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소울이 담긴 크리에이터 오준식의 집

누가 뭐라든 집은 나만의 공간이다. 내가 쓰고 내가 디자인한다. 나의 소울을 녹여 넣는다. 작은 공간, 작은 가구 하나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담아내는 크리에이터 오준식의 내 집, 그리고 그가 도심 속에서 알아가는 서울의 이면.

프로필 by ELLE 2013.12.26

 

계단을 올라 2층 ‘남산 타워 테라스’의 문을 열면 중구의 도심 속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이 복층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엔 박공지붕이 솟아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의 스펙트럼은 휴식의 영감이 된다.


 

 

 

주방 창문을 통해 본 한가로운 거실로  나직한 오후의 햇살이 들이친다. 취향으로 고른 디자이너 브랜드 가구와 어머니가 쓰던 오래된 테이블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오준식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동시에 서로가 마주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삶의 공간에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크리에이터 오준식의 포트레이트.

 

 

 

 

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만나는 첫 번째 거실. 가구 배치는 옛집 그대로, 공간의 크기는 예전에 살던 파리의 작은 아파트와 같아서 방 이름을 세르주 갱스부르가 살던 파리의 거리에서 따왔다. 이름하여 ‘생크 비 휘 드 베르누이(5 bis Rue de Verneuil)’. 직접 디자인한 ‘하트 소파’가 이곳에 놓여 있다.

 

 

 

 

아모레퍼시픽 디자인 랩을 이끌고 있는 오준식의 침실엔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커리어 플랜이 녹아 있다. 넓은 파우더 스페이스와 벽걸이 선반을 설치한 건 다양한 브랜드의 화장품을 직접 체험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기 위한 준비 과정. 어쩌면 이곳은 미래를 디자인하는 스케치북이기도 하다. 

 

 

 

 

남들에겐 단순한 거실 서재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은 디자이너 오준식의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는 공간이다. 디터 람스 책장에서 생명력을 발하고 있는 책들은 그가 20년간 고민해 온 디자인의 흔적이다.

 

 

 

 

2층 복도는 ‘남산 타워 테라스’로 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1층 서재에 정리된 책이 ‘깊게 생각하는 것들’이라면 2층 복도에 놓인 건 ‘가볍게 보는 책들’. 계단 벽을 이어 유리 테이블을 설치한 곳에 오준식이 지난해 인간문화재와 함께 작업한 ‘용상’을 비롯한 가구 미니어처들이 장식돼 있다.

 

 

 

 

1 해질녘의 남산 타워 테라스.

 

2 주방 창틀에 놓인 미니어처 자동차.

 

3 침실에 설치한 세면대와 어메니티.

 

4 TV & DVD 룸으로 사용되는 입구 거실은 오준식의 라이프스타일 히스토리가 반영된 공간이기도 하다.

 

5 음악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CD가 놓인 테이블.

 

6 테라스의 백미인 남산 타워 야경.

 

7 2층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용상’과 미니어처들.

 

8 <싱글맨> <달콤한 인생>을 비롯 시네필 오준식의 베스트 DVD 리스트.

 

9 다락방의 낭만이 느껴지는 2층 침실.

 

 

 

 

10 벽을 가득 채운 오준식의 생각의 파편들. ‘인스피레이션 월’ 앞엔 체력 관리를 위한 봉도 달았다.

 

11 에그 체어가 놓인 침실 풍경.

 

12 오후의 햇살에 일광욕 중인 거실.

 

13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손기정 공원 내 축구장.

 

14 오준식의 열정이 담긴 현재를 대변하는 화장품 선반 아래엔 어머니가 장인에게 주문 제작한 칠보함이 든든하게 놓여 있다.

 

15 그가 지나온 과거. 집 입구에 들어서면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직접 디렉팅하고 김용호가 촬영한 현대카드 대형 광고 비주얼이 가장 먼저 보인다.

 

16 2층 북 코너에서 눈에 띤 <노 스모킹> 아트북.

 

17 ‘신발 신고 다니는 집’ 침실에 놓인 슈즈들.

 

18 요리 잘하는 남자 오준식의 은밀한 주방이 내비치는 풍경. 

 

 

 

“집에 들어왔을 때 차분해지는 느낌 들지 않았어요? 난 제주도가 좋아요. 흙이 검정색이거든요. 근데 그 검은 흙 위에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 어떤 곳보다 차분하고, 단정하고, 사람에게 안락감을 줘요. 난 사실 이 집을 밤을 위해 디자인했어요. 이곳에 머무는 시간의 대부분이 밤이니까요. 조도가 낮은 조명들은 벽이 없는 공간을 나눠주는 파티션 격이죠.” 서울역 근처, 밖에서 보면 그닥 특별할 것 없는 아파트 14층에 들어서니 제주도 흙 색깔만큼이나 검은 나무 바닥재와 화이트 벽의 조화가 모던한 로프트 하우스가 펼쳐졌다. 문설주나 경첩은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문엔 손잡이도 자물쇠도 없어 살포시 여닫으면 그만. 그저 나직한 공기가 매끄러운 벽을 타고 복도와 문틈 사이를, 거실과 테라스를 넘나들었다.

 

지난해 4월, 이 집을 발견하고 얼마 전 입주했다는 아모레퍼시픽 디자인 랩 실장 오준식은 그동안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 시작은 ‘신발 신고 사는 집’이었지만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크리에이터라는 정체성을 녹여낼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왜 신발 신고 사는 집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난 집이 편한 것과 집에서 흐트러지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창밖을 내다보면 건너편 아파트 거실이 보이거든요. 그럼 거의 다 누워서 TV를 보고 있어요. 그런 일방적인 풍경이 싫었어요.” 흐트러지지 않고도 나다운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그의 집은 마주보는 공간이다. 방과 거실이 두 개씩 있는데 그중 현관 입구에 있는 일명 ‘TV방’은 기능적인 동시에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박물관처럼 전시돼 있다.

