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2022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기분은 어땠나? 새소년, 잔나비, 비비 등 여러 아티스트와 함께 무대에 섰다
멋진 출연진이 많아 쉽게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웃음). 나와 우리 밴드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이 왔는데 막판에는 모두 점프하고, ‘떼창’도 해주고…. 다들 정말 열정적이었다.
지난 7월 말 발매된 ‘Be sweet (Korean Version)’를 함께 부른 황소윤과의 합동 무대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Jubilee〉 타이틀곡 ‘Be sweet’는 우리 노래 중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은 곡인 만큼 내한을 기념해 한국어 버전을 발매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연 전날 소윤의 작업실에서 노래방 스타일로 리허설해 본 것이 전부인데 다행히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 같다. 또 다른 스타일의 프런트맨을 경험할 수 있어 우리 멤버들도 정말 즐거워했다. 옆에서 본 소윤의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더라.
곡의 한국어 번역은 프로듀서 예지(Yaeji)가 도왔다고
소윤, 예지와는 전부터 서로 공연도 보러 가며 친분을 쌓아 오다가 이번 작업도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예지가 선뜻 번역을 맡아주겠다고 해서 어찌나 좋았는지! 평소 예지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좋아했기에 믿고 맡겼다. ‘내게 반성해 봐, 그렇잖아’라는 한국인에겐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코러스도 다들 엉뚱한 매력이 느껴져 좋다고 하더라. 입에 착착 붙는다면서.
오프숄더 드레이프 드레스와 슈즈, 이어링은 모두 Loewe. 타이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The body is a blade’ 무대 도중 눈물을 쏟은 사연을 물어도 될까
커다란 화면에 재생된 뮤직비디오 속 엄마 사진을 보고 감정이 북받쳤다. 특히 나를 울컥하게 만든 가사 ‘당신이 없는데 이곳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What’s this place if you’re not here)?’는 지난 6년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기도 한데 이젠 엄마 없이도 한국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감동했다. 한국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엄마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홍대 공연장과 LP 바에서 새로운 추억도 쌓고 있으니까.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첫 장편소설 〈H마트에서 울다〉가 내년까지 불가리아, 대만, 브라질, 독일 등 총 14개국 언어로 번역될 예정이라고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 당신의 어머니를 알게 돼 가장 멋진 점은
엄마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됐다는 것. 내가 성공할수록 엄마도 덩달아 유명해지는 것 같아 기쁘다.
책의 성공으로 밴드 멤버들이 느끼는 불안은 없는지(웃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좋은 질문이다! 나도 궁금하다. 책을 읽었을 것 같은데 딱히 내색은 않더라. 하지만 멤버들은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나를 믿고 지지해 줄 사람들이다.
앞으로 엄마한테 잘해야겠다거나 읽자마자 엄마한테 전화해서 같이 점심 먹자고 했다는 등 엄마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반응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블랙 후디드 티셔츠와 스키 팬츠, 슈즈는 모두 Dolce & Gabbana. 로브는 Clumppy by Wiggle Wiggle.
10대 시절 당신을 괴롭힌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친척들이 한국어로 내뱉은 말까지 생생하게 기록돼 있어 놀랐다. 정확한 묘사의 비결은
누구에게나 왠지 잘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지 않나. 이상하게 그때 분위기와 생각, 대화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 말이다. 한국 음식에 대한 묘사는 한국에서 2주 정도 머무르며 책의 초고를 썼을 때 큰이모랑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한 결과다.
한국 요리 레서피를 소개하는 망치 여사의 유튜브 영상을 보며 혼자 총각김치와 배추김치를 담그는 장면. 독특한 맛과 향을 더해줄 유산균이 적당히 번식하도록 수 년간 김치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기억을 남기는 과정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글쓰기를 통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직면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사라져가는 기억에 새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엄마와의 좋은 추억을 오랫동안 곱씹게 됐으니까.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한 책’이라는 반응도 많다
내 스타일인 것 같다. 노래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 가장 문학적이라 생각해 이를 그대로 살리는 표현을 추구한다. ‘아빠가 잔디밭에 옥수수 껍질을 던진다’는 표현이라든지 내 노래 ‘Kokomo, in’ 속 ‘오븐을 켜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와(Manifesting like the fear of an oven left on)’ 가사처럼 지극히 평범한 말이 항상 아름답게 와 닿는다.
