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서린 브래드퍼드 Katherine Bradford
」 캐서린 브래드퍼드. 그녀의 작업실에서. (Photo : Erin Little)
올해로 78세가 된 캐서린 브래드퍼드(Katherine Bradford)는 최근 불현듯 회화 신에 우뚝 선 아티스트다. 빛을 발하는 듯한 광채, 감정적이고 황홀한 색채, 우주에 떠다니는 듯한 모호한 형상을 화폭에 새기며 수년 사이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멀리서 조용히 예술을 열망하는 데 인생의 긴 시간을 바쳐야 했다.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스스로 인정할 즈음에는 아무것도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어요. 내 인생을 되돌려 다시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캐서린 브래드퍼드는 주지사를 꿈꾸는 야망 많은 남자의 아내로 살았다. 일순간 더 이상 그의 아내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이혼을 감행한 후, 히피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골몰해 왔다. 캐서린 브래퍼드에게 물감은 자신만의 언어다. 신비로운 매혹이 흐르는 그녀의 그림은 친숙하고도 아름다우며, 형언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빛나는 동시에 보는 이를 강렬하게 빨아들인다. 아마도 캐서린 브래드퍼드가 재현과 추상에 동등한 비중을 두고 작업하기 때문일 것이다. 캐서린 브래드퍼드는 미국의 메인 주에 살던 시절에서 영감을 받아 종종 수영하는 사람들, 보트, 밤하늘, 수평선을 모티프로 삼고 그것을 추상과 재현이 맞닿아 있는 경계로 끌어올려 끈질기게 만지작거린다. “예술의 세계는 아주 작은 세계에 불과해요. 그 안에서의 성공 같은 건 예술 밖의 세계를 고려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죠. 최근 생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큰 갤러리 공간 한구석에 앉아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의아해 하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어요.” 엄연한 성공을 거둔 그녀는 이른 아침마다 빈둥거릴 새 없이 커다란 로프트 스튜디오로 향한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며 오늘도 작업복에 물감을 묻힌 채 캔버스를 하염없이 가로지른다. 결국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캐서린 브래드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들이 더 많은 자유와 뚜렷한 접근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고 싶어요.”
영국 켄트에 있는 그녀의 오래된 시골집 근처에서 로즈 와일리. (Photo : Kwon Soon-Hak)
영국 남동쪽 켄트의 오래된 시골집에는 로즈 와일리(Rose Wylie)가 산다. 1934년생인 와일리는 스물한 살에 결혼해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며 주부로 살다가, 47세의 나이에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 로즈 와일리는 폴 햄린 재단상을 수상하며 미술계의 총애를 받는 아티스트로 여러 매체에 대서특필됐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2013년에는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로즈 와일리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이듬해인 2014년, 로즈 와일리는 영국 현대회화 작가에게 주는 권위 있는 미술상인 ‘존 뮤어 재단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2018년에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부터 초콜릿 비스킷, 할리우드 스캔들에 이르는 그녀만의 독특한 모티프가 크게 회자됐고, 〈가디언〉은 ‘이 시대 회화의 길을 제시한다’고 그녀를 평했다. 로즈 와일리가 살아온 긴 세월에 비하면 고작 수년에 불과한 이 기간 동안 그녀가 이룬 업적은 실로 경이롭다. 누군가 오랜 기간 인정받지 못하다가 갑자기 80대 여류 작가들이 주목받는 이유를 묻자, 로즈 와일리는 “세상이 그동안 남자 작가들 못지않거나 더 좋은 작업을 해온 여류 작가에게 주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이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로즈 와일리는 켄트의 시골집에서 50년 동안 살았다. 16세기에 지어진, 나무와 산딸기가 가득한 집에서 와일리는 매일 9시간 동안 그림을 그린다. 서너 장의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작업한다. 40여 년 동안 지속해 온 그녀의 일상이다. 물감 자국이 두껍게 묻은 채 굳어진 신문지 뭉치와 페인트 병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한 로즈 와일리의 작업실은 그 자체로 표현주의 회화나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독특한 스튜디오는 그녀로 하여금 모든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적 파라다이스가 분명하다. 로즈 와일리의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강렬하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단순하고 반항적인 가능성이 넘실댄다. 그녀는 영화와 뉴스, 잡지에서 무언가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를 나무로, 스커트를 스커트로 느꼈으면 해요. 작품 속의 특정 오브제는 처음 본 그대로 읽혀야 합니다. 캔버스에 한 그루 나무를 그렸다면, 그건 제가 사람들이 일반적인 나무의 움직임을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그 안에 추상 따윈 없습니다.” 로즈 와일리는 자동차 하나를 그릴 때도 무척 신중하다. 지구에서 단 한 번도 그린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50번이고 다시 그린다. “그렇게 그린 뒤에도 실패했다는 판단이 서면 캔버스에 새 조각을 덧대고 다시 그립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게 피곤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어떤 일이든 시작과 끝은 힘들기 마련이죠.” 그녀는 영국의 축구 선수 존 테리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칸영화제에 참석한 니콜 키드먼과 같은 친숙한 소재를 경계 없이 활용한다. 그녀의 커다란 캔버스는 대중적인 소재와 자유로운 표현력, 발랄한 컬러로 뒤덮인다. 올해로 86세가 된 로즈 와일리는 전무후무한 영국의 팝아트를 새로운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 루치타 허타도 Luchita Hurtado
