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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고 글 쓰는 의사의 하루
프랑스 요리학교를 졸업한 가정의학과 의사 이재호. 그는 오늘도 한 겹의 삶을 덧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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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학과 의사. 프랑스 요리학교를 졸업했으며,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썼다. 이재호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 혜윤이가 나에게 ‘다능인’이라며 인터뷰를 부탁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응했는데, 그게 ‘사이드(SIDE)’라는 커뮤니티에 실려 ‘사이드 프로젝트’의 표본처럼 비쳐졌다. 사이드 프로젝트. 정확한 뜻을 몰라 네이버에 검색해 봤다. ‘본업을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지속적으로 나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란다. 내가 과연 여기에 합당한 존재인가,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수련받은 의사. 어, 맞아. 누가 뭐라 해도 내 본업은 의사지. 프랑스 요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미슐랭 가이드>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일한 요리사. 그렇지, 지금은 비록 집밥만 만들고 있지만 분명 요리사라고. 세 권의 책을 내고 여러 매체에 인터뷰도 실리고 라디오 출연도 한 작가. 그래, 이 정도면 감히 작가로 불러도 손색없겠어. 그래서 나는 직업을 ‘의사, 요리사, 작가’로 정의하기로 했다.
사실 이 글의 탐구 주제는 ‘어쩌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건데’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는 곧잘 했는데 몸은 비리비리했다. 전형적인 ‘범생이’의 스테레오타입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 놀다가 건담을 조립하는데 할머니가 “재환이(사촌 형)는 손재주가 좋아서 이런 거 금방금방 잘하던데, 너는 공부만 해서 이런 거는 잘할 줄 모르는구나!”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손주에게 할머니가 할 말인지 아리송하지만, 분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조립에 서툰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대학 진학 후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본업에서 머리를 쓰기에 부업은 손이나 몸으로 하는 일이 좋았다.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고, 빵집에서 빵을 썰고, 카페에서 커피를 뽑았다. 물론 내 한계는 분명히 안다. 할머니가 어릴 적 이미 눈치채셨듯 나는 손이 야무진 편은 아니다. 오히려 어설프다. 이는 분명 내가 잘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잘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에게도 한 가지 재능이랄 게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것에 온전히 몰입해 성취해낸다는 것이다.
스무 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렇게 말하니 아저씨 같다)에 처음 아르바이트한 곳이 ‘민토(민들레영토)’였는데, 당시 민토는 지점이 서울 전역에 있었으며 직원도 많고 알바생은 더 많은 중견 기업 같은 곳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17:1의 공개 오디션을 거쳐 채용됐다. 그렇게 들어간 민토에서도 일반 알바와 달리 바리스타는 특별한 존재였다. 장기 근속하며 회사에 이익이 될 것이 분명한 이들을 본사에서 추가 교육해 회사에 더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커피 머신을 독점적으로 다뤘으므로 창고 정리 같은 잡일은 나 같은 평범한 알바생들이 도맡았다. ‘쓸모가 있으려면 진입 장벽이 있는 일을 할 줄 알아야 하는구나.’ 그 진입 장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쉽게 대체될 확률이 줄어들겠구나. 군대에서 하는 행군은 얼핏 보면 그냥 걷기만 하면 되니 훈련 중 가장 쉬운 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해본 이들은 안다. 처음엔 호기롭게 걷고 수다스럽게 떠들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지치고 끝이 아득한지. 하지만 발끝만 바라보며 묵묵히 한 발짝 한 발짝 쉬지 않고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 도달한다. 그러고 나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렇듯 인생에서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중이다. 아직 미완이라 이 그림이 어떻게 완성될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하면서 그 끝을 보는 일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새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존재가 돼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나를 한 겹 더 덧대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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