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대표적 호감 텍스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싫어한다’ 말하기 쉽지 않은 2009년의 대표적 호감 텍스트에 대한 용감한 ‘호 VS 불호’ 리뷰 배틀.::파격적인, 철학적인, 심리적인, 비판, 집, 거실, 여가, 휴식, 일상, 영화, 비디오, 책, 소설, 음반, TV프로, 엘르, 엘르걸, 엣진, elle.co.kr:: | ::파격적인,철학적인,심리적인,비판,집

gran torinolove 아, 나 이거 참. 를 보고나서 나는 분명히 이렇게 내뱉었다. 이걸 왜 기억하냐면 그만큼 이 영화가 참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쪽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만약 내 옆집에 이런 백인 마초 노친네가 살고 있따면 당장 대출을 받든 무슨 수를 쓰든 다른 동네를 알아볼 것이다. 또 하나. 절대로, 절대로 이 노친네처럼 늙고 싶지 않다.그럼에도 이 백발의 할아범은 근사했다. 영화의 막판에선 눈물까지 찔끔거렸으니까. 옆에 앉아 있던 여자친구도 울고 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나는 ‘남자답게’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두었다. 그 순간의 떨리는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핵심만 말하자. 나는 이 늙은 마초의 우직함이 뻐근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알고 있던 마초의 정의를 바꿔버렸다. 이전까지 내게 ‘마초’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컷의 생물학적 결함을 사회적 우월함으로 오해한 채 과시하던 족속들이었다. 이를테면 배려란 단어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테면 소리만 지를 줄 알거나. 그런데 이후에 마초란, 죄를 짊어지는 수컷으로 바뀐 것이다. 알다시피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범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적을 죽인 병사였다. 전쟁이 끝난 뒤엔 성실한 노동자였고 충실한 남편이었다. 아내나 자식에게 살갑진 않았으나 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뭘 어째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당연하다. 포드의 전설적인 스포츠카가 생산중단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가부장의 권위가 지속되지 않는 시대가 와버렸으니까. 1950년대에 혈기 넘치던 젊은이는 남의 나라에서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겪고 1960년대에 가정을 이뤘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보수주의와 청년문화가 충돌하는 걸 목격했으며 90년대에서야 늙었음을 깨달았고, 21세기엔 완전히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몽땅 짐작이다. 영화엔 여기에 대한 얘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 괴팍한 노친네의 완고한 주름이 그걸 말해준다. 그리고 이 일종의 시대의 잔여물 같은 늙은 마초는 깨끗이 사라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짜 비밀을 알려주지 않은 채로, 전쟁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밝히지 않은 채로, 그 비밀스러운 죄를 끌어안고 산화한다. 그러니까 20세기의 남성성은 완고함으로 시작해 비장함으로 끝난다. 사무라이처럼, 주윤발처럼, 커트 코베인처럼 한 순간에 ‘윽!’하고 말이다. 그 뻐근함엔 그야말로 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로선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남자다움을 지키는 것보다 소소한 감정들을 공유하는 게 더 소중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21세기잖나.차우진 ? 대중문화평론가 hate 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자면, “전쟁 참전 기억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인 월터가 이웃의 동양인 소년과의 교제(연애 아님)를 통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과 희생으로 스스로 구원받고, 또 소년을 구원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이며 주연이신 클린트 이스트우드 대본좌의 이러한 훈훈한 감동 메시지는 언제나 반갑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러가지 영화적 장치들까지 반가운 것은 아니다.우선 감동 드라마로 보이는 이 영화의 본질은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보수주적인 감독의 정치적 신념과 80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생 회고’로 변질되어 전달된다. 은퇴 후 집에서 하루 종일 맥주나 마시며 소일하는 월터의 모습은 매번 ‘이번엔 은퇴’를 외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의 모습 같고, 또 그 모습은 마치 군기 잡겠다고 나선 말년 병장의 모습처럼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뿐인가? 