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할머니와 30대 손녀가 쓴 책 '오늘내일하는 사이'
작가 임봉근과 임다운은 할머니와 손녀 사이이자, 함께 자라온 친구다. 비밀을 나누고, 취향을 공유하며,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넓힌 끝에 함께 쓴 책 '오늘내일하는 사이'가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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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내일하는 사이>에는 팬데믹 동안 할머니 임봉근이 손녀 임다운에게 쓴 편지, 임봉근과 함께 살아오며 임다운 작가가 겪고 깨달은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두 사람의 유쾌한 일상에서 남다른 우정이 느껴집니다
임다운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 살았기 때문에 당연한 존재였어요.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나에게 자매나 언니 같아요. 엄마 아빠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머니에게는 비밀 이야기처럼 털어놓을 수 있었죠. 반대로 할머니도 자식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저에게 하셨고요. 그렇게 우정이 쌓인 것 같아요.
임봉근 작가에게 임다운 작가는 얼마나 특별한 존재입니까
임봉근 이상하게 나와 세계관이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다운이와는 통했어. 어릴 때부터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눈빛이 남달랐고, 내 말을 잘 알아듣는 아이였지. 그래서 ‘아, 이 아이와는 친해져야겠다. 내 취미에 맞는 아이구나’ 싶었고. 손잡고 다니며 자연 이야기도 하고, 나무를 보며 숫자도 가르치고, 내가 사랑하는 대자연에서 다운이를 키웠어. 그런데 그걸 잘 받아들이더라고. 나에게 다운이는 친구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애인 같기도 해. 나를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
두 사람이 공동 집필한 책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을까요
임다운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했을 때 공연을 보러온 ‘안온북스’ 서효인 대표님이 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봐주셨어요. 처음에는 단행본을 쓸 자신이 없었지만 만약에 쓴다면 할머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그러던 차에 할머니가 써준 수많은 편지가 떠올랐어요. 그렇게 할머니 글과 제 글을 반반씩 엮어 완성했습니다.
임봉근 우체국이 멀어 매일 부치지는 못하고, 매일 써서 모은 거를 한 달에 한 번씩 다운이에게 전했지. 그 편지들이 모여 책이 된 게 신기할 뿐이야.
특히 임봉근 작가가 남편 성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이름에 붙이고, 자식을 비롯해 손자까지 할머니 성으로 바꾼 사연이 흥미로웠어요.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 세상에 펼쳐 보이는 데 고민은 없었나요
임다운 우리 둘의 시선으로 쓴 글이 할머니 당사자는 물론 다른 가족에게 무례한 일이 되지는 않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사람들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의문이었죠. 또래 친구만 봐도 할머니와의 관계가 저마다 다르고, 각자 할머니에 대한 상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책이 나온 뒤,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글을 읽어주는 게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내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의 어떤 기억과 연결해서 읽더라고요.
할머니는 아픈 걸 참지 않고, 장민호의 트로트 실력에 반하고, 먹고 싶거나 유행하는 영양제를 사달라고 제안하기까지. 취향이나 호불호가 아주 분명해요
임다운 아침에 밥을 차려 드려도 마음에 안 들면 안 드세요. 좋고 싫음이 확실하고, 주변 눈치를 거의 안 보시죠. 사실 동갑내기 친구로 만났으면 좀 피곤할 수도 있어요(웃음). 한 세대를 건너 만났기 때문에 오히려 흥미로운 관찰 대상 같아요. 할머니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헌신적인 할머니 상과는 좀 달라요. 기본적으로 ‘퀸’의 마인드죠. “너는 너대로 살아라”라며 ‘쿨’한 스타일이라 기본적으로 대화할 때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상쾌한 느낌이 있어요. 아주 특이하고 특별한 친구입니다.
