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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로맨스 장인 박해준의 명대사X명장면 5

또래 배우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로맨스 존재감을 지닌 배우 박해준.

프로필 by 라효진 2025.08.13

'꽃중년'이라는 수식어는 아무나 가질 수 없죠. 특히 주연이 아닌 청년 시절을 보내던 배우가 중년이 되어 로맨스 주연으로 사랑받기는 더더욱. 그 어려운 걸 박해준은 어렵지 않게 해냅니다. 한때는 거칠고 위험한 눈빛의 악역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배우였습니다. 폭력의 그림자, 질투와 위계의 상징, 염세적이고 피로한 남자의 얼굴을 하던 그가 이제는 중년 로맨스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어요. tvN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그 시절 엄마의 첫사랑 역할로 몽글몽글한 애정 전선을 보여주는데요. 언제부터 이렇게 로맨틱 했을까요? 그의 로맨스 연기 서사를 돌아봅니다.


<순정>(2016)

1991년을 배경으로 한 청춘 멜로 영화 <순정>에서 박해준은 극 중 '산돌'의 성인 역을 맡았습니다. <순정>은 라디오 생방송 도중 DJ에게 도착한 23년 전 과거에서 온 편지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애틋한 첫사랑과 다섯 친구들의 우정을 그린 감성 드라마입니다. '산돌'은 '수옥'을 짝사랑하지만 친구의 사랑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표현은 서툴지만 속 깊은 인물로, 본격적인 러브 라인은 없지만 박해준 로맨스의 초석이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첫사랑에게서 온 라디오 사연을 듣다가 그는 그 시절 그녀가 좋아했던 테이프를 들고 방송국으로 뛰어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첫사랑이자 자신의 친구에게 고백하죠. “수옥이가 너 주려고 만들어 뒀던 건데.”

명대사 “마지막 곡을 못 정했을 것 같아가지고.”


<유열의 음악앨범> (2019)

정해인과 김고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그려진 <유열의 음악앨범>. 이 영화에서 박해준은 아마도 말끔하고 여유로운 이성상을 처음으로 제대로 표출해냅니다. 미수(김고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출판사 대표 종우 역으로 등장해요.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미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해주고 싶은 유쾌하면서도 든든한 캐릭터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출판사 대표의 여유로움은 물론, 편안한 상사부터 흑기사의 면모까지 갖춘 그에게 빠지지 않기란 어렵겠죠. 많은 말을 하진 않지만 성숙한 감정선과 고백보다 이해가 먼저인 어른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점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극 중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죠. 종우라는 인물은 사랑을 얻기보다 상대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 말없이 배려하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는 오히려 더 진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명대사 “목숨 걸고 기뻐해 봐. 목숨 걸고.” “미수씨 어렸을 대 어땠어? 그때도 예뻤나?”


<부부의 세계> (2020)

박해준의 이름이 로맨스 계보에 확실한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은 단연 <부부의 세계>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 ‘이태오’ 역을 맡아 단순한 빌런이 아닌 사랑과 집착, 죄책감 사이에서 무너지는 남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그려냈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수트핏을 자랑하고 있지만,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남자. 이태오식 로맨스는 단정하지 않고 복잡했고, 그 복잡함이야말로 박해준이 가진 연기의 무기라는 걸 입증한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 하던 그의 사랑은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되는데요. ‘내로남불’ 불륜남 캐릭터에 시청자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어떤 부분에선 연민을 주는 입체성을 보여줬어요. 박해준은 이 복합적인 감정을 끓는 듯이 차분하게, 절제된 폭발로 그려냈죠. <부부의 세계> 이후 그는 더 이상 신스틸러가 아니라 감정의 스펙트럼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그가 연기하는 사랑은 더 이상 ‘설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른의 감정이 되었습니다.

명대사 “넌 나이들수록 예뻐”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내가 미치겠는 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거야.”


<폭싹 속았수다> (2024)

박해준이 <폭싹 속았수다>에서 연기한 양관식은 우리네 딸 바보 아빠, 아내 바라기 남편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죠. 어릴 땐 그저 무뚝뚝한 바보인 줄 알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게 다 사랑이었다는 걸, 박해준은 찌르르한 감정으로 보여줍니다. 애순이 힘들 땐 그늘이 되어주고, 멀어질 땐 묵묵히 기다리며 온 생을 걸어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남자. 격하게 표현하지도, 달콤한 말을 술술 하지도 않는데 보는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죠. 젊은 날 치열했던 삶을 지나 무르익은 애순과 관식의 사랑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찬란하고 아련했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남은 이들만 생각하는 사랑꾼 눈빛은 내내 “이렇게까지 울려야겠니?” 라는 말을 하게 만듭니다. 사랑이란 것이 꼭 요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수 틀리면 빠꾸”할 안식처가 되어주면 된다는 걸 증명했죠.

명대사 “아빠가 덜 자면 너희가 더 잘까 싶어서” “수 틀리면 빠꾸”


tvN <첫, 사랑을 위하여> (2025)

그리고 마침내 박해준은 드라마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설레는 ‘첫사랑 오빠’의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염정아와 함께 ‘중년의 첫사랑 서사’와 가족애의 따뜻함을 그릴 예정이죠. 박해준이 연기한 ‘류정석’은 국제 건축상 수상까지 한 유명 건축설계사로, 청해에서 류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돌싱으로 아들 보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한눈에 보면 반할 거 같은 미중년의 멋진 외모와는 달리 톡톡 튀는 까칠한 성격과 팩폭 중심의 입담을 가졌죠. 평범한 그의 일상에 갑자기 나타난 ‘이지안’역의 염정아는 첫사랑이랍시고 정석을 쫓아다녔던 순정녀였죠. 2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요란하고 애잔한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에 정석도 자기 안에 있던 여전히 따뜻한 소년의 마음이 깨어납니다. 서글픈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아름답게 시작되는 마음. 4회까지 공개되어 이제 막 둘 사이의 케미가 시작되는 상황인데요. 돌싱 중년의 사랑도 이렇게 풋풋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호응을 얻고 있어요. 확신의 로맨스 남주로의 방점을 찍을지 지켜봐도 좋겠죠?

명대사 “제가 뭐 아무한테나 말 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redit

  • 글 이다영
  • 사진 tvN · JTBC · 넷플릭스 · 영화 <순정> 및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컷
  • 영상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