영화 내내 옆집 소년에게 “미래도 없고 배짱도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월터의 대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좌께서 앞뒤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구체적으로 바로 나!)들에게 호통치는 것 처럼 들려 기분 아주 별로다. 물론 미래와 배짱이 있다면 다르겠지만.여기에 불편한 이유를 한가지 더 보태자면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동양사회를 바라보는 영화 속 시선이다. 그 동양인 동네에서는 소년의 역할 모델이 되어줄 남자 어른도 없고 그들의 전통은 어쩐지 합리적이지 못하다. 애들이 몰려다니면서 사고치고 다니는데 그들을 야단치는 어른도 한 명 없다. 이 모든 것을 백인 주류 사회에서 왕따당한 백인 남성 노인 한 명이 다 해결한다. 나이만 80세지 슈퍼맨이 따로 없다. 그래 놓고 동양인들의 정(情)의 문화를 살짝 양념처럼 보여주며 이 찜찜한 기분을 눙치려 든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차라리 애써 세대간의 소통 따위를 밑밥으로 깔 것이 아니라 ‘80세 백인 남성 슈퍼맨의 동양인 구원 스토리’로 포장하는 게 나처럼 찌질하고 꼬여있는 애송이 동양인 관객에겐 더 낫지 않겠는가.물론 영화 는 좋은 영화다. 정말이다. 사랑과 희생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선하며, 그것을 풀어나가는 유연한 연출력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무결점의 연기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물론 몇가지 찜찜하고 불편한 구석이야 좀 있지만, 부디 모쪼록 오래오래 사셔서 와 같은 좋은 작품을 또 만들어주시길 바란다. 비록 이 철없고 찌질한 애송이는 앞으로도 그의 감동 드라마에 시큰둥해 할지언정!김군 ? 필름마케터 be kind rewindlove 한동안 미셸 공드리에게 반감을 느꼈다. 때문이었다. 21세기 초식남, 40대 소년, 구제불능의 ‘큐티’ 애호가! 을 보면서 이 재주꾼의 영화가 그야말로 비주얼적 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공드리 자신이 창조해낸 온갖 신기한 잡동사니들로 채워진 세계에서 안분지족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의 남자주인공 스테판은 미셸 공드리의 분신 같았다. 스테판은 헝겊 봉제 인형을 타고 달리고 주먹 대장이 되어 미운 상사에게 펀치를 먹이는 꿈을 꾸다가, “꿈에서 너무 열심히 움직였더니 피곤해서 출근 못 하겠어요”라고 진지하게 보고할 정도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캐릭터였다. 그리고는 “난 남들과 다르니까”라고 떼를 쓰듯 관객에게 ‘엉겼다’. ‘처녀의 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가는 세상과, 흠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과,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로 이뤄졌던 걸작 은 어찌 보면 공드리보다는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의 ‘미친 듯한’ 상상력의 덕택에 빚지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에는 찰리 카우프만이 참여하지 않았다). 사설이 길었다. 그러니까 이 글의 목적을 말한다면, ‘나는 왜 초식남 미셸 공드리를 싫어하다가, 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사랑스러움, 큐트함. 이런 종류의 매혹에는 기본적으로 취향 차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에서 절정에 달했던 그 귀엽기 짝이 없는 만화경 같은 세계가 너무 ‘애들’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서 ‘육식남’ 잭 블랙이 , , , , 등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만 골라 대충 찍어 리메이크할 때,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스웨디드(sweded)’할 때, 그건 더 이상 공드리만의 판타지가 아니었다. 공드리는 우리 모두가 그랬듯, 80년대 동네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며 영화라는 신세계에 열광하던 소년 시절로 돌아가 그 추억들을 더할 나위 없는 폭소와 애수로 재창조해냈다. 영화 속에서 잭 블랙과 모스 데프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엉성하고 조악한 ‘스웨이드’ 영화를 두고 “넌 최고의 감독, 난 최고의 배우. 우리가 뉴웨이브야!”라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그 말은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해하진 마시라) 우리의 삶 자체가 쓰레기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소비와 개발의 광풍에 휩쓸린 도시 자체가 쓰레기 늪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쓰레기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의 아카이브로 만들 것인가는 전적으로 보는 이의 시선의 아름다움에 달려있다. 