요즘 임봉근 작가는 어떤 게 좋습니까
임봉근 지금은 산책. 새벽 산책이 좋아. 내가 가면 까치들이 “까악 깍깍” 하고 대답해 줘. 알아보는 것 같더라고. 자연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 새와 나무, 구름을 보면서 걷고, 저녁에는 일기를 써. 복지관에 가는 것도 취미이고. 매일 메뉴가 다르고, 노인들이 좀 더 세련되게 살 수 있도록 훈련받는 곳 같아. 그곳에서 배우는 것도 삶의 활로가 되지.
꿈에도 등장할 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장민호에 대한 마음도 여전합니까
임봉근 언젠가부터 조금 멀리 했어. 지금은 오직 산책, 독서, 자연.
임봉근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쩜 그렇게 ‘쿨’하고 ‘마이 웨이’할 수 있나요
임봉근 나는 책을 안 읽고, 멋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자연을 사랑했지. 젊을 때 내 이상형도 농대 나와서 집 안을 꽃으로 가꾸고, 풀 한 포기까지 함께 연구하며 사는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은 없더라고. 처음 남편에게 끌렸던 것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서였지. 나중에는 나를 배신했고, 결국 성까지 바꿨지. 그 사람을 떼어내고 나니 하늘이 훤히 보이더라고.
그 시절에 성을 바꾼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에요. 용감한 당신은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어떤가요
임봉근 부러운 것도 있지. 옛날에는 너무 가난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으니까. 닭 한 마리도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였어. 요즘은 먹을 것도 풍부하고, 배운 사람도 많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잖아? 그런 점이 부럽고 안타깝기도 해. 기계와 스마트폰 때문에 낭만이 없어진 것 같아. 감정을 글로 표현할 줄 모르고, 연애 편지 하나 쓰지 못하는 시대가 됐어. 예전 사람들은 연필로 편지를 쓰며 감정을 나눴고, 피가 통하는 글을 쓸 줄 알았거든. 지금은 ‘예스’와 ‘노’로 대화가 끝나는 느낌이야. 감정을 교류하는 데는 그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한데 말이지.
임봉근 작가와 낭만이 사라진 현실을 논하고 있지만, 지금 2030세대가 할머니가 되면 현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될 것 같아요. 그때가 되면 젊은 세대와 낭만에 관해 논할 수나 있을까요
임다운 할머니를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나이를 먹어도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젊은 친구가 있을까 하고요. 동시에 지금의 노년과 우리가 훗날 맞이할 노년은 꽤 다를 것 같아요. 우리 세대는 결혼하지 않은 친구도 많고,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각자 다른 선택을 하죠. 지금처럼 혈연 중심의 관계 망에 기대기 어려운 사람이 훨씬 많겠죠. 그래서 할머니가 ‘길동무’라고 부르는 동네 사람처럼 혈연이 아니어도 일상을 함께 나누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저 역시 나이가 들수록 그런 관계를 많이 만들어가며 살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현실 앞에서 임봉근 작가는 담담한가요
임봉근 늙는다는 건 쓸쓸한 일이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살지 못했으니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아이 키우느라 아무것도 못했다는 마음도 있고. 어느 날 거울을 봤더니 불현듯 낯선 노인이 보여 자세히 봤더니 나더라고. 깜짝 놀랐잖아. 나도 이렇게 늙었구나 싶었지.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부모 덕에 배웠고 지금도 신문과 뉴스를 보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는 거야. 복지관 사람들에게 시사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게 재밌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웃음).
손녀가 남양주로 오는 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재미난 일상으로 채우는 할머니에 관해 읽으며 길에서 마주하는 할머니들이 새롭게 보였어요. ‘저 할머니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취향을 갖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생겼죠. 그러다 우리 할머니의 취향도 떠올리고
임다운 맞아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하는 지점이기도 해요. 길에서 마주치면 우리 할머니도 그냥 흔히 지나치는 ‘평범한 할머니’로 보일 거예요.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할머니 역시 끊임없이 욕망하고,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죠. 여전히 이상형 조건이 확실하고, 가곡을 좋아하는 음악 취향이 명확하고, 매일 아침 쏟아지는 시사에도 밝죠
임다운 제가 만난 할머니들도 그래요.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오면서 각자 한 편의 대하소설 같은 서사를 품고 계세요. 마냥 행복한 사람도, 마냥 불행한 사람도 없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희생적이고 평면적인 존재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과거의 이야기만 가진 채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새로운 관심사를 만들고, 취향을 발견하고, 유행을 좇죠.
