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생.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근무 경험을 토대로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하고 있다. 네이버, MTV, 〈뉴요커〉 등 다양한 브랜드 및 매체와의 협업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레드벨벳 · 아이즈원을 비롯해 여러 K팝 아티스트와도 협업했다. 정세랑, 장류진, 천선란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커버도 작업했다. 자신의 캐릭터인 ‘시루’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시루의 밤〉 〈시루의 커다란 케이크〉를 펴냈다.
권서영이 입은 톱은 YCH. 스커트는 Munn.
1970년생. 생물학과 출신이지만 어릴 적부터 예술에 대한 꿈을 지속적으로 꿨다. 칼아츠 캐릭터 애니메이션과를 졸업한 이후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 MGA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2008년 월트 디즈니 이매지니어링에 입사했다. 저작권과 오리지널리티에 엄격한 디즈니의 전 세계 유통 캐릭터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그 친구 캐릭터들의 그림과 상품 디자인을 담당하는 한국인 최초의 디즈니 캐릭터 아트 매니저.
김미란이 입은 재킷은 Dint. 이어링은 Judy & Paul.
권서영 한국인 최초의 디즈니 캐릭터 아티스트 매니저로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의 귀국입니다. 캐릭터와 스토리텔링 산업의 변화를 느낀 게 있다면
김미란 개인적으로 팬데믹 이후 산업 변화나 전망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재택 근무를 하는 동안 많은 직원이 무급 휴직(Furlough)에 처하면서 업무적으로 일이 몰렸어요. 지치지 않는 로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죠(웃음). 30년 넘게 미키마우스와 그의 친구들을 그렸던 아티스트 제프 셸리가 회사를 떠나는 등 내부 변화도 있었지만, 산업적으로 하향세를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회사 건너편에 드림웍스와 넷플릭스가 있는데, 오히려 콘텐츠적으로 수요가 높아진 것 같아요.
권서영 저도 처음에는 전시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취소되기도 했지만, 불안한 시기를 넘기니 아트워크나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콘텐츠 수요는 오히려 꾸준히 늘더라고요. 이 기회를 빌려 시작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영미권과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영향이 지금도 제 그림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7년 차인데, 내 그림을 알아봐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안정감이 약간 답답하기도 해요. 25년 넘게 하나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만들어진 내 안의 기둥을 느낀 적은
김미란 일러스트레이터뿐 아니라 모든 아티스트라면 신경 쓰이는 부분일 겁니다. 디자인도, 순수미술도 언제나 유행은 존재하니까요. 내가 쌓아온 스타일을 타인이 알아주는 것이 좋으면서도,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이것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건 아닌가 싶어 두렵기도 하죠. 기존 것을 깨려고 했다가 주변의 평가 혹은 갤러리 요청 같은 현실적인 이유에 흔들리기도 하고요. 그럴 때 기죽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피카소를 존경해요. 14세 때 이미 기본기를 마스터한 뒤 입체파, 프로파간다, 아프리카 아트 등 그 시대 사조를 모두 반영하며 계속 나아갔죠.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김미란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에서 8년간 주니어 캐릭터 아티스트로, MGA 엔터테인먼트에서 3년간 토이 아티스트로 일한 뒤 디즈니에 입사한 게 2008년이에요. 좋아하는 걸 좇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달한 지점인데,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최고라는 회사에 오게 되니 이 다음엔 뭐가 있을까, 다음 목표를 찾았을 때 또 이런 기분이 들면 어떡하나 싶어 우울하더라고요.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절대 잃지 않을 내 세계를 만드는 것이구나 싶습니다. 회사 일을 맡은 만큼 재미있고 즐겁게 하되 내 그림, 내 세계를 천천히 끈질기게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아이디어가 없는 날도 매일 한 시간은 꼭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려 해요.