미셸 공드리는 그 쓰레기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향수와 판타지의 프리즘을 동원했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대사처럼 ‘마음과 영혼’을 담은 셈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21세기판 ’을 관람하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 소박하고 감상적이기 짝이 없는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김용언 ? 기자 hate ‘공드리 월드’는 확실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코드들로 넘쳐난다. 아픈 사랑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는 의 발상은 신선했고, 시크하고 쿨한 파리지앵 스타일 아이콘 샤르롯 갱스부르와 녹아들듯 달콤한 라틴 훈남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을 매치시킨 의 캐스팅은 절묘했다. 미셸 공드리는 무엇보다 비욕, 매시브 어택, 벡 등과의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일찌감치 ‘호감 리스트’에 등재되어 있었다. 를 보러 주말 늦잠도 반납하고 압구정의 한 예술영화전용관에 들이닥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론은 대략 실망. 물론 여러 모로 신선하고 생각할 거리도 쏠쏠하다. 요즘 세상에 DVD도 아닌 VHS 비디오 테이프를 하룻밤 1달러를 받고 빌려주면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되감아서 반납하는 게 좋을걸!)’라고 외치는 구식 비디오 가게가 재개발에 밀려 철거 위기에 몰린다던가, 정부가 전력발전소를 통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고 믿는 동네 돌아이 제리(잭 블랙)의 캐릭터는 우리의 현실을 풍자한다. 달랑 20분짜리 어설픈 홈비디오가 입소문을 타면서 , 등 헐리우드 대표작들이 줄줄이 패러디되어 한 편에 대여료 20달러짜리 ‘스웨덴 제 맞춤제작’ 비디오로 탈바꿈하는 장면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영화를 찍고 컨텐츠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통쾌한 카피레프트의 정신이 느껴진다. 본격적으로 내 시선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건 FBI가 들이닥쳐 저작권 위반으로 3천 150만 달러의 벌금, 6300년의 징역을 운운하며 그들이 애써 찍은 작품들을 깔아뭉갰을 때부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을 주민들이 실의에 빠진 점원 마이크(모스 데프)의 창 밑에 서서 ‘자, 우리들의 영화를 찍자고!’라고 응원할 때였나. 그는 할리우드의 장수 블록버스터 시리즈 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이후 영화는 결국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결말로 총총히 걸음을 재촉한다. 동네 주민들이 기존 영화를 모방하지 않은 자신들만의 영화를 만들어 시사하는 그날, 공교롭게 TV가 부서지고 때마침 대형 프로젝터를 들고 찾아온 경쟁업소 사장 덕분에 쇼윈도를 스크린삼아 영화를 보게 된다. 좁아터진 가게에 모여 앉아 때로는 웃고 울면서 공감하는 주민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이 해피엔딩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스웨덴 제’ 영화들보다도 더 어설프다.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타이밍이라면 아예 감상적인 음악도 확 깔고 클로즈업 두루 해가면서 분위기를 살려야 하는데, 미셸 공드리는 한 10% 밍밍한 연출로 매듭지어버렸다. 할리우드식 낙천주의를 시니컬한 유전자를 지닌 유럽 대륙의 기린아가 다뤘을 때 어정쩡함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일까? 카메론 디아즈, 니콜라스 케이지 등 이 영화보다 더 주류 스타들이 포진한 그의 차기작 은 또 어떨지, 벌서부터 궁금해진다. 이지현 ? ‘하자센터’ 기획1팀장 1Q84love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초식남’ 인상과는 달리 내로라 하는 국제마라톤은 물론이요, 매년 철인3종 경기에도 출전한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런 그가 몇 해 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더랬다. “나는 지금 50대이고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보통 3년이 걸리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과연 앞으로 몇 권이나 더 쓸 수 있을지 생각을 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 소설을 쓸 때마다 기도해요. 이 책을 다 쓸 때까지 살게 해달라고.” 이렇게 그는 소설을 쓸 때마다 늘 ‘죽고 싶지 않다’는 불안한 상념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특히 장편소설을 쓰면 보다 더 육체적인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지금 여기서 소설을 쓰다 죽어버리면 그게 유작이 되는 셈인데 그것만으로 최종평가를 받기엔 억울하다는 것. 