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식객의 맛집놀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세상의 산채가 다 똑 같은 산채가 아니다. 지리산이 키워낸 건강한 나물들로 밥상을 차리고 섬진강 맑은 물에서 건져올린 은어와 참게, 벚꽃 피는 계절에만 올라온다는 벗굴까지 얹고 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 :: 건강한, 설레이는, 친근한, 엘르,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건강한,설레이는,친근한,엘르,엘라서울

[Profile]이름: 낭만식객성별: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하는 양성성 소유자취미: 한 종목에 꽂히면 석 달 열흘간 한 놈만 팬다.특징: 사주팔자에 맛 미(味) 자가 있다고 용한 점쟁이가 일러줌과제: 어지러운 중원에 맛의 달인, 진정한 고수 찾기 information단야식당 055-883-1667 쌍계사 십리 벚꽃길은 그 길이 하도 아름다워 지나는 연인은 혼례를 치르게 된다고 해서 혼례길이라고도 불린다. 쌍계사 바로 앞에서 가정집을 개조한 듯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의 맛에 한 번 중독되면 매년 봄을 설레이며 기다리게 된다. 똥오줌 못 가리던 애기 기자시절, 지리산 취재를 갔더랬다. 초보 운전 주제에 밤길 국도 달려 내려간 곳이 매화마을로 유명한 홍쌍리 씨의 청매실농원이다. 그때는 간판 하나만 덩그러니 달려 있고 입구도 변변치 않아 산길로 잘못 올라가는 바람에 괜스레 전화 귀 어두운 아주머니 탓만 했더랬다. 김장독에서 방금 꺼낸 김치 한 포기에 구수한 된장찌개 밥을 내오시며 이런 저런 나물반찬으로 시장한 저녁상을 차려주셔서 맛나게 잘 먹었더랬다. 처음 뵈는 양반이 참 곱고 말씀도 조분조분 잘 하시길래 옛날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산비탈에 밤송이 떨어지면 또르륵 굴러내리는 산비탈에 시집 온 홍쌍리 씨는 날마다 우는 게 일이었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식구들 입에 풀칠이나 하겠다고 시아버지 김오천 씨는 광양서 똥지게 퍼나르며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힘들고 외로워서 눈물을 달고 살았던 홍상리 씨는 봄에 매화꽃이 온 산에 가득하자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단다. 그때부터 온 평생을 매화에 바친 홍쌍리의 청매실농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옛날 고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가족사와 신산한 인생살이를 꺼내자 누구라 먼저 할 것도 없이 줄줄 눈물이 났다. 처음에는 소매로 눈가 찍어내리다가 나중엔 결국 어깨 들썩이며 서로 부둥켜 울고 말았는데 결국 그렇게 울다가 지쳐 잠이든 것 같다. 일어나보니 또 맛깔 난 아침밥상에 앉아 좀 머쓱하게 밥을 먹고 매실장아찌며 매실고추장이며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주시는 품이 딱 우리 엄마 같았다고나 할까. 지금도 그분을 떠올리면 아이처럼 맑고 고운 얼굴이 생각나 가슴이 촉촉해지곤 한다. 그때는 참 청매실농원 주변 12만평쯤이 매화밭이었다면 지금은 구례부터 하동까지 온 산비탈이 다 매화다. 장관이다. 산수유로 신호탄을 알린 지리산 꽃잔치의 시작은 매화를 거쳐 벚꽃에서 절정을 이룬다. 섬진강과 함께 달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19번 국도를 따라 벚꽃에 바람에 흩날리는 그 길을 달리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차창으로 들이닥치는 향긋한 꽃향기에 취해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보기 힘든 낭만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실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요 몇 년은 해마다 꽃피는 철이 오면 꼭 지리산 언저리를 헤매고 온다. 때로는 매화가 지고 벚꽃이 피기 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매화가 절정이기도 하고 때로는 벚꽃이 펑펑 터졌을 때이기도 하다. 사실 아무렴 어떠랴 싶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거기에 기댄 맛난 지리산 먹을거리가 있으니 꽃을 좀 놓쳤다 싶더라도 그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다. 꽃보다 맛이라고 할까. 섬진강하면 우선 재첩을 많이 떠올리지만 요즘 그 양이 많이 줄었다. 지리산 맑은물이 흘러내려 그나마 채취가 가능했던 곳이지만 예전에 사람의 손으로 직접 건져올리던 방식에서 강바닥을 마구 긁어대는 바람에 종자도 줄고 강바닥이 자꾸 높아져 서식량도 줄었다. 