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영 페미니스트' 이민경을 만났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92년생 '영 페미니스트' 이민경을 만났다

립밤만 바른 채 짧은 머리로 카메라 앞에 선 그가 물었다. "정말 메이크업을 안 하고 촬영하는 사람이 제가 처음이에요?"

ELLE BY ELLE 2020.01.02
레더 소재의 바이커 재킷은 Studio Tomboy. ‘WO, MAN’ 레터링의 티셔츠는 Portrait Report.

레더 소재의 바이커 재킷은 Studio Tomboy. ‘WO, MAN’ 레터링의 티셔츠는 Portrait Report.

성별간 임금 격차, 임신 중지, 탈코르셋에 이어 대리모 논쟁까지 과감히 주제를 선점한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고르는 기준과 동력은 SNS와 신문, 대화 등 사람들이 웅성대는 담론에서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경우가 많다. 말 속에 방향성이 느껴지고, 그게 일리가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결정한다.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에는 13명의 인터뷰이가 등장한다. 어떻게 쓰게 됐나 ‘탈코르셋’ 논쟁에 대한 칼럼을 제안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실제로는 100명 가까이 만난 것 같다. 메이크업 제품을 부순 사진을 SNS에 게재하며 처음 ‘탈코’를 선언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선택에 공감했다. 언제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게 효과적일까, 어떻게 하면 내 공적인 역할을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도 했고.
‘공적인 역할’이라면 자신이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기존 여성학계의 가교 역할임을 인지하고 있는 건가 단독 저서 4권과 역서 6권을 작업했던 지난 3년간 내가 공적인 페미니스트 스피커가 됐다는 인식에 가깝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어떤 집단적 열정이 한국 페미니즘에 불을 붙였다. 많은 사람이 그 열기에 휘말렸다가 지금은 약간 냉정해진 시기인 것 같은데, 그 열풍에 최선을 다해 휘말린 사람으로서 자칫 휘발될 수 있는 지점들을 책으로 기록하게 됐다.
그렇게 남긴 기록 중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다면 2017년에 펴낸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저축과 내 집 마련 등 비혼 여성의 경제력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탈코 운동’은 10~20대 초반 여성이 중심이다. 하지만 책에는 교사, 딸을 둔 엄마 등 조금 더 높은 연령대의 여성들이 인터뷰이로 등장하는데, 이유는 탈코르셋은 보이는 게 전부다. 메시지가 직관적이다 보니 오히려 정리된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 운동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너무 극단적이다” “꾸밀 자유도 중요하다”는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이상 여성의  유형이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고등학생의 말을 전하면 ‘아, 요즘 애들은 저렇구나’ 하고 말겠지만 인터뷰이가 28세 교사라면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 현상이 궁금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아이를 낳거나 가르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이 운동에 접속하기 바라서 인터뷰이들의 연령을 조율했다. 결국 같은 말인데 내가 기존의 출판 언어로 이야기하니까 이제 이해하게 됐다는 사람도 많다.
왜 유독 ‘탈코르셋 운동’만 더 많은 오해를 받았을까 실제와 상관없이 특정 서사가 채택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90년대의 중심 서사는 ‘양성 평등이 달성됐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취업 시장에서 겪는 불이익, 가정 내 성차별이나 성범죄는 개인의 불행으로 취급됐다. ‘꾸밈’ 역시 내가 꾸미고 싶어서 꾸민다는 ‘자발적인 꾸밈’이라는 중심 서사가 존재한 것 같다. 지금은 중심을 차지하는 서사가 뒤집히는 과정이라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꾸미는 것을 ‘반항’으로 여기던 시기에 10대를 보낸 여성들과 화장하지 않은 날엔 마스크를 쓰고 등교해야 하는 지금 10대 사이의 간극일 수도 있겠다 뷰티 유튜버나 K팝 그룹 때문일 수도 있고, 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이 늘어난 2010년쯤일 수도 있다. 분명 특정한 여성상이 강조된 지점이 있다. 아이들이 “넌 왜 안 꾸며?”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미 획일화된 ‘상’이 있는데, ‘꾸민다’는 의미가 다양했던 이전 세대는 이를 개성 차원에서 이해한다. 취업했거나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 놓인 이들은 ‘안 꾸밀 수가 없는’ 환경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시점에서 한국을 보자. 다이어트에 엄청난 돈을 쓰고, 서로 외모 간섭을 하고, 외모 때문에 죽고 싶다고 느끼고, 성형수술과 K뷰티가 세계적 산업이 됐다. 그런데도 이곳에 사는 여성들이 ‘나만은 주체적으로 꾸민다’고 말하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난 아닌데?’라는 반사적 반응까지도 하나의 풍경이자 사회적 현상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금전이나 시간 자원 말고도 눈 화장과 렌즈 착용, 하이힐, 보정 속옷, 과도한 다이어트 등 꾸밈 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됐다 사회적 여성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동참하는 순간 불안장애, 식이장애를 겪던 여성들의 몸이 즉각적으로 나아지는 걸 본다. 문제는 지금 한편에서는 또 다른 강박이 제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너 살짜리가 친구네 놀러가며 키즈 메이크업을 하는 것을 보고 인스타그램에 “우리 딸 여자 다 됐네”라며 사진을 올린다. 신체를 꾸미는 것을 ‘여자가 됐다’고 표현한다. 엄마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 문제를 세대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됐던 한 아이스크림 광고의 여아 모델이 떠오른다. 탈코르셋에 목소리를 보태는 게 다음 세대를 향한 어른으로서의 책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동시대성을 띤 많은 일이 세대간 연결에 실패하고 사라질 때가 있다. 지금 이 담론은 그래서는 안 된다. 교육과정에 넣든지, 정치적 의제로 만들든지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불법촬영 편파 수사’에 반대하며 34만 명의 여성이 모인 시위가 규모 면에서는 성공했음에도 앞으로 중요하게 기록되고 인정받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임신중단권을 요구했던 2016년 폴란드 ‘검은 시위’에 100만 명의 여성이 모였지만 폴란드 역사가 그걸 남성 100만 명이 모인 것만큼 중요한 무게로 다룰까? 여성의 역사가 없는 이유는 여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기록이 없으면 여성끼리 소모적 담론이 반복된다.
 