앞으로 더 잘 쓸 수 있고,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허나 를 읽으면서 (자랑이지만, 아마도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 이 책을 내가 가장 먼저 읽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가볍게 소름이 끼쳤다. 아저씨, 혹시 이게 마지막 소설이유? 그만큼 는 ‘총체적 하루키’이자 그의 엑기스 마지막 방울까지 짜낸 듯 촘촘했다. 판타지와 로맨스, 사회적 이슈와 감칠맛나는 비유 등 그가 과거에 각자 선보였던 매력들이 한데 응축되어 있어 읽기 벅찰 지경이었다. 또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평소 신념이 스토리 속에서 은유적으로, 허나 강렬하게 설파되었던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의 보너스! 그가 글을 쓴 이래 처음으로 ‘평범한 20대 여자’를 주인공으로 전면 내세웠다. 겉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알고 보면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슬픔을 가진 그런 여자아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나저나 읽는 내내 조금씩 두렵고 슬퍼졌다. 이렇게 여기서 모든 걸 뿜어버리면 더 이상 어떻게 ‘못 다한’ 이야기가 있겠느냐고. 아저씨, 운동 더 꾸준히 열심히 하세요. PS. 원고청탁한 기자가 ‘하루키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써달란다. 나 그거 몇 마디로 끝이 안 나, 아예 몇 년 전에 책 한 권으로 쓴 바 있다.임경선 ? 칼럼니스트 / 저자 hate “그 책, 재미있어?” 여차하면 살인무기로 휘두르기에도 손색 없는 두께의 두 권을 독파하던 하루 반 나절(기록적으로 짧은 시간이다) 동안 스무 명쯤(기록적으로 성가신 숫자다) 내게 물었다. 글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두 권을 우동가락 빨아들이듯이 읽어 치웠지만 재미가 있는지를 물으면 어쩐지 망설이게 된다고? 당신이 말하는 ‘재미’가 어떤 건지 당최 잘 모르겠다고? 이게 다, 제대로 대답하려면 하루키를 좋아하는가를 먼저 물어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의 장편과 단편, 에세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도 상당히 중요한 참고 요인인 것 같다고? 혹시 아직 하루키를 읽은 적이 없다면, 이제 와서 이 책을 왜, 굳이 읽으려는 건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고? “아침마다 3호선 잠원역에서 마주치는 ‘신우형님’ 닮은 훈남이 들고 있길래” 같은 이유라면 차라리 전화번호를 적어서 그 남자한테 쥐어주는 게 낫겠다고? 하지만 이런 말을 죄다 쏟아냈다가는 히스테릭한 활자중독자처럼 보일 게 뻔했다. 대신 모나지 않은 대답을 궁리하며 머릿속을 더듬었다. 는 ‘아오마메’를 축으로 한 홀수 챕터와 ‘덴고’가 주인공인 짝수 챕터가 뜨개질 하듯 쫀쫀하게 직조된 형식이다. 거의 매 챕터가 긴장감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끝나버리는 통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조바심으로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1권의 중반부에서는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질러서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남자를 겁 먹게 했다). 그러나 이런 박진감과 흡인력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자극적인 이야기를 관념적인 스타일로 포장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신비주의적 정조에 이 소설의 알듯 말듯한 모호함이 은근슬쩍 합승해버린 느낌이랄까. 후반부로 갈수록 서술이 늘어지면서 2권을 읽는 속도도 덩달아 1권의 두 배쯤으로 느려졌다. 하루키 소설의 단골 여자 캐릭터를 ‘제이슨 본’으로 트레이닝 시킨 것만 같은 아오마메가 10살 때 딱 한 번 손을 잡은 남자 아이를 ‘단 하나의 사랑’으로 품고 산다는 설정, 무덤덤하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은 나, 그녀를 평생 그리워했지 뭐야’로 돌변한 덴고의 태도, 묵직한 존재감으로 사건에 개입해놓고 2권 시작하자마자 증발해버린 에비스노 선생, 사건의 단초가 된 의미심장한 인물임에도 1, 2권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그의 딸, 암시적인 묘사 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 ‘리틀 피플’, 이 외에 던져만 놓고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않은 여러 가지 의문이 소설의 모호함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신비로운 모호함이야말로 하루키의 스타일이자 매력이 아니냐고 항변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루키의 팬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이 책은 ‘재미있다’. 거봐, 아까 그 질문들을 괜히 늘어놓은 게 아니라니까. 신윤영 ? 