대신 벗굴이 명물이다. 벚꽃 필 때 난다고 해서 벚굴 혹은 벗굴로 불리는데 어른 손바닥만 한 큼직한 크기에도 전혀 비리지 않고 향긋하게 씹히는 맛이 가히 일품이다. 보통 7개 정도 올라오는 한 접시에 3만원 정도 하는데 일단 먹어보면 그게 비싼 것도 아니고 양도 적은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벗굴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잡힌다.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올라온 녀석이라 비릿한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 생선인데도 비린내 나지 않고 향긋한 수박향이 나는 것으로 은어도 섬진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회로 먹기도 하고 튀겨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한다. 어른 굵은 가운데 손가락만 한 것이 빙어나 양미리하고는 한 차원 다른 맛으로 고상한 품격을 낸다. 강에서 나는 놈으로 참게탕이 또 있다. 작아서 살을 발라내 먹기에는 빈정 상하지만 간장게장으로 담가 조그만 게딱지에 밥을 비벼먹으면 아휴 꿀맛. 빨갛게 탕을 끓여먹기도 하는데 뭐 그건 취향대로 할 일이다. 강가에 솥단지 걸어놓고 신선한 야채 둠벙둠벙 썰어넣어 참게 몇 마리 넣어 시원하게 끓인 것 아니고서는 부르스타 위에 스테인레스 전골냄비에 바글바글 끓어가는 참게탕에서는 왠지 깊은 맛을 못 느끼겠더라. 한순간 빵 터지는 벚꽃이 지고 나면 먼저 피었던 매화꽃이 푸르스름한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요놈이 또 장관이다. 눈부시게 하얀 꽃비 대신 알알이 영근 청매실이 건강하게 나무에 달린 광경은 생산의 신비를 눈으로 체험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이때쯤 곰취, 머위, 취나물, 숙갓, 고비, 참취, 달래 같은 봄나물이 제 시절을 만난다. 오랜 단골인 화엄사 앞의 그옛날산채식당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맛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아껴놓은 보물 같은 곳은 또 있다. 쌍계사 앞의 단야식당이다. 사찰음식에 꽂힌 주인 아주머니가 전국 절집을 돌아다니며 배운 들깨국수와 산채가 제 맛이다. 구수한 들깨국수는 일명 사찰국수라고도 불리는데 한 그릇 보약을 들이키는 것처럼 진하고 몸에 좋은 느낌이 팍팍 든다. 주인장도 이름을 모르는 마당의 수령 꽤 되어보이는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거기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안 들이킬 수가 없다.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물은 슴슴하니 결코 화려한 재기로 자기 뽐내는 일 없이 그렇게 주변 것들과 어울려 젓가락질 자꾸 부추기고 주인장이 문 닫고 집에 가겠다는 데에도 앉아있는 이는 엉덩이를 뗄 줄 모르고 자꾸 하늘만 바라본다. 나물뿐이랴. 금방 무친 새콤달콤 도토리묵과 인심좋게 둥글넓적하게 부친 파전도 안 먹고는 못 배기지. 나물은 맛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파 마늘 향이 너무 강해도 안되고 참기름 들기름이 지나쳐도 안된다. 씹으면 씹을수록 나물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맛이 배어나와야 한다. 고수들은 장맛과 나물맛을 보면 그 집 손맛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법이다. 산채하면 유명한 식당들이 저 오대산, 점봉산, 설악산 근처에 오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월에 장사가 없어 조금씩 맛이 변해간다. 그 와중에 아무리 힘들어도 원칙을 지켜서 변치 않는 맛을 내는 반야식당 같은 곳이 있어 팔도 맛 여행이 섭섭치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산에서 나는 야채를 그처럼 다양하게 먹는 나라도 없다. 생으로 먹고, 삶아서 먹고, 말려서 먹고, 튀겨서 먹고, 쪄서말려서튀겨서 먹고. 별거 아닌 나물 같지만 그래서 손이 제일 많이 가는 게 나물이다. 정성스럽게 뽑아다가 다듬고 준비하는 과정이 보통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 수고가 어려워 요즘엔 중국산 나물들이 깊은 산 속 좌판까지 점령하게 되었지만. 그나마 지리산 언저리에는 아직 할매들이 손수 캔 나물들을 인심 좋게 내놓고 계시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고맙다. 지리산아, 고맙다. 단야식당아*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5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