권서영 그때그때 변하는 트렌드에 맞게 변주하면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디즈니의 가치나 퀄리티, 유산을 함께 담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직업인으로서 꼭 지키는 가치가 있다면
김미란 앞의 답변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업무적으로 할 것은 업무적으로 하되, 내가 창의적인 것에 목마르면 퇴근후에 제 작업을 마음껏 하는 편입니다. 미키마우스를 그릴 때 필요한 규칙만 해도 100개쯤 됩니다. 11년 경력을 갖고 입사한 저도 처음 1년은 미니마우스의 속눈썹 하나도 수없이 상사의 확인을 받았죠. 때로는 지겹지만 그 미세한 차이를 반영하면 확실히 더 나아져요.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런 도제식 문화를 견디지 못해 주니어 아티스트들이 회사를 그만두기도 했어요. 다만 미키마우스 탄생 90주년으로 발간한 〈The Art of Walt Disney’s Mickey Mouse〉에 실린 작품처럼 내부적으로 창의적인 프로젝트와 이벤트가 다양해요. 이때 제가 좋아하는 몬드리안이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블랙 & 화이트 드레스 코드를 활용한 미키마우스를 그렸죠. 이런 변형이 가능한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알 만큼 상징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해요. 동그라미 세 개만 있어도 사람들은 이게 미키마우스라는 걸 아니까요.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미키와 친구들에게 갈수록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 지점인 것 같아요. 기본 틀뿐 아니라 빨강, 노랑, 검정, 흰색까지 굉장히 그래픽적인 면이 있거든요. 심지어 흑백이어도 사람들이 알아보고요. 저뿐 아니라 디즈니의 많은 아티스트가 퇴근 후 3D나 페인팅 · 공예 ·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창의력을 발의하고, 또 그런 개인 작업들을 모아 사내 전시를 하기도 해요.
권서영 멋지네요. 저는 전형적인 회사를 다녀본 적은 없지만,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근무할 때 일을 하며 개인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더라고요. 야근도 많고, 쏟은 시간과 결과물이 비례하다 보니 무리해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는 회사 환경 속에서 아티스트로서 열정을 잃지 않고 성장하기가 힘들다고 느꼈어요.
김미란 맞아요. 차이가 있죠. 창작 에너지가 수그러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안타까워요.
김미란이 입은 니트는 Atcorner. 스커트는 Repetto. 권서영이 입은 셔츠는 Vintage Fendi. 재킷은 Recto. 팬츠는 Eudon Choi. 이어링은 Paulbrial.
권서영 선생님께서 처음 일을 시작한25년 전에 비해 아티스트의 재능이 훨씬 빨리 드러나고, 또 그만큼 빨리 소비됩니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플랫폼에서 좋아 보이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런 과정 속에서 특정 스타일이 유행했다가 빠르게 바뀌기도 하고요. 아티스트에게는 독이 될 수 있는 환경인데
김미란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지난 7월 코믹콘 인터내셔널이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는데 워낙 큰 규모다 보니 다양한 사업군의 관계자가 참여했죠.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코믹콘에서는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들의 참석도 활발하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지원자들의 포트폴리오 스타일이 정말 비슷하다는 걸 느껴요. SNS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경향이 쏠리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기술적인 면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인스타그램에서 제 그림의 ‘좋아요’ 개수는 그런 친구들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상관하지 않아요. 불특정 다수에게 인정을 구할 필요가 없는 건 내가 이미 내 그림으로 먹고살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지금 ‘좋아요’ 1만 개를 원한다면 그건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빨리 인기를 얻으면 내리막길도 빨리 올 수 있어요. 나를 지키고 독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길은 험난하거나 지난할 수밖에 없죠.
권서영 회사에 근무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다양한 개인 작업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그림의 특징, 나의 오리지널리티는
김미란 의도했던 건 아닌데 돌아보면 제 인생에서 친구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더라고요. 가고 싶은 중학교가 있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하면서는 의대생을 꿈꾸며 거쳤던 모든 경험, 그리고 그때 내 옆에 있어준 친구들이 결국 제가 그리고 싶은 이야기의 오리지널리티가 됐죠.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옷들, 친구, 피아노가 개인 작업의 주된 소재죠. 일부러 위대하고 어려운 것을 하기보다 수영할 때 몸을 물살에 맡기듯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때 아이디어가 솟는 것 같아요. 피아노를 지금도 좋아하고, 계속 치고 듣는데 쇼팽의 고향이라 찾았던 폴란드에서 그 나라의 민속미술에 너무 감동을 받은 거예요. 내 인생에서 지나왔지만 소중한 것들, 그런 경험들이 모여서 결국 내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권서영 제 캐릭터인 ‘시루’로 이모티콘을 만들고, 그림책도 펴내면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하나씩 제가 좋아하는 것을 구현해 가고 있습니다. 최고의 디저트가 되고 싶은 떡 반죽이라는 설정을 가진 시루처럼 디즈니의 세계도 굉장히 사랑스럽고 희망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구현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김미란 가족과 사랑, 행복은 디즈니 스토리텔링의 정체성이죠. 디즈니는 그런 이야기와 경험을 파는 회사라고 끝없이 이야기해요. 짧게는 5년, 길게는 50년에 달하는 계획을 매우 세밀하게 세웁니다. 그 다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디즈니 테마파크나 스토어를 통한 경험의 확산이에요. 처음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공간(The happiest place on the earth)’이라는 디즈니랜드 광고를 보고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유학초기 길을 못찾아 힘들 때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에게 이끌려 디즈니랜드를 처음 갔는데, 그 하루 내내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동선, 음악, 시설 하나하나 모든 게 완벽하니까요. 디즈니가 전하는 희망을 온몸으로 경험한 거죠. 미국 사람들이 왜 일생에 한 번쯤 디즈니랜드를 가는 게 목표인지 알겠더군요. 제 성향이 명랑하고 행복한 걸 선호하기도 하고요.
