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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언 작법의 기술_허언의 기술 #10

글 좀 쓴다하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글의 형상을 한 허언’은 과연 무엇일까?

양윤경 BY 양윤경 2021.03.25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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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도 허언이 있지만 글에도 물론 허언이 있다. 매거진의 에디터처럼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재야에서 글 좀 깨나 쓴다고 알려진 사람들, SNS에서 필력 하나로 팬층을 형성한 사람들 등등. 그들이 구사하는 ‘글의 형상을 한 허언’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에세이인가 이론 서적인가  

읽고 있으나 읽어지지 않는 글이 있다. 분명 하얀 종이 위에 글자가 가득 쓰여 있고,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세종대왕님 프로듀스 한글이 분명하거늘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그냥 뇌를 스쳐 지나간다. 즉, ‘리딩’만 되고 도무지 ‘언더스탠딩’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찾았다, 대학교 전공 서적을 눈으로 응시만 하던 N년 전 나의 모습! 길게 쓴다고 잘 쓴 글이 아니다. 때로는 거두절미하고 요점을 빠르고 명확하게 짚어주는 게 필요하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 읽는 사람의 시간도 좀 아껴야 하지 않겠나? 제발 국도 타고 돌아가지 말고 본론으로 가는 하이패스를 타 달라.  
 

전지적 나빼썅 시점  

‘나빼썅’이란 다들 잘 알다시피 ‘나 빼고 다 ㅆ….(이만 줄이겠다)’란 뜻이다. 이런 스타일은 주로 개인의 감정을 기술하는 SNS 플랫폼에서 많이 발견된다. 화자인 ‘나’는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를 지녔고, 합당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분노하거나 마음 아파할 만큼 섬세하다. 그러나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민폐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것처럼 뻔뻔하기 짝이 없으며, EQ와 양심 지수, 공감 지수가 결여된 인간으로 치부하는 유형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여린 나는 오늘도 거칠고 무딘 세상 사람들과 싸운다’는 확고한 세계관 안에서 그들의 창작은 계속된다.
 

목 늘어난 티셔츠처럼 끝도 없는 늘어짐  

글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의 가장 쉬운 착각은 ‘길게 풀어내면 나의 필력과 갬성이 드러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다. 김애란 작가와 같은 표현의 연금술사가 아닌 이상, 길게 쓴 글은 그냥 긴 글일 뿐이다.  목 늘어진 난닝구는 그냥 난닝구인 것처럼 물리적인 변화가 본질을 바꾸진 않는다! 과도한 문어체 사용 또한 마찬가지다. 개화기 지식인에 빙의해 근대 소설에나 나올법한 표현을 일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예를 들어 ‘그러하고, 그러했으며, 그러했던 것이었다’ 와 같은 것들 말이다. 자네 혹시, 장래희망이 ‘변사’인가?
 

안물안궁 신변잡기 남발  

글을 쓰는 이들은 다들 나르시시즘을 장착하고 있지만, 자아 사랑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 간단한 기사 하나를 읽는데 왜 독자인 우리가 기자의 요즘 컨디션은 어떤지, 꽂힌 취미가 무엇인지, 누구와 썸을 타는지 알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공감하는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글을 읽지, 굳이 다른 사람의 포도알 다이어리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달라.
 

번역투와 상황극 남발이 버무려지면

원서나 외국 기사를 그대로 번역하면 어딘가 어색하다. 대부분 그 나라의 언어적 습관 등이 그대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아앗, 역시 그렇게 되어버렸군’ 이라던가 ‘오, 하느님. 제임스가 하필 여기에 나타나다니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국어로 글을 쓸 때도 이런 어색한 번역투를 그대로 좇는 사람들, 주로 외국 매거진의 한국판에서 발견된다. ‘독자 여러분~ 그래서 누가 저에게 묻더군요.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와 같은 어색한 상황극이 남발되는 글을 읽다 보면, 다큐 채널에서 방영되는 세계의 사건사고 재연 다큐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음… 그날은 정말 평화로운 하루였죠. 매튜로부터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진 말이죠.” 무슨 뉘앙스인지 우리 독자들은 아시겠죠?      
 
* 바야흐로 관종의 시대, 성공한 관종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았다. 그건 바로 '허언'!? 나대고 설치는 행동이 성공의 무기이자 기술이 된 이 시대를 노련하게 헤쳐나갈 노하우를 전하는 '허언의 기술'은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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