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연재 전에 SNS를 통해 대단한 각오를 남겼다 늘 그렇다. 각오는 항상 대단해(웃음)! 자신감일까, 긴장감일까 긴장감이지. 사실 다른 작가들은 전혀 무섭지 않은데 독자들은 늘 무서워. 혹자는 창작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난 아니야. 독자랑 싸우는 거지. 독자를 재미있게 만들어서 굴복시켜야 돼. 독자가 재미없게 느끼면 지는 거야. 그러니 늘 긴장되지.
 
전작들을 ‘순정만화’와 ‘미스터리심리썰렁물’로 구분했다. 그런데 <무빙>은 ‘액션만화’라고 했더라 전반부는 순정물 같지만 후반은 아니고, 미스터리물도 아니고, 대신 후반부에 액션이 조금 나와서 액션만화라고 했는데 약간 후회하고 있다(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별거 안 해. 아니, 못해(웃음). 그러다가 막판에 빵 터트리고 끝날 거야. 전체 분량의 4분의 3 정도가 지나야 액션이 나온다. 아마 욕 좀 먹겠지(웃음).
 
그런데 왜 제목은 <무빙>일까 만약 제목이 <액션>이었다면 비행 능력이 대단하고 큰일을 해내는 히어로가 필요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씩 움직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 캐릭터도, 이야기도. 사실 제목을 붙일 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야(웃음). 어쨌든 하늘을 나는 히어로물을 하고 싶었는데 한국의 현실에서 그럴듯한 히어로물을 해보고 싶었지. 아이언맨 같은 히어로는 미국에선 그럴듯해 보여도 한국에선 능력이 과해 보이잖아. 그리고 시간 능력자들이 등장했던 <타이밍>과 어감도 비슷해서 좋고.
 
그렇다면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만큼 히어로를 이야기하기 좋은 환경도 없다. 지금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분단 국가에 초능력자가 있다면 남한이든, 북한이든 얼마나 많은 관심이 생기겠어. 실제로 탐사전문기자인 주진우로부터 들었는데 우리나라 안기부에서도 첩보전에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에 관심이 있었대.
 
정재승 박사에게도 자문을 구했다던데 뇌과학자니까 초능력에 대해 물어봤지. 재승이 형이 카이스트에 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의 문의가 많이 왔대. 실제로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실험도 해봤는데 결론은 초능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왜 초능력 중에서도 하늘을 나는 능력일까 하늘을 나는 게 매력적이니까.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사람도 많잖아.
 
최근작으로 올수록 비현실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상이다. ‘순정만화’인 <당신의 모든 순간>이나 <마녀>조차 좀비나 오컬트라는 장르적 세계관에 담아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뻥을 치고 싶어진다. 만화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말이야. 현실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귀신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뻥 치기 좋아서다. 무슨 말을 해도 ‘구라’니까 창작할 여지가 많거든.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마블의 초능력자들도 말이 안 되잖아. 거미인간이라니, 완전 ‘개뻥’이지(웃음). 하지만 이야기가 그럴듯하니 재미있잖아. 나도 그런 만화를 해보고 싶었다. 허황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는 게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하니까.
 
<26년> 이전엔 작품마다 연재 간격이 2개월 정도였는데 <26년>부터 반년으로 벌어졌고, 이젠 1년에 한 작품 수준이다. 지난해엔 아예 연재가 없었고 이야기를 쓰는 데 들어가는 공이 점점 커지는 탓이다. 사실 <26년> 이전의 작품들을 연재할 때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그만큼 공을 들였을 거다. 하지만 그땐 연재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니까 차기 연재를 빠르게 가져가야 했다. 지금은 그때보단 여유가 생겨 작품을 다듬을 시간이 있지. 그런데 1년 넘게 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전 작업 기간이 늘어났다는 건 작품에 대한 욕심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독자들이 남기는 댓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지루해졌다는 댓글이 몇 백 개 달리면 뒤에 있는 클라이맥스를 앞으로 끌어오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다 구조가 어그러져서 작품을 말아먹는 작가들도 있다. 그러니까 연재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믿고 이야기를 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만화가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니까 이야기까지 밀리면 안 된다. 이야기가 내 무기라 생각하니 그에 들이는 공이 커지는 거다. 대사 하나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을 때 연재에 들어간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진 않나 보다 몇 년 전만 해도 콤플렉스였다.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릴까. 그런데 그림과 만화는 다른 영역이란 걸 알게 됐다.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봤을 때 내 그림이 약한 건 사실인데 만화는 잘 그린다. 내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콤플렉스가 없어졌다.
 