엄마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졌다. 한동안 엄마한테 못되게 군 나를 자책할 때도 있었는데 책을 쓰면서 오히려 스스로 보듬게 됐다. 문화도, 언어도, 세대도 달라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어렵고 특수한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엄마도, 나도 분투한 것뿐이니까. 한편으로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길을 고집한 내 판단이 역시 맞았다는 확신도 들었다(웃음).
블랙 후디드 티셔츠와 스키 팬츠, 슈즈는 모두 Dolce & Gabbana. 로브는 Clumppy by Wiggle Wiggle.
어릴 땐 아빠를 많이 닮은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엄마 모습이 보인다.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고, 타인과 소통하며 에너지를 얻는 성향은 확실히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다. 동시에 자기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칼국수부터 프라이드치킨, 부침개, 잣죽, 새우깡과 바나나 우유 등 저마다 추억을 머금고 있는 한국 음식은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당신이 느끼는 한국 음식의 가장 강력한 힘은
뭐든 정말 ‘익스트림’하다는 것. 한국 음식 중에 미지근한 음식은 별로 없다.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울 뿐(웃음). 나의 ‘넘버 원’ 소울 푸드인 김치찌개처럼 정말 깊은 풍미를 지닌 것도 많다. 한국인들은 보통 외국인에게 비빔밥이나 갈비처럼 진입 장벽이 낮은 음식을 권하는데 나는 반대다. 진짜 깊은 한국 음식을 맛봐야 한다. 우리 밴드의 드러머 크레이그는 자기가 직접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다(웃음)
책의 영화화도 진행 중이다. 가장 기대되는 점은
우리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꾸준히 연출에 도전할 정도로 영상에 관심이 많다. 영화적으로 구현됐을 때 기대되는 신들이 많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초기 음악들과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의미가 큰 오래된 명곡들, 한국 여름날의 매미 소리 등 사운드에도 공을 들이려 한다.
죽음과 상실, 슬픔에 대한 지난 두 장의 앨범에 이어 축제, 기념일이라는 뜻의 세 번째 정규 앨범 〈Jubilee〉는 어떤 마음으로 작업했나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정말 힘든 시간 속에도 행복과 즐거움이 존재했다는 깨달음이 미친 영향일지도. 공교롭게 팬데믹 시기에 발매됐는데 힘든 와중에도 웃고 즐거워해도 된다고, 그런 게 삶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싹 말라가면서 부드러운 단맛이 더해지는 커버 사진 속의 곶감처럼 달콤 쌉사래한(bittersweet) 사운드로 가득 채운 앨범이다.
프린트 티셔츠와 네크리스, 오른손 약지와 왼손 엄지에 낀 반지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는 Swarovski.
무대를 즐기는 모습이 관객까지 행복하게 만든다. 특히 기타리스트인 남편 피터 브래들리와의 호흡이 멋지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공유하는 친구도 같고, 일에 대한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피터여서 정말 행복하다. 피터는 내가 데이트했던 모든 남자 중에 엄마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있을까
실수도 많고, 인내심도 적은 나에 비해 주변 사람들은 너무나 다정하다. 행운아란 사실을 늘 상기하며 ‘고마워’와 ‘미안해’란 말을 자주 하고, 항상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주려 한다. 하지만 난 그들보다 재미있는 사람이니(웃음) 내가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주고 있는 에너지도 분명 많을 것이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간다. 그런 다음 충만한 사랑을 느끼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광장시장에서 좋아하는 빈대떡도 먹고 큰이모, 큰이모부와 함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저녁을 먹을 예정이다.
그레이 재킷과 셔츠, 타이, 그레이 플리츠스커트, 바이커 쇼츠, 블랙 삭스, 슈즈 모두 Dior.
당신의 활약이 커질수록 밴드명이 ‘Korean Breakfast’가 아님을 아쉬워하는 한국 팬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한국말로) 미안해(웃음). 일본 음식 사진에 매료돼 지금의 밴드명을 지을 때만 해도 내가 그래미 시상식에 가고,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르고, 한국 음식에 대한 책을 쓰게 될 거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욱. 사실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일렉트로닉 듀오 보즈 오브 캐나다(Boards of Canada)도 있는데…. 물론 다른 이름을 골랐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정말이다. 한국 팬들, 믿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