권서영 디즈니 스토어 이야기가 나왔지만 정말 ‘굿즈’의 시대입니다. 개인 일러스트레이터가 페어나 개인 SNS를 통해 다양한 굿즈를 선보일 정도로 이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콘텐츠나 액세서리로 쓰이는 것 같아요. 아트워크가 만연한 시대, 수많은 상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김미란 디즈니에서 제가 작업하고 있는 그림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보통 2년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요. 제 그림이 들어간 제품과 마주치는 건 여전히 반갑고 좋은 일이죠.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시절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갔을 때 카운터에 놓인 사탕 껍데기에서 제가 그린 베이비 루니 툰이 인쇄돼 있는 걸 본 적도 있고, 대중목욕탕에서 아이가 타고 있는 튜브에서 제가 그린 그림을 발견한 적도 있어요. 특히 〈겨울왕국〉 시리즈는 다양하게 제품이 발매돼 그런 경험과 자주 마주치고는 하죠. ‘저거 내가 그린 그림인데!’라는 반가움도 있지만, 사실 굿즈가 나올 때까지 굉장히 많은 사람이 관여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돌아보면 여러 생각이 들어요. 제품 디자인도 라이선싱 팀과 리테일 팀, 두 라인 중 어떤 팀이 제작을 맡느냐에 따라 과정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권서영 소수민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거나 LGBTQ 코드를 녹여내거나, 최근 실사영화화될 〈인어공주〉 에리얼 역할에 흑인 배우 할 베리를 캐스팅하는 등 디즈니도 다양성 이슈에서 선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창작을 시작할 때와 지금 작업을 비교했을 때 여성,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작업에 반영하는 맥락이 미세하게나마 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창작자도 결국 이 현실을 살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퇴행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미란 그런 면에서 저도 디즈니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은 굉장히 다채로운 다양성이 존재하는 국가이고, 아이들에게 그런 다양성을 자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종 차별은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동양인과 서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어요. 살다 보니 남미 사람이나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 섞인 이야기와 판단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더라고요.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편견 없이 자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LGBTQ와 함께 살아가야 하고, 다른 인종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지금 내 모습 그대로 괜찮다는 것을 디즈니가 계속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미 존재하는 사람을 부인하기보다 어떻게 편견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느냐를 보여줘야죠. 〈인어공주〉 영화의 반응은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100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도장 깨듯 시도해야 한다고 봐요. 미래를 위해서.