피처 디렉터 alain de bottonlove ‘일상의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알랭 드 보통이 다루는 주제는 여행, 사랑, 일, 건축, 불안 등 매우 다양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수석졸업이라는 소개가 그에게 지적(知的) 후광을 안겨 주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여러 칼리지들로 나누어져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 시스템 안에서 ‘수석졸업’이라는 게 정확히 뭘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우리나라 독서계에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지니고 있다. 출간하는 책마다 신문 서평면을 트게 장식하며 베스트셀러가 된다.그는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철학 교양서인지 장르 구분이 어려운 글, 일종의 하이브리드 글쓰기에 능하다. 예컨대 1인칭 화자인 주인공과 그의 연인이 엮어가는 러브스토리 는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 역사, 종료,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적 단서들을 엮어낸 소설 아닌 소설이다. 여기에서 그의 또 하나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풍부한 인용을 통해 광범위한 지식을 과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식인 티를 내기보다는 일상인의 정서에 맞장구치는 태도를 유지한다.‘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인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한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중에서) 서평지 가 그의 작가로서의 성공 비밀을 ‘끝까지 독자들을 싹싹하게 배려하는 스타일’이라 평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보통의 그런 스타일은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세상사에 관해 공감적인 조언을 해주는 ‘상담 전문’ 친구 또는 선배를 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런 친구나 선배의 공통적 특징은 뭔가 새로운 통찰을 일깨워주기보다는, 머리에서만 맴돌던 내 생각과 느낌을 잘 정리해준다는 점이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가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 중에서)요컨대 알랭 드 보통에게서 ‘내용’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굳이 새로움이 있다면 독자에게 접근하는 ‘스타일’의 새로움일텐데, 보통에게는 그 스타일이 내용 자체라 할 수도 있겠다. 일상의 복잡함에 지친 독자들에게 그는 정신 바짝 드는 진한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달콤한 위안을 주는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이다. 그의 책을 읽는다는 건, 정신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본격적인 목욕에는 못 미치나 기분 전환을 위한 가벼운 샤워로는 훌륭하다. 표정훈 ? 출판평론가 hate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나는 그의 안티도 아닐뿐더러, 첫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지적으로 잘 단련되어 있는 친근한 철학자이며 이야기꾼. 아마도 대중에게 크게 어필한 알랭 드 보통의 이미지 포인트이자 장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또 명문 케임브릿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박사 학위 소지자이며,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전형적인 엄마친구아들이다. 머리가 좀 허전한 것만 빼면 말이다. 그의 이름 다섯 자가 바람에 휘날리는 계기가 된 3부작 , , 에서 확실히 알랭 드 보통은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한 통찰은 “이 사람 글 진짜 잘 쓴다!”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그의 글에서 딱딱한 먹물냄새가 난 적은 없었다. 문제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그의 감성적 철학, 혹은 철학적 감성에 공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 아마도 그 특유의 표현방식 탓이 크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이나 을 읽을 때 난해한 철학용어와 지적 언어유희에 몇 번이나 몰입을 방해받았다. 굳이 이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좀처럼 이야기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더불어 그가 최근 들어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동어반복’이다. 물론 소소한 일상다반사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솜씨야 여전하다. 