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에선 ‘공동체’ ‘참여’ 등 도큐멘타 15를 지배하는 ‘룸붕’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카셀 도큐멘타의 여정은 승강장 입구 맞은편에 있는 기차역 내 전시장 카침쿠바(Kazimkuba)에서 시작된다. 독일건축가협회가 설립한 카침쿠바에서는 지난해 타계한 미국 태생의 예술가이자 작가인 지미 더럼을 추모하는 전시가 열렸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원주민에 대한 시민운동, 돌과 동물의 두개골과 뼈 같은 오브제로 만든 조각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를 기억하려는 여덟 명의 예술가 그룹은 더럼의 유물뿐 아니라 그가 조명했던 역사와 환경, 식민지 문제, 문화와 사회의 공존, 자연과의 관계 등을 주제로 한 조각과 영상, 강연, 출판물 등을 선보였다.
프리데리치아눔의 기둥에는 시대적 이슈에 대한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댄 페르조브스키의 반전 메시지가 담겼다.
첫 전시의 여운을 곱씹으며 기차역을 나선 뒤 다시 한 번 놀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현대미술 전람회를 주최하는 도시 카셀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황량했다. 카셀 중앙역 앞 광장에는 세계적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하늘을 향해 걷는 남자’가 설치돼 있고, 루마니아 작가 단 페르조브스키(Dan Perjovschi)가 자본주의와 예술, 코로나19와 팬데믹 등에 관해 시니컬함을 드러낸 작품 〈수평 신문〉이 바닥을 장식했지만, 세계적 예술 도시란 타이틀과는 걸맞지 않은 풍경처럼 보였다. 중앙역 앞 두서없는 현대 건축물들은 카셀이 지나온 굴곡진 역사, 특히 카셀 도큐멘타의 시작점을 보여주는 듯했다. 1930년대 나치 집권 당시 히틀러는 현대 예술을 퇴폐적이라 비난하며 탄압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들은 망명했고, 이들의 작품은 불태워졌다. 프리드리히 광장이 바로 그 시절 2000여 권의 금서가 소각된 현장이다. 또한 카셀은 나치 정권의 군수공장이 집결한 곳이었다. 그 까닭에 카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표적이 됐고, 도시의 90%가 폭격으로 파괴됐다. 너덜너덜해진 도시를 부활시킨 이가 바로 카셀 대학 교수이자 미술가, 큐레이터인 아르놀트 보데(Arnold Bode)였다. 그는 과거를 반성하며 폐허가 된 도시를 예술로 치유하고 부흥시키고자 1955년 카셀 도큐멘타를 창설했다. 이후 도큐멘타는 협업과 참여, 연대를 지향하며 결코 가볍지 않은 사회적 담론, 인류의 과제를 예술로 풀어왔다.
반유대주의 논란을 일으켰던 인도네시아 작가 그룹 타링 파디의 또 다른 작품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닌 카셀 도큐멘타는 차별화된 목소리와 무게감, 파격적 행보로 현대미술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행사로 우뚝 섰다. 5년마다 100일간 열리는 이 행사는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든다. 카셀 도큐멘타의 역사적 순간을 만든 예술가를 꼽자면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를 들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주장했다. 또한 1972년 도큐멘타 5(회차를 뒤에 붙인다)에서는 100일간 민주주의와 예술에 관해 강연과 토론을 펼쳤고, 10년 후 도큐멘타 7에서는 카셀 시내 곳곳에 떡갈나무 700그루를 심는 퍼포먼스로 환경에 관한 의식과 함께 관객 참여 미술을 실험했다. 이 외에도 개막식 현장을 위성중계한 백남준(도큐멘타 6), 1001명의 의자와 중국인을 카셀로 불러 모은 아이웨이웨이(도큐멘타 12) 등은 도큐멘타는 물론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풀다 강에 둥둥 떠 있는 물시계는 블랙 콴텀 퓨처리즘의 인터랙티브 설치미술 작품.
올해 6월 18일에 개막한 도큐멘타 15는 역대급 파격이다. 그동안 백인 및 유럽 중심주의로 오랜 질타를 받아왔고, 처음으로 아시아인 예술감독으로 ‘루앙루파’를 선임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집단 루앙루파는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서 출발해 시대의 사회 문제를 예술적 아이디어로 풀어내는 비영리단체. 이들은 지역사회의 참여를 기반으로 전시와 연구 · 워크숍 · 축제 등을 진행해 왔는데, 이는 도큐멘타 15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루앙루파의 도큐멘타 15는 ‘룸붕(Lumbung)’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룸붕은 인도네시아어로 ‘공용의 곡식 창고’를 뜻한다. 잉여 수확물을 저장했다가 나누던 곳간인데, 이를 공동체와 네트워크, 합작과 분배, 상생, 참여 등 다채로운 키워드로 확장시켰다. 이를 구현할 참가자들의 선정 방법 또한 획기적이었다. 14개 집단과 54명의 예술가를 뽑은 후 이들의 ‘룸붕’을 초대해 무려 1500여 명이 참여하는 등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집단을 추구한 만큼 개인의 힘은 뺐다. 즉 이름난 대형 예술가는 찾아볼 수 없다. 몇몇을 제외하곤 구글 검색으로도 정체를 알기 힘든 팀이 대다수였다. 루앙루파는 그동안 소외돼 왔던 남반구의 현대미술을 조명해 새로운 예술세계와 이슈를 탐험하게 하기도 했다.
