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시한 블랙 재킷과 화이트 터틀넥 디테일의 그레이 니트 톱, 버진 울과 레이어드한 메탈릭 소재의 스커트, 블랙 메리 제인 슈즈 힐은 모두 Prada.
지난해 12월호에 이어 다시 한 번 프라다를 입고 〈엘르〉 커버 스타가 됐습니다. 다가올 계절의 옷을 입어봤죠. 새롭게 발견한 취향이 있는지
아주 무거운 풀 스커트가 마음에 들었어요! 전 무거운 옷을 선호하지 않는데 무게가 주는 힘이 있더라고요. 컬러도 예쁘고. 잘 어울리는 코트와 함께 입고 싶은 생각에 왠지 겨울이 기다려져요.
지난 〈엘르〉 인터뷰 인사말로 그간의 안부를 물을게요. 어떻게 지냈나요? 가끔 좋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설레는 아침을 맞았나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촬영을 끝내고 자주 그랬어요. 최근 거의 매일 설레며 눈을 떠요. 오늘은 또 누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까, 어떤 우주와 만날까. 세상에는 설레는 것이 많아요. 특히 사람과의 대화가 그래요. 전 말하는 것과 듣는 일을 동급으로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누구와 이야기해도 대화가 굉장히 풍성해져요. 세상에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매일매일 설레며 눈을 떠요.
브랜드 시그너처 로고를 장식한 화이트 탱크톱과 벨트, 그러데이션으로 포인트를 준 가죽 재킷은 모두 Prada.
그 질문엔 대답이 궁색해요. 나를 조금 괴롭히고 있거든요. 잠을 잘 안 자요. 두어 시간 혹은 30분 자고 나갈 때도 있어요. 감기가 석 달째 안 떨어져요. 몸은 작작 하라고 소리치는데 잘 시간이 아까워요. 이런 시기도 결국 지나갈 테니 쓰러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누리고 싶어요. 잠이 부족해도 맑은 정신으로 설레며 맞는 아침을. 종종 재미있게 놀기도 합니다. 새 보러 섬에 다녀왔어요. 백령도, 울릉도, 최근엔 남이섬. 글도 썼고요.
드디어 영화 〈외계+인〉이 개봉합니다. 무려 2부에 걸쳐 방대한 세계관을 펼칠 예정이죠. 13개월이라는 촬영을 거쳤고요. 〈외계+인〉 촬영 중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한 순간은
〈외계+인〉 촬영 동안 네이버오디오클립에서 ‘김태리의 리커버북’이라는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어요. 1년간 책 50권을 읽어야 했죠. 보통 촬영장에서 딴짓하지 않는 편인데, 일을 핑계로 꽤 행복하게 많은 시간을 독서에 썼어요. 어느 밤 촬영 때, 현장이 아주 어두워서 작은 북 라이트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한순간 환해지는 거예요. 고개를 돌려보니 홍승철 조명감독님이 조명을 밝혀주셨더군요. “밝은데서 봐야지…” 하며 돌아가시는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기뻤어요.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 〈외계+인〉 촬영장에서는 이런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감사하게도.
짙은 그레이 컬러 니트 톱과 풍성한 주름 장식의 풀 스커트, 로고 장식을 더한 블랙 메리 제인 슈즈, 은은한 광택의 브러시드 가죽으로 만든 토트백은 모두 Prada.
〈외계+인〉 대본을 받고 최동훈 감독과 미팅하며 “이런 대본이 어떻게 저에게 오죠?”라고 물었다죠. ‘꿈이야, 생시야’라고 생각했고요
감독님의 모든 영화를 재미있게 봤어요. 팬이었고, 언젠가 꼭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감독님이었죠. 기다리면 언젠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최동훈 감독님과의 작업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여겼던 것 같아요. 최동훈 감독님 같은 분이 리스크를 감내하며 젊거나 어린 배우에게 중역을 맡기는 것은 젊은 배우들에게는 정말 감사한 선택임과 동시에 너무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요즘 대한민국 젊은 배우 중엔 스타가 없다고. 조금 더 어린 친구들에게 기회의 장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전적 시도가 있어야 한 명의 스타라도 나올 테니까요. 물론 이미 스타인 사람이 무슨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적힌 대본을 읽으며 진심으로 생각했어요. ‘꿈이야, 생시야?'