문장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세련됐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코드를 가지고 입담으로 커버한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가장 최근작인 노동에 관한 에세이 은 마치 정해진 분량을 힘겹게 채운 리포트 같은 느낌이었다. 장황한 예시와 비유를 무장해제 시키고 나면 드러나는 그의 테마는 매우 보편적이다.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풀어놓고 보니 남은 게 없어 허무하더라는 식이다. 물론 보편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도 있겠으나, 삐딱하게 본다면 창의적인 직관이라고는 못하겠다. 평범하고 빈약하다. 더 독하게 말하면 어디쯤에 있는 블로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경제적인 소외와 노동의 고달픔을 겪어보지 않은 인텔리의 한계마저 느껴졌다면, 내가 지나치게 오버하는 걸까. 설마 ‘사랑 3부작’이 그의 정점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사랑’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넓혀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과도기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게 알랭 드 보통의 스타일이고, 그 때문에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팬들이 많은 거라면, 그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취향의 차이라고 애매하고 점잖게 결론내고 슬쩍 빠질까 한다. 인기 작가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글이든 뭐든 낭비를 싫어하고 간결함의 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의 방식은 비호감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최승우 ? 칼럼니스트(loonytuna@empal.com) lady gagalove레이디 가가를 ‘불량 블록버스터’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많다. ‘파격’이라기보다 ‘과격’에 가까울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노출 의상으로 주목받았고 검색어 순위가 떨어질 때 쯤 되면 멤버들과 관계를 가졌다거나 양성애자라거나하는 과감한 인터뷰를 감행해 화제가 됐다. 심지어 미성년 보이 밴드와 관계를 가졌다거나, 암수 동체라는 둥 지구가 고향이 아니라고 해도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은 분위기의 루머들이 마케팅 포인트로 갖춰져있는 ‘가십계 스타’이기 때문에 더욱 많은 이들이 레이디 가가를 ‘구린 아이템’으로 생각해버린다. 솔직히 가가의 최고 히트곡인 ‘Pocker Face’가 음악적으로 그다지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론이 불가능한 부분도 있다. 마돈나가 온갖 추문을 흩뿌리고 다닐 때, 완벽한 프로듀서 릭 데린저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음악적으로 마돈나를 흠짐낼 수 없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진실로 중요한 부분은 레이디 가가가 단순한 팝 컬처의 유행상품이 아니라 팝 마니아용의 가벼운 농담과 같은 상품이라는 점이다. 영국 록의 자존심이었던 퀸이 변절했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뉴웨이브를 적나라하게 받아들인 노래 ‘Radio Gaga’에서 예명을 따온 것부터 레이디 가가의 마니악한 면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레이디 가가의 유치해 보이는 의상들은 1960년대 데이빗 보위가 치장했던 ‘글램’의 분위기가 살아 숨쉰다. 그런데 이딴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결정적인 부분은 레이디 가가가 위와 같은 사실을 ‘알아 달라’고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악 마니아들이나 팝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자신이 당신들을 위한 아이템이니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고 은근한 어필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노는 여자’라고 끊임 없이 강조한다. 레이디 가가는 자신을 팬시 상품이나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포장하지도 않고 팝 스타가 되면 누구나 걸리는 공주병의 1기에도 접어들지 않았다.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면 누구나 잡지 에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거창하게 인터뷰하길 원할텐데 이 사람은 자신이 만든 노래보다 비주얼이 훨씬 중요하다고 외친다. 일찍이 앤디 워홀은 말했다. ‘자신이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르주아적인 행동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자신이 천박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천박한 행동’일지 모른다. 