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역에서, 예약한 MK 택시를 기다렸다. 교토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아라시야마로 향하기 위해서다. 헤이안시대 때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사랑을 받아온, 산과 강이 수려하게 펼쳐지는 곳. 이정표가 아라시야마를 보여주자, 나직한 산의 능선이 품위 있게 흘러내린다. 알프스 같은 거대한 숭고미가 아닌, 정감 어린 노스탤지어의 풍경이랄까. 푸른빛을 띠는 호즈 강과 달이 건넌다는 뜻의 목조다리 도게츠교의 어울림을 보면 마치 1000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 같다. 아라시야마의 대표적인 럭셔리 컬렉션 호텔 수이란은 과거 귀족들의 별장이 그랬듯, 우리를 환대로 맞이한다. 병풍처럼 펼쳐진 고풍스러운 입구에는 유서 깊은 사찰 텐류지의 스님이 썼다는 ‘푸른빛의 산’이라는 수이란의 한자어 현판이 걸려 있다.
리셉션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길 끝에서 ‘백미’와 마주했다. 다정한 산세에 둘러싸인 목조 건물이 소나무가 우뚝 선 일본식 정원과 함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899년, 사업가였던 가와사키 쇼조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 수이란의 일부가 됐다. 2층 수페리어 룸의 문을 열면 아라시야마의 푸근한 산이 호텔의 둥근 지붕을 감싸안고 있는 근경과 원경이 펼쳐진다. 푸른빛을 모티프로 하는 수이란답게 블루 카펫과 쿠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포터리에서 제작한 도자 세면대 역시 오묘한 파란색을 띠고 있다. 지적인 무드의 방은 묘하게 창작 욕구를 부추긴다. 여기 머물렀을 연인, 홀로 추억을 곱씹으려 했던 노인 혹은 교토에 매혹된 어느 영국인의 정처없는 여정 같은 이야기들…. 호텔에서 소설을 썼던 미시마 유키오처럼 이 방에서 한 계절을 보내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해 질 녘의 강을 걸다 보면 가지런한 길을 따라 산에 오르면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나온 대나무 숲 치쿠린이 펼쳐진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빼곡히 뻗은 대나무들은 오로지 하늘만 향하고 있다. 허기진 걸음으로 들어간 호텔 레스토랑 쿄 수이란은 교토의 신선한 시즈널 재료를 기본으로 탁월한 다이닝을 내놓는다. 새하얀 겨울을 형상화했다는 아름다운 접시는 미소에 절인 은대구와 구운 오징어, 달콤하게 삶은 검은콩이 담긴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삶은 가리비와 구운 옥돔, 토푸 소스를 얹은 아귀 간…. 미식에 빠져든 사이, 도코노마에 놓인 수석 하나와 동백꽃이 취기를 돋운다. 헤이안시대, 교토의 왕은 절대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1100년 영겁의 이야기를 품은 도시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