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와 <나홀로 집에>의 케빈의 엄마, 그리고 <미스 슬로운>의 제시카 차스테인까지. 지난주에 살펴본 카멜 코트에 관해 오늘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카멜 코트의 전신은 1873년에 탄생한 웨이트 코트로 알려져 있다. ‘기다림의 시간’을 뜻하는 이 옷은 영국에서 폴로 시합 중 쉬는 시간에 가볍게 걸치는 중간 길이의 울 코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890년 즈음 낙타의 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브룩스 브라더스가 이 코트를 미국에 처음 선보이며 폴로 코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낙타털로 만든 목욕 가운 형태로 허리를 감싸는 스트랩이 달려있던 초기의 형태를 지나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스트랩이 사라지고 더블 브레스티드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울 소재가 더 많이 사용되었지만, 최초의 폴로 코트가 낙타 털로 제작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카멜 코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요즘엔 낙타의 컬러와 같은 베이지 톤의 울과 캐시미어 원단을 사용한 코트를 가리키는 말로 두루 쓰인다).

1936년, 폴로 경기 중인 사람들. 남성이 입은 폴로 코트는 지금의 카멜 코트와 비슷한 형태다. © 게티이미지
<엘르>의 독자라면 이미 예상했겠지만, 카멜 코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막스마라다. 1950년대, 낙타 헤어를 사용한 아우터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시절, 막스마라의 창립자 아킬레 마라모티는 첫 컬렉션에서 여성을 위한 카멜 코트를 선보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남성들이 입던 것과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오버사이즈 실루엣에 어깨 라인이 강조되어 있고, 더블 브레스티드와 슬릿 포켓으로 장식된 코트. “이렇게 멋진 걸 왜 여태 직접 입지 않고 다려주기만 했습니까!!” 라고 외치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낡은 세계가 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던 시기였다. 여성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스포츠 참여와 사회 진출의 기회가 많아진 시기. 경구 피임약이 발명되어 여성들이 스스로 임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 단순하고 기능적인 의상들이 발표되어 여성 패션의 혁신이 일어난 시기였다.
어떤 물건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때로 그것들은 메시지를 쏘아 올리기도 한다고 믿는다. 물성을 지닌 하나의 물건이 때론 백 마디 말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를 각성시킨다고 나는 믿는다. 막스마라의 코트가 당대 여성들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것은 강렬한 각성의 메시지였을까, 용기를 주는 따뜻한 말이었을까. 어쩌면 세상과 맞서기 시작한 당신을 위한 갑옷이 되어주겠노라는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코트는 첫 번째 피난처’라던 앤 마리 베레타(막스마라의 시그너처 코트인 ‘101801’ 코트를 만든 디자이너)의 말처럼.

막스마라 101801 코트 스케치 ©MAX MARA 제공

막스마라 마누엘라 코트 스케치 ©MAX MARA 제공
‘좋은 퀄리티의 제품을 만드는 기성복 브랜드’로 철저히 포지셔닝 된 브랜드. LVMH나 케링 그룹과 같은 거대 패션 그룹에 속하지 않고 여전히 독자적인 가족 경영을 이어가는 이 브랜드가 만드는 코트를 그저 아름다운 한 벌의 코트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성’과의 관계 때문이다. 창립자의 어머니 기울리아폰타네시마라모티가 패턴을 제작하는 양재학원을 운영하며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는 이야기,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제정한 막스마라 여성상, 엔터테인먼트 업계 여성들의 발전과 기업가 정신을 기념하고 여성 감독을 위한 행사를 후원하는 우먼 인 필름의 파트너로 활동하는 등, 브랜드의 여러 행보가 이를 설명해준다.

막스마라 2015 F/W 컬렉션 ©게티이미지

막스마라 2015 F/W 컬렉션 ©게티이미지
카멜 코트가 조금 올드하다고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2015년 F/W 컬렉션에서 마릴린 먼로를 흉내 내며 런웨이에 등장한 지지 하디드를 본 순간, 나는 이 클래식 아이템의 부활을 예감했다. 한 벌의 우아한 코트가 여성을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 단숨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01801 아이콘’ 오리지널 코트와 ‘마누엘라’ 코트 등의 클래식 코트들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엄마의 옷장에 있던 코트가 딸의 옷장으로 자리를 옮길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스테디셀러들의 곁에는 그 바통을 이어 받아 이미 브랜드의 새로운 아이콘이 된 주자도 있다. 1980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안 그리피스에 의해 재탄생된 복슬복슬한 코트. 실크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된 고급 섬유 플러쉬 패브릭으로 보드랍고 풍성한 핏을 완성시킨 코트. 바로 테디 베어 코트다.







‘좋은 코트 한 벌이면 겨울도 두렵지 않다’고 이 글을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좋은 코트란 어떤 것일까. 막스마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안 그리피스는 말한다. “완벽한 코트란 당신이 20년 동안 입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당신의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20년을 입고 딸에게 물려주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할 것이다. 좋은 소재로 만든 최상의 품질일 것, 과도한 디테일을 배제한 단순한 디자인일 것(<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의 코트, <나 홀로 집에>의 캐서린 오하라의 코트를 떠올리면 된다. 수십 년 전에 아름다웠고 지금도 아름다운 물건들은 수십 년 뒤에도 아름다울 확률이 높으니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소중히 여기며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
좋은 물건을 물려받고 물려주는 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 말했듯 어떤 물건은 메시지를 쏘아 올리기도 하니까. 강렬한 각성의 메시지, 용기를 주는 따뜻한 말, 당신을 위한 갑옷이 되어주겠노라는 약속 같은 것 말이다. ♡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