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당한 천재의 비극, '파이널 피스'
로맨틱한 미소 대신 서늘한 포커 페이스로 돌아온 사카구치 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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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이널 피스>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장기는 동북아시아 삼국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마인드 스포츠의 대표 격입니다. 재밌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장기 룰이 유사한 것에 비해 일본 장기인 '쇼기'는 전혀 다른 룰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잡은 상대편의 말을 내 진영에서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 특징 때문에 쇼기의 반상 위 승부가 더 잔혹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뺏긴 것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평정심을 잃기도 쉽기 마련이니까요.
영화 <파이널 피스>
<파이널 피스>는 갑자기 장기 판에 나타나 신인왕전을 휩쓴 천재 기사 케이스케(사카구치 켄타로)의 대국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족보도 정보도 없는 젊은 기사는 등장 2년 만에 일본 장기의 정점까지 단 한 발자국만을 남겨 놓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때 한 벌목장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되는데요. 현재 단 7점만 남은 명인의 장기말이 시신과 함께 묻힌 상태였습니다. 경찰이 장기말의 주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용의자로 지목된 건 케이스케였습니다. 오랜 세월 여러 번 주인을 바꿔 온 장기말의 마지막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선 범인을 밝히는 것도, 장기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도 스포츠도 도구에 불과합니다. <파이널 피스>가 집중하는 건 오로지 케이스케의 기구하면서도 일본 장기와 닮은 인생이죠. 그는 삶에서 세 명의 아버지를 만납니다. 첫 번째 아버지는 주정뱅이 케이이치(오토 타쿠마)입니다. 케이스케의 어머니가 죽고 아들을 홀로 길렀지만, 수틀리면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빼았습니다. 한겨울에도 홑겹 옷을 입고 신문을 돌리던 케이스케는 우연히 은퇴한 교사 카라사와(코히나타 후미요)의 집 앞에서 버려진 장기 잡지를 보게 됩니다. 단숨에 쇼기에 빠진 케이스케를 안쓰럽게 여기던 카라사와는 두 번째 아버지로서 아이를 보살핍니다.
케이스케는 카라사와의 도움으로 프로 장기 기사를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장기 협회 시험을 치르기 위해 유학하려는 찰나,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케이이치 탓에 고향에 눌러 앉은 채 고학을 하며 도쿄대에 진학하죠. 그러는 사이 카라사와는 소중히 간직하던 명인의 장기말을 케이스케에게 물려주며 프로가 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후에도 케이스케는 케이이치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무리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요. 어느 날, 케이스케는 내기 장기판에서 전설의 도박사 토묘(와타나베 켄)과 만납니다. 그는 케이스케에게 목숨을 건 장기를 알려 준 세 번째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케이이치와 마찬가지로 케이스케를 착취한 인물이기도 해요. 명인의 장기말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잠적해 버린 토묘 때문에 케이스케는 또 장기 대신 현실을 택해야 했습니다.
영화 <파이널 피스>
증권사 트레이더로 취직해 수 년을 일한 끝에 장기말을 되찾은 케이스케는 해바라기 농원에서 새 출발을 합니다. 해바라기는 케이스케가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기억하는 배경이에요. 그를 받아 준 농원의 가족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낸 것도 잠시, 케이이치와 토묘가 번갈아 찾아와 케이스케를 달달 볶습니다. 질긴 인연은 죽음 말고는 끊을 수 없을 것만 같죠. 거기다 자신의 인생 속 아버지가 세 명 뿐이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며, 케이스케는 승부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자각합니다.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는 듯한 그의 체념 뒤에는 삶의 빛이었던 장기판으로 얼굴을 돌리는 해바라기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한편 계속되는 수사 끝에 경찰은 케이스케를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 확신하고, 모두의 주목을 받는 큰 경기 직전 그를 체포하려 합니다.
언급했듯 <파이널 피스>에서 중요한 건 살인 사건도 장기도 아닙니다. 형사들의 추리도 오로지 케이스케의 서사를 따라가는 식입니다. 이 모든 설정과 전개에서 단박에 일본 고전 <모래그릇>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재능만으로 성공한다는 점, 그의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는 점, 주인공과 관련 있는 인물이 살해당한 사건을 이야기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이 동일합니니다. 용의자의 과거사를 추적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베테랑 형사와 신참 형사 콤비가 등장한다는 점도 마찬가지죠. '장기'야말로 이 기시감을 신선하게 바꿀 요소였지만 영화는 학대 당한 천재를 끌어올렸다가 주저 앉히는 것만을 목표로 둔 듯 보입니다.
영화 <파이널 피스>
<파이널 피스>의 모든 순간에 일본 작품 특유의 정서가 배어 있지만, 베테랑들의 연기 합이 주는 감동은 만국 공통입니다. 특히 에모토 아키라와 와타나베 켄이 반상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내기 바둑 장면은 압권입니다. 어마어마한 판돈을 건 노장들의 승부는 과장된 연기마저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의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영화는 27일 개봉합니다.
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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