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년이를 위한 변명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예뻐도 너무 예뻤다. <추노>의 언년이 혹은 혜원이 말이다. 누군가는 지적한다. 사극에 출연하면서 현대적인 색조 화장이 웬 말이냐고. 왜 이러시나. 언년이는 뷰티계의 멘토다. :: 칼럼,뷰티,여성,아름다운,여성스런,엘르,엣진,elle.co.kr :: | :: 칼럼,뷰티,여성,아름다운,여성스런

얼마 전 큰 결심을 했다. 여자가 되기로 한 거다. 진짜 여자 말이다. 나긋나긋 상냥하고, 보들보들한 옷만 입고, 고운 말만 하고, 좋은 냄새를 풍기고, 3차까지 가는 끝장 회식 다음날에도 메이크업은 하는 그런 여자 말이다. 싱글인 채로 30대 중반을 맞자 위기감에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저 여자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천생 여자’라는 소리 한 번은 듣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리하여 날밤 꼬박 새우는 마감 기간 동안 나흘 연속 메이크업을 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게 끝이었다. 다시 의 대길이 흉터처럼 눈썹을 가로지르는 베개 자국을 그대로 드러낸 채 미팅에 나가면서 깨달았다. 만일 남동생이 있다면 매일매일 풀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가르칠 거다. 그런 여자는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날 밤, 언년이를 보았다. TV 속 그녀는 예사 한복 치마보다 옷감을 세 폭은 더 썼을 법한 풍성한 치마를 입고, 곱게 애교머리를 내리고, 문신인가 싶은 선명한 아이라인, 뷰러로 말아올린 속눈썹, 펄이 함유된 핑크색 립글로스를 바르고 도망다니는 중이었다. 그것도 산으로, 들로, 절벽으로. 그래, 저 정도는 돼야 천생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 대길과 태하가 여자 보는 눈이 있다. 자객들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매일 옷을 빨아서 다려 입고, 목욕하고, 메이크업까지 할 수 있는 여자라면 역모 따위는 애들 장난인 거다. 언년이는 진정 모든 여자들의 롤모델, 멘토가 될 자격이 있다. 당대의 패셔니스타 언년이를 두고 고증이 어쩌고 리얼리티가 저쩌고 하는 무리들도 있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그럼 하루 세 시간씩 웨이트트레이닝 하고 닭가슴살만 먹으면서 만든 것 같은 장혁과 오지호의 근육은 리얼합니까? 황철웅이 제주도에서 칼 한 자루로 관군 수십 명을 떼죽음시킨 건 또 뭐 그리 리얼합니까! 초복이도 리얼한가? 얼굴에 노비 낙인을 찍고, 꾀죄죄한 얼굴에 단벌 의상만 입고 다니는 그녀 말이다. 아무리 노비라지만 냇가에서 물 긷는 게 일상인데 어쩜 그리 세수 한 번 안 하고 사는지. 리얼해 보이는 그녀의 단벌 의상은 과연 리얼한가? 캡션체로 말하면 ‘옅은 그레이 풀 스커트와 피치 컬러 오리엔탈 재킷, 톤다운된 에머랄드 빛 옷고름’까지 드리스 반 노튼이 울고 갈 색감이다. 소재도, 워싱도 훌륭해서 깨끗이 빨기만 하면 홍대 앞 빈티지 숍에 갖다놓고 한 세트에 10만 원에 팔아도 되지 싶다. 요는 고증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거다. 인조시대의 언년이가 어그 부츠에 모피코트를 입은 채 행글라이더를 타고 도망다닌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이럴려고 ‘퓨전 사극’이란 용어가 생겨난 건데. 하지만 세상엔 관대한 시청자만 있는 게 아니라서 배우 이다해가 꽤 욕을 먹는 모양이다. 급기야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해명을 하기에 이른다. “정말 억울해요. 어느 연기자가 사극에서 매니큐어를 바르겠어요. 말도 안 되죠. 아무것도 안 발랐다고 하면 투명 매니큐어 발랐겠지 하는데 정말 맨손이에요. 조명에 유난히 반짝이는 손톱이 문제라면 문제죠.”(일간스포츠) 아뿔사, 안 되는 거였나? 언년이의 분장이 아예 현실성을 배제한 채 이뤄진 건 아니라는 놀라운 반전. 배신감에 잠겨 다시 언년이를 관찰한다. 매니큐어는 안 된다면서 그 선명한 아이라인과 번진 아이섀도는 괜찮나? 풍성하게 컬이 진 속눈썹은? 펄 들어간 핑크색 립글로스는? 백설기 피부와 샤방샤방 볼 터치는? 그냥 조명에 유난히 검어 보이는 아이라인과 조명에 유난히 컬이 져 보이는 속눈썹과 조명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천연 입술색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이런 걸로 배우를 비난하기엔 언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진 속성을 무시할 수 없다. 는 철저히 남자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대길이나 송태하의 추억담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아련한 정서와 과장된 묘사가 공존한다. 다 큰 남자들의 첫사랑 회고담에선 리얼리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경우가 많다. 왜 그들이 사는 동네엔 극단적으로 청순한 교회 누나들과 육감적인 분식점 아줌마들이 그리도 많은 건지. 이건 학교 옥상에서 벌어지는 17:1 혈투나,군대 시절 DMZ에서 지뢰 밟은 북한군을 도와준 사연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무용담이다. 언년이는 대길과 태하의 추억 속 교회 누나 혹은 분식점 아줌마다. 