권서영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로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길버트를 좋아하는데요. 그의 책 〈빅매직〉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창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에 그 너머의 성공이나 명예, 돈을 바라는 것은 조금 사치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창작의 즐거움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뿌듯하고 즐거웠던 결과물이 있다면
김미란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정말 즐거워요. 저뿐 아니라 동료나 상사들도 그렇고 어떤 면에서 보면 다들 조금 제정신이 아닌 거죠(웃음). 가장 뿌듯했던 작업은 MGA 엔터테인먼트에서 토이 디자이너로 일할 때였는데요. 당시 아이들 장난감을 만드는 ‘리틀 타이크스(Little Tikes)’를 인수했거든요. 0~3세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인데 어떤 캐릭터를 넣을지, 장난감 디자인은 어떻게 할지 스케치부터 아이디어를 잔뜩 냈어요. 당시 회사에서 선보이던 ‘브랫츠(Bratz)’보다 조금 덜 섹시한 브라이스 돌 같은 라인을 만들자고 해서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앨리스같이 잘 알려진 캐릭터들을 MGA 스타일로 만들기도 했고요. 장난감 인형이 살 집도 플레이스 디자이너와 함께 만들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권서영 다양한 일을 하신만큼 디즈니 입사 후에도 여러 기회나 제안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이런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꿨다’ 혹은 ‘이거 안 해본 건 좀 아쉽다’ 하는 것이 있다면
김미란 이직을 꾸준히 많이 한 것.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러 번 이직했는데, 돌아보면 진짜 잘한 일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해요. 어릴 때 이직해라. 그래야 몸값도 올라가고, 나이가 들면 무서워서 못 한다. 젊을 때 고용이 더 잘되기도 하고, 다양한 곳에서 일하며 여러 사람과 네트워킹을 맺어야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오거든요. 20~30대 시절에는 도전하고, 마흔이 넘은 후에는 원하는 회사에 정착하거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해요. 변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40대까지는 달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체돼 있으면 어릴 때 배운 것들이 어느 순간 ‘똑’ 떨어져요. 그리고 여러 경험을 하고 나면 일 자체에도 요령이 생기거든요. 팀 전체를 보아 일하는 법을 알게 되고, 다른 팀과 일할 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일을 잘하기 위해 자기 분야를 벗어난 확장과 공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권서영 ‘어디서 영감을 얻느냐’는 창작자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겠죠. 제게 영감은 ‘이걸 그리면 재밌겠다’ 정도의 단상인데, 작가님께 영감의 순간은 어떻게 찾아올까요.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처음처럼 빛나지 않으면 어떻게 정제하는지
김미란 영감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이죠. 제가 제품에 들어가는 캐릭터를 디자인을 하지만 저는 건축, 자동차, 인테리어, 패션, 모든 것의 디자인을 봐요. 상품 디자인도 스칸디나비아, 북미, 남미, 전통 아트, 시대별로 관심을 갖고 항상 지켜보고요. 팬데믹 전에는 매해 한 국가의 도시 네 곳을 딱 찍어 여행하며 가구나 제품 디자인, 사람들의 옷차림, 박물관까지 살폈죠. 일단 ‘접수’하는 거예요. 그런데 또 나쁜 건 많이 보면 안 돼요.
권서영 책에도 쓰셨죠. 좋은 걸 많이 봐야 한다고(웃음)
김미란 그런 아이디어들이 쌓여 있다가 어느 날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떠오르기도 하고, 꿈에 등장하기도 해요. 저는 영감이 없으면 하지 말자는 주의예요. 떠오르지 않는데 억지로 하면 결국 부자연스럽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도 않아요. 작품에 잘 안 풀리지 않던 그 과정이 다 드러나요.
권서영 작년엔 두아 리파와 엘튼 존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 SNS를 통해 연락이 오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뉴요커〉나 〈뉴욕타임스〉의 에디토리얼 일러스트를 그릴 기회도 있었고요. 오랫동안 해외에서 근무하신 입장에서 여성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권하실까요
김미란 요즘 세상에, 특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진출’이라는 말은 좀 거창한 것 같아요. 많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비자나 영주권 같은 서류적인 제약이 생각보다 크기도 하고요. 애니메이션 산업의 경우에도 디렉터 직위가 돼야 업무용 비자를 주거든요. 개인 작업을 꾸준히 하고, SNS 등의 창구를 통해 나를 선보일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미키마우스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브라질 · 이탈리아 · 일본 등 해외 아티스트들과 캐릭터를 재해석하는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고, 디즈니뿐 아니라 다른 회사 사람들도 재능 있는 아티스트를 찾기 위해 눈독을 들이고 있거든요. “난 디즈니에 갈 거야” “꼭 구찌에서 일할 거야” 이렇게 특정 회사를 목표로 삼아도 좋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훌륭한 아티스트가 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직장에 맞춰 연습하면 취업은 할 수 있지만 스펙트럼이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칼아츠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던 시절 대학교수님이 하신 말이 지금도 기억나요. “그냥 애니메이터가 되지 마라. 훌륭한 예술가가 되어라(Don’t be an animator. Don’t be just an animator. Be a the great artist).” 좋은 아티스트가 되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