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오토바이 라이더였어요
일러스트레이터 김푸른은 그림책 '오토바이 할머니'를 통해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외할머니의 시간을 그려냈습니다.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손주를 태우기 위해 골목을 달리던 ‘바람의 여자’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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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할머니> 속 빨간 헬멧을 쓴 채 골목 곳곳을 누비는 ‘바람의 여자’.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미하기 위해 보라색 상의를 적용했다.
최근 펴낸 그림책 <오토바이 할머니>는 빨간 헬멧을 쓰고 서울 골목을 달리며,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바람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죠. 그간 정적이고 헌신적인 존재로 그려졌던 기존 할머니 이미지와는 다른 온도가 느껴졌어요
이 책의 모델은 돌아가신 저희 외할머니예요. 할머니가 50세 되던 해에 스쿠터를 갖게 됐고, 그 뒤로 30년 넘게 타고 다니셨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요. 오래전부터 ‘언젠가 그림책을 만들게 된다면 꼭 할머니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제 개인적 기억에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나도 저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거나 “우리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렸습니다.
확실히 ‘바람의 여자’ 할머니를 보면 훨씬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에너지가 느껴져요. 작가님이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도 그런 에너지가 아닐까요
맞아요. 사실 이동수단을 가진다는 건 삶의 범위를 굉장히 넓혀주잖아요. 장을 보러 갈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있고, 혼자 바람을 쐬러 갈 수도 있어요. 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 나가는 노년의 여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오토바이를 못 타지만, 뒤늦게 자전거를 배우면서 비슷한 감각을 느꼈어요. 자전거 하나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지고, 경험의 폭이 넓어진다는 걸 체감했어요.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삶을 움직이던 할머니가 멋있게 느껴졌어요.
실제로 외할머니 뒤에 동승했던 기억도 많다고요.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면
어릴 때 할머니는 창동, 쌍문동, 우이동 근처를 자주 다니셨어요. 저는 동네 정도만 오가셨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훨씬 멀리도 다니셨더라고요. 심지어 엄마 아빠와 함께 제주도 오토바이 일주도 하셨대요(웃음). 숙소를 옮겨 다니면서 여행했는데, 사람들이 헬멧 벗은 할머니를 보고 놀랐다는 거예요.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오토바이 타고 나타나니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시선을 즐기셨던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마트 앞에서 엄청 큰 두루마리 휴지 세트를 오토바이에 싣고 계셨던 게 생각나요. 지나가던 젊은이들이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더라고요(웃음). 저는 그런 게 멋있었어요.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해내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김푸른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비가 와도 개의치 않고 비옷을 꺼내 입는 모습을 상상했다.
작품 속에서 ‘바람의 여자’라는 표현도 오래 남더라고요.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실제로 엄마가 할머니를 보고 했던 말이에요. 예전에 할머니가 겨울 빙판길에서 오토바이를 타다 넘어져 갈비 뼈를 다친 적 있거든요. 그때 가족들이 모여 있었는데 엄마가 “우리 엄마는 바람의 여자”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보통 그런 사고가 나면 다들 그만 타라고 말리잖아요. 그런데 가족은 다 알고 있었어요. 말린다고 안 탈 분이 아니라는 걸(웃음). 그 표현이 강렬하게 남아 책을 만들게 되면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SNS에 창작 소감으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도 곁에는 할머니 품이 느껴졌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면 멋있는 할머니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웃음).
작업하면서 중요하게 붙잡고 있었던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할머니를 기리는 애도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이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할머니의 씩씩하고 명랑한 에너지가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색도 밝게 쓰고 재료도 다양하게 사용했어요. 의도적으로 즐겁게 그리려고 노력한 거죠. 우리들이 겪었던 즐거운 일상이 책에서 느껴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오토바이 할머니> 속 빨간 헬멧을 쓴 채 골목 곳곳을 누비는 ‘바람의 여자’.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미하기 위해 보라색 상의를 적용했다.
작품 속 빨간 헬멧과 보랏빛 옷, 스카프 같은 디테일도 인상적이었어요. 할머니 캐릭터를 만들 때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있었나요
빨간 헬멧은 실제로 할머니에게서 가져온 요소예요. 나머지는 상상해서 만든 부분이고요. 저는 이 캐릭터가 조금 중성적인 분위기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하늘색이나 초록색 옷도 시도했는데, 오토바이 색과 가장 잘 어울리는 컬러가 보라색이었어요. 스카프는 나중에 추가된 요소예요. 출판사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바람의 느낌이 좀 더 살아나면 좋겠다”는 의견을 줘서 적용했어요. 스카프 하나로 훨씬 자유롭게 달리는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특히 마음에 가는 장면은
음, 비 오는 날 장면이요. 할머니가 오토바이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달리는 장면인데, 거기서 ‘바람의 여자’라는 표현이 등장해요. 저는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적은 없거든요. 그런데 선명하게 떠오르더라고요. 비가 와도 개의치 않고 비옷을 꺼내 입고 다시 달리는 할머니. 마치 늘 달릴 준비가 돼 있는 사람처럼요.
이번 책은 결국 새로운 시대의 할머니 상을 보여주는 작업처럼 느껴져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지금 시대의 노년은 어떤 모습인가요
먼저 사회적 메시지를 생각하고 작업한 건 아니지만, 독립적인 할머니를 보면서 자란 사람으로서 저는 노년이 꼭 ‘쇠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삶을 계속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림책 속의 할머니들도 누군가를 돌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 더 많이 그려질 수 있을 것 같고요.
최근 김푸른 작가가 펴낸 그림책 <오토바이 할머니> 표지.
작가님이 생각하는 ‘독립적인 노년’의 의미도 궁금해요
이전에는 ‘독립적’이라는 게 모든 걸 혼자 해내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잖아요. 친구나 가족, 이웃 같은 공동체를 통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고립되지 않는 삶이 중요해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누군가와 연결돼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자기 역할을 해 나가는 사람. 그게 제가 생각하는 독립적인 노년의 모습인 것 같아요.
책을 낸 이후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
공교롭게도 책이 출간된 주가 할머니 기일이었어요. 다 같이 할머니 묘소에 가서 가족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죠. 부모님도 좋아해 주셨지만 사촌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웃음). 이모는 책을 보고 고맙다고 하셨어요. 다들 이 책을 통해 할머니를 다시 만난 기분이라고 했어요. 그 말이 오래 남더라고요.
작가에게 그림책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등학생 때 도서관 그림책 코너에 빠져 있었어요. 원래 그림 보는 걸 좋아했는데 불현듯 ‘나도 이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던 시기도 아니었어요. 제가 느꼈던 건 이 작은 그림책 하나가 독자에게 굉장한 위로를 준다는 거였어요. 꼭 슬픔을 달래는 방식뿐 아니라 웃기고 즐거워도 사람을 위로할 수 있더라고요. 언젠가는 꼭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아직도 초심은 그대로예요. 지금도 사람들에게 오래 남을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Credit
- 에디터 박찬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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