 

 “예전에 살던 집 거실을 그대로 재현한 거예요. 그때 보단 작지만 가구 배합이 같아요. 또 그 거실은 내가 파리에서 살던 아파트와 크기가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방 이름을 ‘생크 비 휘 드 베르누이(5 bis Rue de Verneuil)’라고 지었어요. 세르주 갱스부르가 죽기 전까지 살던 거리 이름이에요. 내 파리 아파트 바로 앞에 있었죠.” 현관 입구에 위치한 거실은 양쪽에 숨어 있는 미닫이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독립된 개인 공간으로 변신하는데, 그는 이곳에서 커다란 박스에 보물처럼 쌓인 영화 DVD를 하나씩 꺼내 보며 달콤한 여유 속으로 빠져든다.

 

반면 반대편에 있는 거실은 성격도 기능도 다르다. 집 안 제일 깊숙한 곳에 있지만 디자이너로서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집을 방문한 상대와 대면하는 열린 공간이도 하다. “안쪽 거실엔 생각을 정리하는 벽이 있어요. 이미지와 활자들을 한 벽 가득 붙여놓죠. 나 같이 디자인하는 사람은 생각을 펼쳐 놓아야 해요. 서랍에 정리해 놓는 건 생각이 아닌 것 같거든요.” 생각보다 작았던 그의 책상 위엔 곧추선 것 하나 없이 몇몇 책자와 프린트 물이 가지런히 누워 그의 정리된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른 한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엔 디자이너 오준식이 걸어온 20년간의 흔적이 역력히 묻어난다. “책장엔 20년간 생명력 있게 살아 남은 책들도 있고 현재의 생각과 맞물리는 새로운 컬렉션도 있어요. 디터 람스 책장은 예전부터 갖고 싶었지만 사실 가구는 가구일 뿐이에요. 나의 개인적인 감성과 생각들이 녹아든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라 특별한 거죠.” 뱅앤올룹슨의 베오사운드 9000에 흘러 나오던 세 번째 클래식 뮤직 CD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머문 그의 집은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오후 3시의 햇살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2층 테라스로 이동하니 아파트 옥상답지 않게 박공지붕이 불쑥 솟아 있었다. 지붕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낭만적이었지만 그 위에서 굽어보는 서울 풍경은 더 기가 막혔다. “지붕에 오르면 바로 앞에 손기정 공원이, 고개를 돌리면 중구의 스카이라인이, 등을 돌리면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는데 야경이 끝내줘요. 여긴 ‘소울’이 있는 동네 같아요. 집 안에서 보는 풍경과 집을 밖의 콘트라스트가 강해서 더욱 매력적이죠.” 점점 서울다움이 느껴지는 환경을 선호하게 된다는 그는 사는 집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울의 이면과 그 속의 정서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9년 동안 살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내 도시 서울에서 우리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난 시간이란 재료가 더 필요한 길을 선택했고 그게 옳다고 생각해 왔어요.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성장한 서울의 위상은 나만 잘한다면 충분히 글로벌한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 같아요.”

 

그의 집에서 목격한 것 중 가장 낯설었던 것은 테라스에 하나, 손님용 화장실 옆에 하나, 그의 침실에 하나씩 자리한 세면대였다. “다 필요하니까요. 방 안에 세면대를 설치한 건 우리 회사의 모든 화장품과 참고할 만한 화장품들을 펼쳐놓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해서였어요. 예전엔 큰 책상이 필요했다면 아모레퍼시픽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은 큰 파우더 스페이스가 있어야겠다 싶었어요.” 발상의 전환으로 신용카드의 개념을 다시 써왔던 과거 현대카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준식은 앞으로 아모레퍼시픽에서 빚어낼 디자인 언어를 위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꿨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표현해야 할 상대를 아는 것, 사용자가 돼 보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그다운 발상이었다. 그의 현재를 대변하는 세면대 옆 화장품 선반 아랜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칠보함이 우직하게 놓여 있었다. 멋스러운 칠보함같이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소품들이 간간이 자리를 점한  그의 집엔 에그 체어와 아르텍의 골드 펜던트 램프, 비트라의 튤립 마블 테이블, 아르떼미데의 LED 램프와 같이 눈길이 가는 가구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이번에 구입한 건 두 개, 나머진 다 있던 것들이에요. 브랜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필요한 아이템을 찾을 뿐이죠. 하나하나 모여 오래 누적된 가구가 한 번에 데커레이션한 것처럼 보이는 건 취향의 흐름에 공통분모가 있어서 그런 걸 거예요.”

 

간단한 질문에도 정보가 아닌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는, 집이라는 그릇에 삶의 히스토리를 조곤조곤 담아내는 사람이었다. 노하우는 아주 간단했다. “만족스러운 집을 만나면, 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휴식을 정의하면 만족스러운 집을 구상하기 더 쉬울 것 같은데요.” 그의 공간에 잠시 머물면서 문득  휴식을 정의하기 위해, 내 집에 정체성을 담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자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머물러야 할 충전의 포만감을 위해서라도, 그냥 오준식처럼.

 

 

Credit

  • EDITOR 채은미
  • PHOTO 우상희
  • DESIGN 하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