그런 순결을 가장한 천박이 난무하는 팝 시장에 나홀로 북창동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내추럴 본 천박’의 레이디 가가는 그 솔직함 때문에 더욱 소중한 존재로 커가고 있다. 현현 ? 대중음악평론가 hate 레이디 가가가 정말 그렇게 파격적인 ‘돌+아이’인가? 그가 올해의 핫이슈인 건 알겠다. 레이디 가가는 올해 MTV 시상식에서 피를 뒤집어쓴 무대를 보여줬고, 속옷을 입은 채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렇게 레이디 가가는 마돈나처럼 동시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자기 자신을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부분처럼 만들어 앤디 워홀같은 팝 컬쳐 아티스트처럼 행동한다. 미술가의 작품보다 패션 잡지의 파격적인 화보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이 시대에 레이디 가가는 그것을 모든 대중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게 ‘뮤지션’ 레이디 가가의 파격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마돈나가 아무리 과거에 센세이셔널한 존재였고,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해도 그를 아방가르드 예술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그의 음악은 동시대의 트렌드를 정확히 고려해 만든 뛰어난 대중음악이었다. 레이디 가가도 마찬가지다. 레이디 가가를 언급할 때는 늘 마돈나, 프레디 머큐리, 앤디 워홀같은 팝 컬쳐의 아이콘들이 거론된다. 하지만 레이디 가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흑인음계의 탑 뮤지션 에이컨이다. 에이컨은 레이디 가가의 을 제작하고, 프로듀싱하면서 을 요즘 트렌드에 어울리는 팝 음악으로 출고 시켰다. ‘Just Dance'는 에이컨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대번에 에이컨의 노래라는 것을 알 법하고, ’Beautiful, Dirty, Rich'는 레이디 가가가 곡을 주기도 했던 푸시캣 돌스의 또 다른 곡 같다. ‘Again Again'이나 ’Summer boy'처럼 프레디 머큐리나 마돈나에 바치는 것 같은 곡들도 있다. 하지만 이 곡들은 여러 팝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아 복고적인 음악들을 소화하는 레이디 가가의 캐릭터를 만들어줄 뿐, 적극적으로 프로모션 되는 곡들은 아니다. 에서 레이디 가가는 자신이 내세우는 팝 컬쳐를 적극적으로 음악에 용해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런 ‘분위기’를 낼 정도만 보여주고, 대중적인 히트는 요즘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만한 곡과 캐릭터를 만들어줄 수 있는 곡이 차곡차곡 정리 돼 있다고 해야할까. 은 장르나 팝 컬쳐의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씩 겹쳐놓은 레이어드다. 파격적인 새로움은 없고, 기존의 것들을 잘 배열해 참신함을 주는 정도다. 물론 이런 능력도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레이디 가가가 정말 올해 팝계에 가장 파격적인 뮤지션이자, 앞 뒤 가리지 않는 ‘아방가르드’일까? 그러기엔, 은 너무나 대중적이고, 너무나 얌전하다. 강명석 ? ‘10 아시아’ 기자 sketch booklove 약속 하나 없는 금요일 밤 열두 시. 적적한 마음에 분노의 리모콘질을 하다 보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채널 고정을 할 때가 많다. 게스트만 확인하고 자야지, 애초의 결심과는 달리 한시 반까지 혼자 낄낄거리다 보면 허무함과 동시에 의문이 몰려든다. 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 나는 이 파리한 중년의 사내에게 금쪽 같은 금요일 밤을 상납하고 있는 걸까. 일단, 그의 입담이 끝내준다. 골방에 틀어박힌 병약한 룸펜의 낯빛을 하고서 음험하고 오타쿠스럽기 짝이없는 말들을 끝없이 쏟아내는데도 다들 좋아 죽는다.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은 딱 엄마 미소의 그것. 처음엔 바짝 얼어있던 태가 나던 신인들도 그의 조롱에 긴장을 푼다. 단체 최면이라도 걸렸나, 역시 아이돌의 아버지, 조롱계의 마에스트로 유희열이구나 실쭉대보지만 나 역시 ‘FM 음악도시’ 시절부터 그의 경박한 입담에 사육되어온 환자 중 하나임을 고백한다. 진행자의 개성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음악프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방송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 재미의 팔 할은 관객과의 호흡을 척척 이끌어 내는 영리한 진행능력에서 기인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소녀시대부터 이병우를 아우르는 폭넓은 게스트 선정 역시 인상적이다. 방송을 타기 힘든 뮤지션에게 조금 더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면 어떨가, 너무 달짝지근하고 말랑말랑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잠시. 