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는 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한국어학당이 있다. 1년 과정에서 한국어 표현과 문법 속담 등을 배우게 되는데 그중에 굳이 알아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단어들이 몇 개가 있었다. ‘외모지상주의’, ‘눈치’, ‘시집간다’. 그리고 ‘스펙’도 그런 단어 중 하나다. 지금은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 단어가 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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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국인의 스펙 쌓기는 사실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다. 영어유치원, 국,영,수 학원, 예체능 학원, 과외, 논술 학원 등 대학교 입학 전에 쌓아야 할 스펙이 너무 많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을 억누른다.
취업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대학교 졸업장 역시 충분하지 않다. 대학원도 충분하지 않다. 고득점의 영어 점수가 있어도 충분하지 않다. 스페인어와 영어가 유창한 내 친구가 백수인 걸 보면 제2외국어로도 충분하지 않다. 전공 관련 자격증, 인턴십, 대외활동, 공모전 수상, 토익 점수, 해외 어학연수 등 스펙의 종류는 끝이 없다. 게다가 요즘은 면접을 잘 보기 위해 학원까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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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스펙 쌓기에만 전념하는 이유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다. 좁아지는 취업 문, 무한한 경쟁,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는 개인은 기댈 곳이 많지 않다.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정서적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스펙 쌓기에 단련된 사람이면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하고, 그 반대의 경우 나태하거나 남보다 뒤처진다고 느끼는 거다.
한국에서 스펙은 각자의 다양한 능력을 수치화해서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문제는 대졸자 중 비경제활동인구가 381만 명이나 되는 현실에서 스펙은 이미 그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거다. 단지 스펙 관련 산업만 호황을 누릴 뿐이다. 모두가 비슷한 종류의 스펙 쌓기에 몰리다 보니 자기소개서 역시 고유의 개성을 갖기도 어렵다. 그래서 남보다 하나라도 더 많은 스펙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구조 변화로 잉여 노동력이 쌓여만 가는 취업 환경이다. 엄청난 스펙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스펙 쌓기가 만연한 사회라 구직 실패를 끊임없이 개인의 문제로 몰아간다는 점이다.
학점이 경쟁자보다 0.1점 낮아서, 토익 만점이 아니라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못해서, 내세울 만한 인턴십 경력이 없어서, 대외활동을 못 해봐서, 공모전 당선 경험이 없어서 취직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노후 걱정 없는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가 수가 많지 않아서다. 추측하건대 코로나 사태로 취업 시장은 더 악화되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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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동일한 양의 에너지라면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 투자하면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즐겁게 받아드릴 수 있을 거다. 누군가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스펙을 쌓는 시간이나 꿈을 추구하는 시간 모두 결과가 보장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본인의 적성에 맞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드는 일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한국살이 10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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