최근에는 어떤 유행이 휩쓸고 지나갔나요
임다운 패션 유행, 영양제 유행, 다양해요. “요즘은 알부민이 좋더라” “효소가 유행이더라” 같은 이야기를 복지관에서 나누시고요. 겉으로 보기엔 죄다 비슷한 꽃무늬 옷 같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흐름이 있어요. 우리 할머니도 원래 유행이나 대중문화에 큰 관심이 없는 분이었는데, 코로나 시기에 TV를 보다 트로트 가수 장민호에게 완전히 빠졌잖아요. 본인도 몰랐던 취향을 새롭게 발견한 모습을 보는 게 저는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완성된 채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임봉근 작가는 임다운 작가와 함께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임봉근 먹는 취향이 잘 맞아. 아들하고 밥 먹으면 서로 먹고 싶은 게 맞지 않을 때가 많은데, 다운이는 내가 먹고 싶은 걸 물어보면 같이 가줘. 그게 즐겁지. 내가 좋아하는 책도 잘 사줘. 먹는 것과 책, 이 두 가지만 잘 맞아도 더 바랄 게 없어.
임다운 작가는 할머니와 어떤 순간에 가장 행복감을 느끼나요
임다운 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할머니를 찾아가는데, 갈 때마다 할머니가 너무 반가워하시죠. “1시에 도착해” 하고 가볍게 말해도 할머니는 훨씬 일찍부터 역에 나와 계세요. 걸음이 느리니까 아침부터 미리 산책로를 서성이고, 벤치에 앉아 계셨다가 나무 그늘로 옮기셨다가 하면서 제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저는 늘 바쁘게 살잖아요. 회사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한 달에 한 번 찾아가는 건데, 할머니에게는 그 하루가 한 달 내내 기다린 하루더라고요. ‘내가 정말 잘 왔구나. 시간을 내길 잘했구나.’
임다운 작가에게 자주 하는 말은
임봉근 다운이에게 자주 하는 말은 “마음 변치 말라”는 말이지. 한 달에 한 번씩 오던 아이가 한 번은 두 달 만에 온 적 있어. 그래서 “네가 이제 지쳤구나” 했더니, 다운이가 “지친 게 아니라 회사 일이 바빴을 뿐”이라더군. 그 말이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나더라고.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이 아이가 혹시 마음이 변했을까 노심초사했나 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눈물 나지 않았는데, 그 말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더라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임다운 할머니가 쓰신 파트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새해에도 친해지자.’ 생각해 보면 ‘친해지자’는 친구끼리는 자연스럽게 하는 말인데, 가족끼리는 잘 하지 않잖아요.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되게 특별했어요. ‘할머니가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우리 관계에 가족애만 있는 게 아니라 우정도 짙게 자리 잡고 있구나’ 하는 걸 다시 느끼게 해준 문장이거든요. 막상 저는 할머니한테 친해지자는 말은 못했어요. 답신을 꼭 하고 싶어요. 우리 함께해 온 36년보다 앞으로 나날이 더 친해지자고요!
Profile
」임다운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나 광고회사에 근무하며 스탠드업 코미디나 판소리 같은 기술을 연마한다. <오늘내일하는 사이>의 공동 저자이자 임봉근의 손녀로서 재미있는 일상을 살아간다.
임봉근 1931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96세에 작가로 데뷔했다. 자연과 문학을 사랑하고, 노인복지관의 이야기꾼이며, 유행에 민감한 할머니다.
Credit
- 에디터 정소진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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