아이돌은 아이돌대로 거장은 거장대로 자신의 무대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껄쩍지근함은 사라진다. 이 프로가 아니면 그 어느 공개방송 프로에서 아이유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어쿠스틱 넘버를 듣겠나. 아이돌이냐 뮤지션이냐, 식상한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종잡을 수 없이 산만하게 가보는 것도 그것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금 더 지르고, 달리는 무대가 많아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은 유효하지만. 프로그램 성격과는 별 상관없는, 꼼짝없이 유희열 오덕후임을 인증하는 멘트 하나 더. 풍채가 없어 고민인 남성들이라면 스케치북의 시청을 권유해 봄직하다. 무슨 소리냐고? 그의 옷차림은, 스키니한 남성들을 위한 스타일 교과서다. 그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본인의 센스인지, 스타일리스트의 센스인지는 몰라도 참 교묘히 깔끔하게 잘 입었다고. 레이어드룩과 세미캐주얼을 적절히 오가는, 오버하지 않는 그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이유는 몰라도 자연주의 오가닉 라이프를 가치로 내건 일본 인테리어 잡지가 생각난다. 저질과 고품격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프로가 꾸준히 사랑받는 근원을, 그의 옷차림에서 찾아본다면 너무 사심이 담긴 억측이려나.이정은 ? 칼럼니스트 hate 7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90년대 초중반에 대학에 들어간 이들에게 유희열은 어떤 상징이었다. 똑똑하면서 잘난 척은 없고 잘난 척을 한다해도 그 방식이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낄낄대는, 담백한 채로 지루하지는 않고 세련되면서 웃기기까지 한 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생긴 얼굴로 판에 박힌 말이나 해대는 배우의 팬과는 확연하고도 우월한 변별점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의 집합체였다. 한 방송작가는 유희열의 프로그램처럼 늘 똑 같은 방송도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유희열이 한창 잘 나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사실,유희열이 너무 잘 나갈 때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유희열이 못나갈 때가 있었나 싶긴 하지만? 청취율은 천칭에 단 듯 똑같았다고 한다. 그는 유머에 명석했고 음악에 진지했으며 리액션에 총명했고 여자 마음 들었다 놓는 것에 발군이었다. 그런 그가 기름기 없지만 물기는 좀 있는 좋은 음성에 자신의 장점을 실어 보내면 끝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갸웃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희열의 ‘유’자는 유연성의 ‘유’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스스로가 지닌 매력을 버무려 프로그램을 만든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면 스케치북을 찾은 관객도, 게스트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들 역시 모두 한마음이 되어 낄낄거리고 달콤해지며 편안해질 수 있다. 처음에는 ‘스케치북’ 역시 그랬다. 1회에 나왔던 김장훈을 농담의 꼬리의 꼬리를 물어 4회까지 결국 마술쇼까지 하게 한 것은 유희열의 힘이었다. 유희열이 던지는 음악과 수다는 금요일 밤 리모콘을 쥔 엄지 손가락에 힘을 빼게 할 수 있는 조붓한 힘일 수 있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이 뒤로 넘어갈수록 비로소 해갈하려고 하는데 똑 떨어진 맥주처럼 달리다 마는 기분이 들게 하고 있다. 음악성 강한 사람들을 불러다 끝까지 가게 하는 것도, 유희열의 어퍼컷 없이 잽으로 쓰러뜨리는 수다로 넘어지게 하는 것도, 익숙한 사람들의 낯선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채로 어정쩡하게 그리다 만 그림으로 끝나고 만다. 쎈 팀 하나, 조금 덜 센 팀 하나, 신인 하나. 그리고 박지선. 잘 입고 나오는 유희열, 소담스런 수다 몇 조각, 뭔가 시원하지 않은 기분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소박한 그녀가 만드는 숲속 같았던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이소라가 얼마나 몰입을 잘하는 뮤지션이고 또 웃기는 여자인지 알게 했던 ‘이소라의 프로포즈’, 관객이 행복한 무대가 무엇인지 알게 했던 ‘이문세쇼’, 윤도현의 순진하고 우직한 록적인 직설화법으로 오랫동안 견고했던 ‘러브레터’, 차 향인지 사탕 맛인지 치약 냄새인지 알 듯 모를 듯 끝나버린 ‘이하나의 페퍼민트’를 잇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역시 전작이 그랬듯 유희열에게 전적으로 기대야한다. 개수가 부족하고 굳어지고 오래된 크레용으로는 스케치북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잘 쥐고 그리기만 한다면 48색 크레용 유희열은 분명히 쓱쓱싹싹 잘 그려질 것이다. 조경아 ? 편집장* 자세한 내용은 엘르걸 본지1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