한양에서 제주까지 도보 트레일을 하고, 걸핏 하면 노숙을 해도 그들 기억 속 언년은 늘 천사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리얼리티를 따질 수 없는 캐릭터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청자는 관대하지 않다. 그들이 바라는 건 현실적 진실이 아니라 극적 진실이다. 시대 배경과 상관없이 방영 당시 유행하는 색조 화장을 하고 나오는 건 우리나라 사극 여주인공들의 전통이다. 그런데 ‘개념 배우’들이 많아진 건지 그저 ‘쌩얼’ 열풍 덕인지 요즘은 사극에서도 내추럴한 메이크업이 대세다. 안 하진 않는다. HD시대 아닌가. 의 한고은도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발랐고, 의 한혜진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격찬받은 의 고현정도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는 했다. 어디 메이크업뿐인가. 영화 이후 한복이 또 하나의 눈요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데다 여러 장르나 스타일을 배합한 퓨전 사극이 유행하면서 고증에 대한 강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에서 비담이 입고 나온 블랙 앤 화이트 실크 가운이나 미실이 죽을 때 입은 수천만 원짜리 비즈 드레스는 박물관에서 본 신라 복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의 이미연은 무려 레이어드 룩을 선보인다. 저고리 소매를 반팔로 자르고 그 아래 받쳐입은 긴 소매가 드러나게 한 것이다. 방송국 분장실에서 막 꺼내온 듯한 너덜너덜한 의상을 입고 왕후장상인 척하던 시대는 갔다. 저마다 고급 맞춤 한복 브랜드나 디자이너들과 손잡고 누가 더 기발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보여주나 경쟁한다. 에서 개화기 부잣집 딸로 나오는 한혜진은 양복지로 만든 장옷이나 나비 문양이 프린트(자수가 아니라!)된 스커트를 입는가 하면 한복에 헬렌 카민스키 스타일의 밀짚모자를 매치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은 토를 달지 않는다. 일단 예쁘니까. 하지만 관대함은 딱 거기까지다. 의 석란이 남장을 하고 의생 시험을 보러 갈 땐 언년이가 남장하고 도망 다닐 때처럼 허술하지 않았다. 동그란 안경에 콧수염을 달고 갓을 쓴 그녀는 누가 봐도 똘똘한 꼬마 도련님이었다. 언년이는 뱅 헤어를 고데기로 곱게 마는가 하면, 귀엣머리를 내놓고, 여전히 샤방샤방 메이크업을 한 채 남장이라고 우겨댔다. 물론 그래서 여자인 걸 눈치챈 남자들에게 겁탈당할 뻔한다는 설정이 있다. 아무래도 이건 언년이의 관찰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보여주기 위해 집어넣은 스토리 같다. 첫 회, 최고급 비단 옷을 입고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의 김만덕은 파리해 보일 정도로 화장기 없는 얼굴이다. 의상은 눈요기를 위해 남겨두되 메이크업만은 설정에 맞추려 노력한 것이다. 의 천명공주가 산속을 헤매다 화살에 맞아 죽을 때 그녀는 언년이만큼 깨끗한 차림새에 주렁주렁 장신구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예진은 이다해만큼 욕을 먹진 않았다. 공주니까. 적어도, 반짝이 핑크 립글로스와 갈색 아이섀도는 바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게 극적 진실이다. 제작진은 이다해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에나 나올 법한 가슴 노출 신만 해도 그렇다. 여자들에겐 장혁과 오지호의 초콜릿 복근을 선물했으니 남자들에겐 이다해의 가슴을 선물로 보여주겠다는 굳센 다짐이 느껴졌던 그 장면 말이다. 물론 노출 정도로만 따지면 사극의 고정 레퍼토리가 된 여배우의 반신욕 장면이나 시상식 드레스보다 수수한 수준이다. 이번 경우, 문제는 강간미수 장면이었다는 데 있다. 즐거운 러브 신이면 몰라도 강간 장면에서 가슴 노출이라니, 시청자들은 그녀의 가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범이 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언년이는 예사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 ‘남자들의 판타지’이므로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안녕하세요? 에서 잔 근육과 절권도를 맡고 있는 장혁이에요!” “안녕하세요? 에서 민폐와 노출을 맡고 있는 이다해예요!” 가뜩이나 언년이 캐릭터도 밉상인데 이런 일들까지 겹치면서 이다해로선 힘겨울 법한 반응들이 계속 쏟아졌다. 그러니 제작진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면 좋겠다. 이다해의 팬이자 언년이를 멘토로 섬기는 입장에서 하는 부탁이다. 실은 언년이가 도망 다니면서도 새벽마다 송태하보다 일찍 일어나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숯으로 아이라인을 그리고, 입술에 갈치 비늘까지 바른 뒤 다시 잠든 척한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게 시청자가 원하는 극적 진실을 확보하고, 밉상으로 전락해버린 언년이 캐릭터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거야 말로 미모는 재능으로 치지 않는 까다로운 여성 시청자들에게 좌대길 우태하 정도 거느리려면 그 정도 피 나는 노력은 해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안겨주는 동시에 앞으로 사극에 출연할 여배우들의 부담도 덜어주는 훈훈한 결말 아닌가?*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