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아티스틱 디렉터 '줄리 드리브랑'

모두가 선망하는 파워 하우스를 거쳐 소니아 리키엘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안착한 줄리 드 리브랑(Julie de Libran). 꿈이 꿈틀거리던 어린 시절부터 전설적인 패션 거장들과 함께 한 빅 모멘트까지, 커리어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개의 모멘트를 되짚었다.

프로필 by ELLE 2015.06.01



8세 때,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근처의 베르네그(Vernegues)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80년대 초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국인이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의 이민생활이 쉽진 않았지만 그 시절의 내 적응력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덕분에 지금도 난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는 돋보이기보다 자연스럽게 묻혀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프랑스의 모든 패션 잡지를 구독하고 이브 생 로랑, 겐조, 소니아 리키엘 등의 옷을 프랑스에서 공수했다. 자연스럽게 나도 좀 더 자신을 돋보이는 방식을 즐기고, 내 안의 프렌치 헤리티지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내 스타일을 찾아갔다.
미국의 패션과 문화에서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배웠다 나도 10년 동안은 제법 완벽한 캘리포니아 사람이었으니까.
밀란 패션 스쿨을 추천한 사람은 아버지 롤랑(Rolland)이었다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유기농 와인을 만들 당시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줬고 지금도 그렇다. 
밀란 유학은 또 다른 모험이었다 18세에 밀란의 마랑고니 패션 스쿨(Marangoni Fashion School)에 입학했는데, 언어에서 건축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것이 매혹적이었다. 이탤리언은 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10년 넘게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절친 대부분이 이탤리언이다.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가 수장으로 있던 크리스챤 디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페레는 디자인부터 재단까지 모든 것을 손수 했는데 운 좋게도 바로 그 옆에서 몇 시간이고 피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내게 디올은 페레 선생님이 있는 패션 스쿨과 같았다.
페레를 떠나 파리의상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Haute Couture)에서 쿠튀르 레벨의 패턴 디자인을 공부했다 동시에 장 샤를르 드 카스텔바작과 일하면서 그의 여성복 컬렉션을 도왔는데, 1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접근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카스텔바작이 기숙학교 시절에 사용하던 담요로 코트를 만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패션 전설 지아니니 베르사체와 만났다 밀란의 비아 제수(Vis Gesu?) 거리에 있는 베르사체의 자택 위층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인 아틀리에가 있다. 베르사체는 보디컨셔스 실루엣에 집착했기 때문에 장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제2의 피부’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했다. 어떤 때는 종일 메탈 메시와 펜치를 들고 씨름하기도 했다. 지아니니는 매우 강하고 본능적인 혜안이 있었다. 그가 최종 결정을 내리려면 광목으로 만든 샘플조차 완벽해야 했다. 피팅은 빠르게 이뤄졌는데, 이는 그의 결정이 늘 즉각적이었기에 가능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베르사체가 세상을 떠난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베르사체는 그의 마이애미 비치 하우스에서 살해당했다) 1997년 7월,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직후 그는 마이애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나는 클라이언트의 피팅을 도운 후 아틀리에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어시스턴트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식을 접한 우리는 큰 충격에 빠졌다.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미우치아 프라다가 여성복 헤드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했다 1998년, 미우치아와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 미우치아의 남편이자 프라다의 CEO)는 그들의 컬렉션에 좀 더 페미닌한 터치를 더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일하는 건 내 꿈이었기에 헤드 디자이너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전 세계 여성을 생각하며 디자인하는 프라다에서의 작업은 새롭고 흥미로웠는데, 시장과 체형,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패브릭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피팅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디자인을 바꾸면 '와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을 정도의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그들과 10년 반을 보냈는데, 지금도 나에겐 최고의 멘토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프라다를 떠났다 2005년, 스테판(Ste′phane)과 결혼 후,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한동안 프라다 사무실이 있는 밀란과 가족들이 있는 파리를 오가며 지냈다. 컬렉션 제작을 위해 한 달에 15일은 미우치아와 함께 지냈고. 아이가 너무 어린 시기라 결국 파리에서 일하기로 결심했고, 바로 그 시점에 마크 제이콥스를 만났다.
마크는 루이 비통의 스튜디오 디렉터를 찾고 있었다(줄리는 루이 비통 여성 라인의 스튜디오 디렉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했다) 그를 만나러 가다가 소피아 코폴라를 마주쳤을 땐 마치 신의 계시 같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크는 스마트하고 재치가 넘치며 재빨랐다. 게다가 우리는 공감대가 많았다. 당시 마크는 멋진 쇼를 선보였지만, 디자인 면에서 아직 완전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고 싶게 만드는 옷이라기보다 전체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두었기에 입을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하는 게 내게 주어진 과제였다.
마크에게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실루엣이 아닌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것에서 시작해 전혀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곤 했다. 백과 슈즈 디자인에서 광고를 위한 포토그래퍼 선정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작업이었다. 루이 비통의 지원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패브릭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마크는 너그러운 사람이다. 그는 내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크루즈와 프리-폴 컬렉션, 클래식한 아이콘 라인을 직접 디자인했다).
디자인과 관련된 모든 결정을 내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보람을 느낀다(줄리는 2014년, 소니아 리키엘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부임했다) 소니아 리키엘은 40년 동안 명확한 스타일과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지금까지 이런 업적을 이룬 브랜드는 거의 없다. 그녀는 언제나 내 작업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소니아 리키엘은 2009년, 84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소니아 리키엘이 하던 일을 이어가면서 그녀 인생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70년대의 소니아 리키엘처럼 파리의 센 강 왼편에 있는 생 제르맹에 살고 있다. 사무실까지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성실하게 오늘을 사는 여자들을 위한 옷을 만든다. 입었을 때 행복해지는 옷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패션은 내게 음악과 같다 행복했던 인생의 순간을 상기시키는 옷이 있다. 모든 옷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옷은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
패션계에서 일하려면 오픈 마인드가 필수다 한 가지에 머물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무실을 떠나 예술과 문화를 접하고 여행을 떠나라. 한마디로 진짜 인생을 살아라! 세상을 보지 않으면 개념적인 것에 빠질 수 있다.
개인적인 패션 스타일은 애쓰지 않은 듯, 시크하면서도 살짝 의외의 요소가 더해진 스타일이다 즐거운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가족을 돌보면서 패션계에서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은 멈출 수 없고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일단 일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일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결정을 내리는 일은 참 어렵다. 그야말로 매일이 곡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라.


Credit

  • editor 주가은 writer Rebecca Lowthorpe photo ENHORNING LOUISE
  • IMAXtree.com(컬렉션) translator 백지원 design 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