 
다른 페미니즘 운동과 달리 탈코르셋은 가시적 실천이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 상징적인 것이 1년 전 이수역 폭행 사건이다. 현장에서 오갔던 시비와 별개로 피해자 여성들의 외모가 묘사되는 순간 대중은 강한 반감을 가졌다. 위협을 느낀 적은 없나 신촌 한복판에 살며 페미니즘과 관련된 연구자와 인터뷰이를 만나고, 강연하는 게 일상이라 나는 괜찮다. 이수역 폭행 사건이 있었지만 비교적 다양성이 존중되는 서울에서는 투 블록을 한 여성이 다녀도 ‘힙스터인가 보다’ 하고 말기 때문에(웃음). 그러나 지역과 나이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SNS 세계와 달리 현실에서는 수도권과 지역간 격차가 있다. 진주에 사는 반삭의 여성이 남성의 적대를 느꼈다는 경험, 탈코르셋을 한 여성에게 가족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입하는 경우에 대해서 듣기도 한다.
지금 패션 잡지는 내 몸을 긍정하는 ‘보디 포지티브’ 단계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판단이나 평가를 아예 내리지 않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논의가 있기 전, 탈코르셋 같은 효과를 경험했던 순간이 잡지 속 인물들이 ‘리터칭’된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된 때였던 것 같다. 모델들이 포토숍 이전·이후 사진을 비교해 공개한 것이 뉴스화되기 전까지는 포토숍으로 보정된 몸을 내 피부, 굴곡과 비교하며 위축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타인의 몸과 나를 자연스럽게 비교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우리 내면의 변화도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뷰티 팁’  같은 포장된 단어로 받아들인 정보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폐기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BBC 남성 기자에게 “내가 비용을 주면 턱 깎아볼래? 훨씬 잘생겨질 것 같은데”라고 하니 바로 정색하더라. 신체가 조각조각 나뉘어 판단받은 적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즉각적 반응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질문을 하면 여성들은 한 번은 멈칫한다. 나도 오래전 흰자위의 핏줄을 없애는 시술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 그런 것도 있어?’ 하고 혹했다.
쌍꺼풀이 없거나 코가 낮은 여자아이를 보고 “아빠가 돈 많이 벌어야겠네” 같은 말을 농담처럼 하는 시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성에 한해 신체 개조가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강연할 때 여성들이 즉각적인 반감을 가질 만한 신체 개조의 예를 드는 것이 쉽지 않더라. 다리 힘줄도 자르고, 갈비뼈도 빼고, 질에도 필러를 맞고…. 이미 온몸이 침입 가능한 영토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섹스, 반연애, 반혼, 반출산…. 이성애에 부정적인 것은 이전과는 다른 영 페미니스트들의 특징 같다. 탈코르셋을 한 뒤 인지 부조화가 와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인터뷰이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이전에도 그런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많은 사회에서 이성애 로맨스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남성과 연애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급진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 생물학적 매력도 문제지만 데이트 폭력, 몰카, 단톡방 담화 같은 실질적 위협도 존재하지 않나. 남자가 없으면 삶이 정말 메마를까? 오히려 10대 때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충족됐던 친밀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구가 대학에 들어오면서 이성애 규범을 통해 꺾이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다. 이성애 연애라는 각본에 걸맞은 노력을 하면서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경험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여자 친구들과 멀어진다.
소설가 김세희도 <항구의 사랑>에서 그런 장면을 묘사한다. 여고에서 다양한 감정을 충만하게 느끼던 등장 인물들이 대학생이 되며 남성과 연애에 적합하도록 외모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교정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1920년대 벨에포크 시대의 낭만을 즐기던 주인공이 ‘페니실린과 마취제가 없는 시대’라며 자기가 속한 현대로 돌아가는 쪽을 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공포와 비슷하게 나는 내가 옛날처럼 무조건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아무리 옛날이 좋아도 페니실린 없는 시대가 두렵듯이, 이성애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입장이다. 게다가 이건 결코 박탈이나 포기가 아니다. 내 경험상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들은 여러 모임을 만들고, 여성간의 낭만적 우정을 나누고, 새로운 성정체성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충족감과 다양한 가능성을 마주한다. 물론 세상의 주류는 이성애지만 말이다. 
신간 <대리모 같은 소리>는 어떤 책인가 서구에서는 대리모가 존중해야 할 ‘선택의 자유’며, 이 주장이 가장 진보적인 입장으로 여겨지는데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이성애 난임 부부들의 대리모 이용이 존재하는 한국에서도 앞으로 논의가 있겠지만, 우선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해 일해 온 사람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대리모 제도를 반대하는 초국적 네트워크를 만든 호주 페미니스트, 레나테 클라인의 책을 번역했다. 
 
 

PROFILE 

이민경은 연세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여성을 위한 언어를 짓고 옮기는 활동을 한다. 일본에도 출간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비롯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유럽 낙태 여행>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등을 펴냈다. 역서로 <임신중지> <어머니의 나라>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 <나, 시몬 베유> <대리모 같은 소리> 등이 있다. @feminist3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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