최동훈 감독 영화의 어떤 면을 흥미롭게 봤나요
대사요. 최동훈 감독님의 인물은 모두 흥미로운 말을 해요. 단 두 음절 내뱉는, 지나가는 행인까지도요. 이런 대사마저 흥미로우면 짚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 피곤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감독님 작품 특유의 ‘속도’가 그렇지 않게 만들죠. 작품 속에 집약된 말들이 어떻게든 적확한 자리를 찾아요. 어떤 대사는 날아가고, 어떤 대사는 날아와 꽂혀요. 그러나 두 번, 세 번 볼 때는 날아갔던 말이 다시 꽂히죠. 두 번, 세 번 혹은 10년 뒤에 다시 봤을 때 또 새로운 것이 보이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동훈 감독님은 그런 영화를 만드는 분이죠.
반짝이는 스팽글 장식이 돋보이는 애비에이터 재킷과 메탈릭 소재의 스커트, 블랙 펌프스는 모두 Prada.
〈외계+인〉에서 맡은 배역 ‘이안’ 역시 권총을 쥔 여성입니다. 총과 칼 등을 다루는 김태리를 보는 것은 관객에게 꽤 쾌감을 주는 일이 됐어요. 스스로도 그런 배역을 소화하며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럼요! 모든 소품은 연기를 도와줘요. 연출자 혹은 제가 어떤 번뜩이는 재치로 그것을 사용할 때 굉장히 즐거워요.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경주아시안게임 경기 이후 도망친 희도를 이진이 잡으러 오는 장면이 있죠. 이때 희도가 가방에 있는 펜싱 칼을 두 개 집어 저벅저벅 이진에게 걸어가요. 이때 칼 두 개를 드는 방식을 다양하게 생각했어요. 양손에 나눠 들 수도, 있고 칼날을 잡을 수도 있고, X자로 들 수도 있겠죠. 움켜쥘 수도 있고 소중히 안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을 함께 고민하는 이들을 만날 때 즐거움이 배가돼요.
김태리가 연기한 여성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보여주는 일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이안도 마찬가지죠. 이들을 통해 알게 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법은
거쳐온 배역 모두 배움을 주었지만, 직전 작품인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가 정말 대단했어요. 저는 제 어떤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희도를 연기할 때도 그런 것에 신경 썼죠. 그런데 촬영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잠깐만, 나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나 어쩌면 그냥 이렇게 생긴 거 아냐?’ 스마트폰 사진첩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려 가장 오래된 사진을 봤어요. 대학생 때 사진이었죠. 사진을 보고 거울을 다시 봤어요. 세상에! 똑같이 생긴 거예요.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겼고 앞으로도 이렇게 생긴 사람인데 대체 무엇에 스트레스받았을까요? 이제는 카메라의 어떤 앵글도 두렵지 않아요.
꽃 모양의 스팽글을 장식한 메탈릭 소재의 드레스와 화이트 탱크톱, 검은색 브리프는 모두 Prada.
저는 뭐든 일단 받아들이고 제 것으로 이해하려는 기질을 가졌어요. ‘패스트 러너(Fast Learner)’이고, 바닥에 구르는 걸 좋아하죠.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유연함’인데, 내게 오는 파도를 회피하거나 배척하면 유연함과 거리가 멀어져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나를 성장시키는 게 고통과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이에요.
궁극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중요한 키워드로 ‘사랑’을 자주 언급했죠. 김태리는 주변에서 어떤 사랑을 받아온 사람인가요
가족들이 모두 곁에 있었지만 저는 혼자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앓은 애정 결핍은 굉장히 좋은 방향으로 흘렀어요. 사랑을 받지 않고 커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제 경험을 토대로 말할 수 있어요.
