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선 하나로 만든 완벽한 빛의 조각

간결한 디자인 속 반짝임, 다비데 그로피가 빛으로 써 내려간 사유의 조각.

프로필 by 권아름 2025.09.29

DAVIDE GROPPI

빛과 선, 기술과 예술, 덜어냄과 선택. 간결한 디자인 속에 저마다 반짝임을 불어넣는 창의적 발명가, 다비데 그로피가 빛으로 써 내려간 사유의 조각들.


낚싯대에서 착안한 조명 ‘삼페이(Sampei)’.

낚싯대에서 착안한 조명 ‘삼페이(Sampei)’.

스스로 디자이너라고 부르지 않는 것으로 안다

‘디자이너’라는 단어엔 어딘가 모호하고 정의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애매하고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말이기에 나를 설명할 때는 발명가, 이야기꾼 혹은 내레이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기계 제도사로 일했다고 들었다. 기술자에서 조명 내레이터로 전환하게 된 계기나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까

1985년, 스물두 살에 처음 조명을 디자인하고 만들기 시작했다. 나의 예술적 면모를 표현할 수 있는 일을 하길 원했고, 당시 ‘빛’이라는 주제에 매력을 느껴 작업실을 열었다. 하지만 처음엔 조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프리랜스 기계 디자이너 일을 병행했다. 그러다 1994년 막달레나 데 파도바(Maddalena De Padova)를 만나며 내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기회를 얻었고, 이후 로베르토 가바치(Roberto Gavazzi)와의 만남과 LED 기술의 등장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2014년에는 ‘눌라(Nulla)’와 ‘삼페이(Sampei)’ 조명으로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 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조명을 만드는 일이 내 직업이자 영혼과 예술성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내 인생 그 자체다.


 조명과 전선이 전자 회로를 연상케 하는 모듈형 조명 시스템 ‘엔드리스(Endless)’.

조명과 전선이 전자 회로를 연상케 하는 모듈형 조명 시스템 ‘엔드리스(Endless)’.

빛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나

조명의 미적 측면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더 끌린다. 빛은 살아 있는 듯한 매혹적인 재료로, 말없이 무언가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이 늘 인상 깊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포인트가 있는 조명을 좋아한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디테일을 비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그 디테일은 나에게 선택을 의미하고, 그 선택이 곧 우아함의 본질이다. 공간을 비춘다는 것은 곧 빛으로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공간 전체의 구성을 고려해 빛을 상상한다. 빛의 강약, 강조와 계층 그리고 향수처럼 보이지 않는 요소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국자 모양의 ‘포스트 프란디움(Post Prandium)’.

국자 모양의 ‘포스트 프란디움(Post Prandium)’.

한 인터뷰에서 조명 디자인의 핵심 요소로 단순함과 가벼움, 놀라움을 꼽았다. 이유는

빛은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단순한 형태를 통해 각자가 자신만의 해석을 끌어낼 수 있도록 일종의 ‘알파벳’ 같은 조명을 만들고 싶다. 의미와 기능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기호 같은 조명, 상형문자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오브제 말이다.


다비데 그로피의 작업에는 감성과 논리, 상징과 구조가 동시에 녹아 있다. 그런 복합적 태도는 어디에서 출발했나

나는 아이디어를 하나의 ‘선’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 선에는 구조와 감정, 기능과 은유가 동시에 깃들어 있다. 단순한 형태에 복합적 의미를 담는 일, 나에게 그것은 시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이다. 이런 감각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배운 ‘적은 것으로 잘 만드는 법’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미술과 문학, 연극, 음악 같은 예술 경험과 늘 새로운 해답을 찾아가는 수학 과정 또한 내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줬다.


일본의 전통 수제 종이로 달의 표면을 표현한 ‘문(Moon)’.

일본의 전통 수제 종이로 달의 표면을 표현한 ‘문(Moon)’.

수많은 조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피아첸차(Piacenza)에서 진행한 작은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회화 작품 ‘에체 호모(Ecce Homo)’에 조명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오래된 예술 작품에 인공 조명을 더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이 작업에서는 광원의 존재를 완전히 감추고 오직 빛만 남기는 데 성공했다. 마치 작은 마법이 일어나는 듯한 순간이었다.


동명의 조명 브랜드를 설립한 다비데 그로피.

동명의 조명 브랜드를 설립한 다비데 그로피.

언젠가 꼭 만들어보고 싶은 빛의 시나리오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빛’. 빛의 원천은 보이지 않지만, 완전한 투명함 속에서 빛만 남는 조명을 만들어보고 싶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이지현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