이야기가 자신의 무기라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캐릭터 아닐까. 대부분의 작품이 캐릭터에 애정을 품게 만드는 덕분에 캐릭터의 행동이 독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작품이 지루해지는 거다. 캐릭터 소개가 굉장히 길잖아. <무빙>도 6화까지 왔는데 아직 캐릭터 소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진행된 사건이랄 게 거의 없잖아. 하지만 이 과정이 내 작품의 궁극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이야기의 성패는 독자들이 주인공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에 달려 있다. 독자들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를 마련해야 한다. 활자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캐릭터라고 소개하는 것보단 우유부단해 보이는 사연과 소극적으로 보이는 사연을 하나씩 보여주는 게 맞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공감대를 열어주거든. 캐릭터를 최대한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엔 이야기에 힘이 붙는다. 결국 이야기가 완결됐을 때를 보고 가야 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이야기를 준비해서 진행해야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두 커플 이상의 중심인물이 등장해서 얽히고설키며 이야기가 굴러간다 <프렌즈>란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여섯 인물이 등장하잖아. 40분 남짓한 시트콤에서 두 커플씩 엮어서 세 가지 사건을 진행한다.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 내 작품에 다양한 커플이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전략이다. 미약한 존재들이 협력해서 거대한 선을 이루는 이야기가 좋다.
 
전작들과 달리 <무빙>은 봉석이와 희수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되는 인상이다 후반부에 봉석이네 부모님과 희수네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다. 그러니까 결국 세 커플의 이야기가 되겠지. 전후반을 책임지는 캐릭터를 나눈 건 처음이다.
 
죽음이 극적 감정을 자아내는 주요한 매개로 활용된 작품이 많다. 죽음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다 김중혁 소설가도 비슷한 질문을 하더라. 조금 없어 보이는 대답인데, 이야기를 쓰다가 꽉 막힐 땐 의미 있는 인물 하나를 죽이면 뚫린다(웃음). 주변 인물들이 그 구멍을 메우려고 노력하면서 이야기가 살아나.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거 같아. 아버지가 목사님이라서 가끔씩 돌아가신 신도의 장례식장에 따라가는 일이 종종 생겼거든. 그땐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드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서 알았지. 긴긴밤을 보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죽음만큼 극단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사건도 없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 삶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고립의 정서가 느껴진다. 물리적인 고립이든, 정서적인 고립이든 결국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 외로움에 귀 기울여 주거나 손을 내미는 이들의 등장을 통해 짠하게 심금을 울리는 방식이 일관되게 이어진다 유난히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나오잖아. 어릴 때 집이 가난했거든. 그래서 외로워지더라.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 희한하게 고2 때부터 돈을 가지고 놀더라. 친구 집에서 모이거나 농구를 하는 게 아니라 커피숍이나 피자집, 콜라텍에서. 그런데 나는 용돈도 없고, 버스 회수권만 들고 다녔다. 너무 가난했거든. 그런데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잖아. 불편하더라. 그래서 점점 내가 애들을 밀어내게 됐다. 나를 배려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그땐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고. 그래도 학교에선 애들이랑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방과 후엔 혼자 도서관에 갔지.
 
놀 수 없으니 도서관에서 공부한 건가 중2 때부터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재미를 알았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고 특히 야한 이야기를 좋아했다(웃음). 김성종 작가의 <여명의 눈동자> 원작은 엄청 야하다. 여옥이가 장난 아냐(웃음)! 그리고 추리소설 중엔 여자가 벌거벗고 죽은 채로 시작되는 작품이 많다. 대중적인 추리소설이나 통속소설, 무협소설을 좋아했는데 김용의 <영웅문>을 읽고 감명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역사소설로 넘어가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게 도서관 책장 하나를 다 읽었다고 뿌듯해했으니까 얼마나 공부를 안 했겠어?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때 내가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을 거다(웃음). 그래도 그런 환경에서 바르게 엇나간 셈이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