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크리스마스가 싫은 이유_라파엘의 한국살이 #46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한국 크리스마스가 싫은 이유_라파엘의 한국살이 #46

커플의, 커플에 의한, 커플을 위한 크리스마스.

김초혜 BY 김초혜 2020.12.18
나는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다 보니 내게도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은 크리스마스다. 12월 초부터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다. 거리 분위기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음악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명절 분위기에 녹아든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친구들과 만나 뱅쇼를 마시고 몇 주간은 다이어트를 잊고 맘껏 즐긴다. 또 12월은 쇼핑을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마트와 백화점의 매출이 가장 높은 달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다문화, 다종교 환경인 영국에서 내 친구들은 무슬림, 유대인, 무신론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받아들인다. 각자 자기만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크리스마스만큼은 유일하게 모두가 함께하는 전통인 셈이다. 어릴 적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있는 선물 꾸러미가 가장 중요했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가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느껴진다. 배달음식과 식당 음식에 익숙해진 내가 ‘집밥’을 가장 그리워할 때이기도 하다.
 
내 가족은 총 여섯 명이고, 다섯 개 국가에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기가 어렵다. 아마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였던 게 10년 전쯤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매 크리스마스엔 모두가 모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영국과 유사하다. 도심 곳곳이 반짝반짝한 장식으로 가득 차고 상점에서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온다. 추석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의 크리스마스 역시 가족이 함께 모인다. 영국과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한국의 크리스마스가 커플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의아하게 느껴졌고, 여전히 어색하다.
 
한국의 커플들은 크리스마스에 근사한 레스토랑에 로맨틱한 식사를 한다. 가능한 한 비싼 선물을 교환하며,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카페에 가거나 영화관에 간다. 혹은 친구들끼리 놀기도 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낼 것이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커플에게 있어 특별한 날이며 밸런타인데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싱글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초조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날이기도 하다.
 
몇 년 전 한국 하우스메이트가 크리스마스에 데이트한다며 분주하게 집안을 휘저었다. 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다듬으면서 집에 홀로 남아있을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로맨틱한 크리스마스는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솔직해져 봐. 너 나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그는 나에게 크리스마스가 로맨틱한 날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나는 동성 친구랑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날따라 마침 파스타가 먹고 싶었고, 식당 입구에서 와서야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커플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에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같이 갔던 친구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크리스천이 많은 한국은 크리스마스가 국경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쩌다 크리스마스가 커플들을 위한 날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근로자를 위한 날, 어린이를 위한 날은 일 년에 하루 뿐이다. 커플을 위한 날도 일 년에 하루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에 크리스마스까지 더해졌다. 이날까지 괜찮은 레스토랑과 핫플레이스를 커플들에게 내줘야만 하는 거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커플의, 커플에 의한, 커플을 위한 날이라는 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국살이 10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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