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영화가 패션이 된다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FASHION

재난영화가 패션이 된다면?

디스토피아적 패션에서 찾은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

ELLE BY ELLE 2020.09.23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재난영화를 즐겨 본다. 인간의 영향력을 불허하는 무소불위의 힘, 자연이라는 권력 아래 무기력하게 사그라지는 인류를 그린 재난영화는 대체로 스펙터클한 파괴 장면과 스릴 넘치는 스토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은 채 전진하는 인류의 서사가 쉴 틈 없이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게 된다. 미세 먼지에 점령당해 처참히 붕괴된 지구의 미래를 그린 〈인터스텔라〉, 임신과 출산이 까마득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칠드런 오브 맨〉, 핵전쟁 이후의 카오스를 탁월한 영상미로 구현한 〈블레이드 러너 2049〉 등. 에디터의 ‘최애’ 영화 리스트 중 디스토피아 영화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한 이유는 은연중에 이토록 끔찍한 자연재해가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사건이라 여기며 ‘남의 일’ 보듯 방관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2020년 현재, 우리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더불어 각종 비극적인 자연재해와 맞닥뜨리고 있다. 전문가들이 ‘지구의 역습’이라 입을 모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물론 홍수, 산불과 토네이도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그동안 영화에서만 보던 자연재해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임을 비로소 피부로 느끼게 됐다. 지난 2월, 패션 위크가 한창인 와중 코로나19가 급격히 창궐하면서 활기를 띠던 패션계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많은 패션 하우스가 오랜 시간 준비한 프레젠테이션과 쇼를 잇따라 취소하거나 연기했고, 수많은 손님이 드나들던 명품 매장과 편집 숍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호주 산불 피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뿐인가. 최악의 장마가 초래한 아시아 지역의 홍수, 여의도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토지를 불태운 캘리포니아 대형 산불 ‘애플 파이어’와 시베리아 이상 고온 현상 등 지구 종말의 신호탄이라 할 만한 전례 없는 재앙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한다. 암울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견한 것일까? 마치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종말의 기운이 잠식한 어둠의 런웨이가 2020 F/W 시즌 컬렉션으로 인류의 문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선구자 뎀나 바잘리아의 새 시즌 발렌시아가 쇼는 그야말로 충격이라 할 만했다. “홍수를 비롯해 우리 삶을 위협하는 모든 카오스를 떠올렸어요.” 그의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투영된 런웨이는 마치 홍수 피해를 입은 듯 관객석까지 물이 찰랑거렸고, 산불을 연상시키는 새빨간 불길과 푸른 하늘이 교차하는 영상 디스플레이가 쇼를 비현실적이고 음습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물을 박차고 워킹하는 모델들은 인류 종말과 시작 그 어딘가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전사처럼 보였으니, 쇼를 감상하는 내내 복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지난 시즌 기후 변화에서 생존한 인류를 주제로 컬렉션을 펼친 마린 세르 역시 프랭크 허버트의 공상과학소설 〈듄 Dune〉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기후 변화가 야기한 미래의 비관적인 모습을 이야기했다. 지구 온난화를 형상화한 영상을 배경으로 선보인 컬렉션은 ‘패션쇼’보다 진중한 다큐멘터리 필름에 가까운 모습. 이 시대의 필수 아이템으로 등극한 마스크와 발라클라바를 착용한 모델들의 룩이 지금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홍수를 피해 가까스로 생명을 지킨 ‘노아의 방주’ 속 동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톰 브라운, 우리가 직면한 어둡고 불안정한 미래를 극도의 화려한 스타일로 승화시킨 리처드 퀸 등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얼마 전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는 기후 변화 시나리오를 담은 정책 보고서를 통해 더욱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언급했다. 현재 급격한 기후 변화의 진행으로 지구 수명이 30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 수백 년 뒤의 이야기로 여겼던 스크린 속 비현실적인 일들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난영화 서사처럼 인류는 여기서 굴하지 않고 희망적인 대안을 찾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불필요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과정을 과감하게 수정하면서 각종 폐기물과 탄소 배출 절감에 앞서는 지금 패션계의 거대한 흐름은 희망적인 미래의 한 가닥일 테니까.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았나. 암울한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한 발렌시아가 런웨이에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드레스가, 마린 세르 쇼의 대미는 우리의 대를 이을 천진한 아이들이 장식했던 것처럼 긍정과 희망의 에너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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