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장편영화로 주목받은 최진영 감독.
첫 해외 수상이기도 하고 〈태어나길 잘했어〉로 받는 첫 수상이어서 기뻤다. 관객을 모니터로 만나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국경을 넘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에 열심히 대화했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꿈속에서 나의 또 다른 자아라고 주장하는 남성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 이 꿈이 모티프가 돼 자신의 자아를 직면하고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해 주자는 주제로 관통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인공 ‘춘희(강진아)’가 과거의 나를 보게 되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는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페미니즘이 폭발적으로 가시화되었고, 나 역시 끊임없이 내 안의 마초와 싸우고 투쟁했다. 〈태어나길 잘했어〉를 계속 수정하면서 이성애 서사로 춘희를 구원하는 것보다 진짜 춘희가 지나쳤을 법한 시기를 도래시키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한 번도 이 판단과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영어 제목은 ‘The Slug(민달팽이)’이다. 그 이유는
‘집이 없는’이라는 특징이 춘희와 꼭 닮았고, 무엇보다 민달팽이의 느린 속도나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는 게 춘희를 떠올리게 했다.
다한증을 앓는 춘희는 수술받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마늘을 깐다. 이런 설정은 어떻게 떠올렸나
우리 사회는 장애나 결핍을 시혜적이거나 구제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장애와 결핍이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땀이 많은 춘희지만 손으로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한 장면.
강진아 배우의 첫 장편영화 〈한강에게〉에서 인상적인 얼굴을 봤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에서 ‘누구나 자기만 아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사적으로 만났을 때 그의 유쾌함은 춘희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다지는 데 도움이 됐다. 강진아 배우에게 이 자리를 통해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IMF 시대를 영화의 배경으로 선정한 이유는
90년대는 내 사회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시기다. IMF 시대는 가깝게 느껴지는 비극이었다. 그때의 서늘한 공포를 다시 직면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내 10대와 잘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 조연들과의 관계성이 돋보인다. 춘희와 빵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노숙인, 가정에서는 소외당하지만 춘희를 위로하는 외할머니처럼. 특히 신경 쓴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무래도 비중이 정말 컸던 노숙인. 노숙인 역할의 황미영 배우가 그 추운 겨울에 맨발로 촬영하겠다고 해서 절대 안 된다고 말렸지만 설득에 넘어가 그대로 촬영했다. 편집할 때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영화에서 얼마 안 되는 리얼리즘이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나의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순간은
관객과 마주앉아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금이 그렇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내가 만든 영화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야말로 정말 잘 태어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