그림박물관에선 인도네시아 예술가 아무스 누르 아말 프토는 일상의 물건으로 만든 비디오와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1500여 명의 룸붕 멤버들의 작품은 박물관과 미술관, 교회, 궁전, 극장, 호텔 등 카셀 전역 32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도큐멘타 15는 ‘공동체’와 ‘참여’가 핵심인 만큼 관객 참여형 작업이 빼곡하다.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놀고 대화하게 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와 토론회, 워크숍 등을 경험하려면 최소 3일은 머무르기를! 지역은 크게 중심부인 ‘미테’와 강변의 ‘풀다’, 동쪽 지역인 베텐하우젠, 북쪽의 노르트슈타트로 나뉘며, 루루 하우스가 자리 잡은 구시가의 중심 미테 지역부터 차례대로 둘러보면 된다. 먼저 카셀 도큐멘타의 메인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프리데리치아눔에 들어섰다. 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미술관은 학교로 변신해 각종 워크숍과 세미나, 이벤트가 마련돼 있었다. 5개 층에 걸쳐 총 21개의 프로젝트가 준비돼 있는데, 시대 이슈와 정신을 투영하는 전쟁 · 난민 · 인권 · 식민주의 · 여성 · 환경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의 흑인 해방 운동, 홍콩의 아시아 토착 문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 알제리의 여성 투쟁 역사에 관한 기록과 영상 앞에선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에서부터 존재감을 발하는 도큐멘타 홀로 향하니 조금 더 감각을 자극하는 체험들이 펼쳐졌다. 아프리카 작가들로 구성된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Wajukuu Art Project)’는 마사이 전통 가옥을 본뜬 입구를 마련했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이로비 빈민가의 소음이 흘러나온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향하면 태국의 예술 집단 ‘반 누르그 컬래버레이티브 아츠 앤 컬처(Baan Noorg Collaborative Arts and Culture)’가 그림을 그린 스케이트보드장이 나타난다. 밖으로 나서니 방글라데시에서 온 브리토 아츠 트러스트(Britto Arts Trust)가 직접 재배한 채소를 이용해 100일 동안 100개 국적의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한국의 작가와 조우하는 반가운 기회도 있었다. 오토네움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이끼바위쿠르르의 비디오 내러티브 작품으로,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해초 이야기’와 미크로네시아 야프 제도를 담은 ‘열대 이야기’가 상영되었다.
반 누르그 컬래버러티브 아츠 앤 컬처의 작품 위에서 라이딩을 즐기는 스케이트보더.
낙후한 공장지대와 문을 닫은 수영장, 호스텔 같은 공간엔 좀 더 과감한 시도가 이뤄지게 마련이다. 카셀 동쪽의 베텐하우젠이 바로 그런 동네다. 과거 버스와 기차, 탱크의 부품을 생산했던 휘프너-아레알(Hu..bner-Areal)은 하이라이트 전시장 중 하나다. 이곳에선 시간을 넉넉히 할애해야 하는데, 흥미로운 영상과 설치미술, 퍼포먼스 때문이다. 덴마크의 비영리단체 트램펄린 하우스는 난민들에게 잔혹한 덴마크의 시스템과 인권 침해 상황을 영상과 설치미술 작품을 통해 고발한다. 필리핀의 시각예술가이자 영화제작자인 키리 달레나의 대형 비디오 월은 마닐라의 식량배급소 앞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를 기록했다. 카셀의 녹음으로 가득한 풀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으로의 복귀,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품들과 맞닥뜨린다. 우아한 오랑제리 박물관 앞에 놓인 쓰레기 더미 ‘리턴 투 센더(Return to Sender)’도 그중 하나다. 케냐의 네스트 컬렉티브(Nest Collective)가 의류 폐기물로 만든 설치미술 작품 안으로 들어서면 아프리카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영상으로 확인하게 된다. 동시대의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 행사인 카셀 도큐멘타. 그런 만큼 반유대주의 논란 등 쟁점도 끊이지 않지만,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국경을 넘어 시대적 담론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임에 틀림없다. 올해의 카셀 도큐멘타는 9월 25일까지 개최된다. 지금이 아니면 5년을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