」 루치타 허타도. 그녀의 개인전이 3월 12일부터 취리히의 하우저 & 워스에서 열린다. (Photo : Oresti Tsonopoulo)
올해 100세가 된 아티스트 루치타 허타도(Luchita Hurtado)는 여전히 매일 해변을 걸어 20분 거리에 있는, 푸른 식물로 가득한 샌타모니카의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녀가 얇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몸짓은 초월적이면서도 아이 같다. 유튜브의 한 영상에서 하얀 카디건을 입고 붓을 들고 선 루치타 허타도는 연둣빛 잉크를 찍어 몇 번의 선을 쓱쓱 긋다 수줍게 웃는다. “됐어요. 이제 완벽해요.” 2018년 여름, 미국 해머 뮤지엄에서는 〈Made in L.A. 2018〉전이 열렸다. 60~70년대의 우주적 모티프와 기하학적 추상성이 풍부한 허타도의 작품은 놀랍도록 강렬하게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듬해인 2019년, 허타도는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갤러리 하우저 & 워스를 자신의 40~50년대 작품으로 채우며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나타냈다. 지난 2년간 98세와 99세였던 예술가 루치타 허타도가 보인 행보는 자신이나 그것을 목격한 우리 모두에게 매우 짜릿한 경험이었다. 마침내 2020년에 그녀는 100세를 맞았다. 올해는 너무 늦게 현대미술 신에 우뚝 선 루치타 허타도를 축하하는 대형 회고전이 로스앤젤레스의 카운티 미술관과 멕시코시티의 뮤제오 타마오에서 열릴 예정이다. 허타도는 1920년 베네수엘라의 해변 마을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뉴욕으로 이주했다. 재봉사인 어머니는 그녀가 패션을 공부하길 원했다. 허타도는 가족 몰래 워싱턴 어빙 고등학교 미술 강좌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미술가로서 은밀히 성장했다. 1960년대에 루치타 허타도의 팔레트는 진홍색과 오렌지색, 코발트색의 거대한 줄무늬로 넘쳐났다. 곧이어 허타도는 ‘I Am’이라는 자화상 시리즈를 남기게 되는데, 일련의 구슬픈 자화상에는 무늬가 있는 양탄자를 건너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과일 조각을 들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담겨 있다. 그 무렵 루치타 허타도의 그림에는 ‘Womb’ ‘Woman’ ‘Adam’ 그리고 ‘Eve’라는 글자가 반복적으로 새겨졌고 그림마다 단색이 강조됐다. 루치타 허타도는 밤의 초현실적 풍경과 푸른 하늘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 같은 그림, 거대하고 관능적인 꽃들, 거대한 추상 형태의 구획을 실험해 왔다. 허타도의 몽환적이고 다채로운 캔버스는 차가운 현실 그리고 미술의 오랜 정의에 저항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연과 활기로 가득 찬 자신의 삶에서 마주친 토착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돼 있다. 그녀의 그림 밖 삶은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루치타 허타도는 미혼모로서 첫아이 대니얼을 낳으며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힘든 여정을 시작했는가 하면 두 번째 남편인 볼프강 파알렌을 만나면서 멕시코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겨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내던 긴 세월을 거쳐 샌타모니카에 정착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뉴욕, 멕시코, 로스앤젤레스에 이르기까지 유목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을 해오며 그녀는 세 명의 남편과 만나고 헤어졌다.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그러는 동안 다소 비밀리에 화가 경력을 축적했다. 그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 것은 타고난 유머 감각과 낙천성이었다. 작품이 보여주듯 루치타 허타도는 어둠보다 빛에 가까운 사람이다. “우리 이모는 나더러 ‘넌 감옥에 가더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아이야’라고 말했죠.” 루치타 허타도가 다섯 살짜리 아들을 소아마비로 잃은 일을 비롯해 인생의 힘겨운 곡절로부터 자신을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은 낙천적 기질에 기인한 특유의 생명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루치타 허타도는 프리다 칼로와 마르셀 뒤샹, 이사무 노구치에 이르기까지 20세기를 수놓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알고 지냈지만,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거의 1세기가 걸렸다. 201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열린 허타도의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루치타 허타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유동적인 정체성 덕분에 21세기의 예술이 됐다. 그녀는 프리다 칼로와 동시대를 향유한 인물이며, 디에고 리베라와 교류했고, 초현실주의의 핵심 인물인 볼프강 파알렌과 결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절대 초현실주의라는 틀에 가둘 수 없다.” 생의 끝자락에서 거리낌 없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고령의 여성 예술가들. 그녀들의 예술과 삶의 여정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지금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불꽃처럼 뜨거운 마지막 피치와 거대한 열정은 ‘인생은 무한함의 연속’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을 곱씹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