레트로 분위기의 기하학적 패턴이 돋보이는 니트, 버진울과 실크·메탈릭 소재를 매치한 스커트, 골드 부츠는 모두 Prada.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이 있어요. 아직 읽진 못했는데 친구가 말해준 내용은 이래요. 어떤 장소에 사람이 머물고 있어요. 누군가 그 장소에 찾아오면 머물던 이는 두 손을 활짝 열고 환대하죠. 이게 사랑인 것 같아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 지금 그렇게 나의 장소에 오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고 있어요.
배신감이요. 그런데 배신감도 다른 여러 감정처럼 겪어볼 만한 감정인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요.
돌이켜보면 그토록 연기하기를 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미와 인정 욕구요. 평생 이 일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고, 꽤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 예상은 맞았고, 두 번째는… 글쎄요, 재능까진 아닌 것 같지만 최선이라는 무기로 대처하고 있어요.
쇄골을 유니크하게 드러내는 블랙 드레스와 자유자재로 레이어드할 수 있는 로고 장식의 실버 브로치는 모두 Prada.
앞으로의 자신에 대한 기대를 묻는 질문에 “어떨 것 같다는 건 없어요. 무조건 빛날 거고요”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로서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배우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모델이며 작가이고 감독이자 사진가일 수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완성해 갈 거예요. 이상이 늘 현실보다 너무나 높았어요. 항상 이런 생각을 했죠. ‘못 해도 돼.’ 그런데 이제는 어떤 확신이 들어요. 내가 생각한 최후의 산을 넘을 거라는.
화제의 유튜브 브이로그 〈거기가 여긴가〉를 시작하며 직접 썼다던 장문의 기획서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치밀한 계획을 거치는 편인지
‘화제의’라고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웃음). 일에 있어선 계획을 자세하게 하는 편이에요. 〈거기가 여긴가〉는 명백히 일의 연장선이었죠.
운전하며 많은 감정을 해소하나요? 〈거기가 여긴가〉의 오프닝으로 쓰인 장면 중 운전하며 훌쩍이는 신이 있었죠. 많은 팬이 그 장면의 앞뒤를 궁금해했는데 끝내 본편에 나오지 않더군요
하하하. 이걸 〈엘르〉가 물어보는군요.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를 들으며 울었어요. 차 타고 다니며 많이 울었는데, 보통 음악을 듣다가 울어버려서 저작권 벽에 막혀…(웃음). 하지만 재미있었죠! 조금 새어 나온 비밀은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매니시한 블랙 오버사이즈 코트와 삼각형 로고 브로치, 그러데이션 디테일의 화이트 토트백은 모두 Prada.
목포에선 등산 중 마주친 타인과 40분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오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김태리에겐 쉬운 일인가요
네! 누구와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침투력이 높습니다. 목포의 섬 아저씨 클립은 무삭제판으로 유튜브에 올리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콘텐츠 회의 끝에 완결성 있는 네 편으로 마무리하기로 해서 아쉽지만 짧게 편집했어요.
백상예술대상 수상 소감에서 “희도에게서 많은 걸 훔쳐먹었다”고 했어요. 〈외계+인〉의 이안에게서 훔쳐먹은 것 중 소중히 여기는 게 있다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인간이라는 확신이요.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주고받고 있고요. 이안이가 작품에서 어떻게 보일지 저도 모르겠어요. 아직 완성본을 보지 못했거든요. 영화를 보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록색 염소 털을 장식한 헤링본 코트와 기하학적 패턴의 니트, 토 부분에 그러데이션으로 포인트를 준 펌프스는 모두 Prada.
앞의 수상 소감 첫머리에 이런 말도 들려줬어요. “배움은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고 내가 훔쳐먹어야 하는 것이다.” 연극하던 시절, 인물 소개란에 “나는 배우고픈 대학생 김태리!”라는 코멘트와 함께 썼던 문장이죠. 지금 김태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욕구에 충실하기요. 내 머릿속에서 자꾸 튀겨지는 팝콘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맛보는 것. 요즘은 이런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