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엘 바디 궁에서 열린 디올 2020 크루즈 컬렉션의 키 피스를 입은 모델들.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는 디테일. 수마노협회 소속 여성 장인이 도자기 빚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공식 런치와 디너 행사에 사용된 접시는 수마노협회 장인들이 손수 제작한 것. 아프리카산 원단을 취급하는 유니왁스와 협업한 왁스 프린트 패브릭. 이국적인 패턴과 웨어러블한 디자인이 결합한 피스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크루즈 컬렉션은 디자이너들에게 꿈과 환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컬렉션이 열리는 4대 도시를 벗어나 공간 제약도 없으니 디자이너들은 쇼를 선보일 장소 선택에 한층 신중을 기하며, 그렇게 정한 장소에서 컬렉션에 대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지난 4월 29일,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지중해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도시이자 2020년 아프리카 문화 중심지로 선정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전 세계 프레스와 패션 피플을 초대했다. 그리고 머나먼 이국으로의 여정에 <엘르> 코리아도 함께했다. 마라케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순간부터 마음이 들떴다. 마라케시를 무척 사랑했던 이브 생 로랑의 자취와 ‘마조렐 블루’의 발현지이기도 한 마조렐 정원, 붉은 흙으로 지어진 건물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며 살펴본 도시 경관은 온통 적갈색의 향연이었다. 오직 하나로 통일된 색채, 일관된 모양의 주택들을 보고 있으니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건축양식을 이해하게 됨과 동시에 이 낯설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목도하게 될 디올 크루즈 컬렉션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높아져갔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전 세계의 프레스와 셀러브리티들은 컬렉션이 펼쳐질 엘 바디(El Badi) 궁전으로 향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름다운 궁전’이란 의미를 지닌 엘 바디 궁전에는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이슬람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마라케시의 붉은 흙으로 지어진 높다란 벽과 안팎으로 어우러진 자연경관에 압도되려던 찰나, 엘 바디 궁에 완전한 어둠이 내렸고 런웨이 중앙 연못에 촘촘하게 떠 있는 램프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곧이어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디올 2020 크루즈 컬렉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보리 컬러의 프린지 코트 룩으로 시작된 컬렉션은 이국적이고 화려한 패턴과 섬세한 자수 장식의 피스들로 이어졌다.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이브닝드레스와 웨어러블한 데님 아우터웨어, 팬츠가 공존했고, 기존 디올 컬렉션에서 볼 수 없던 생경한 디자인과 패턴도 눈에 띄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컬렉션에 앞서 이번 컬렉션의 테마를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라고 밝혔다. 둘 혹은 그 이상의 집단이 공통적으로 지닌 의견이나 관심사를 뜻하는 ‘커먼 그라운드’를 통해 디올의 2020 크루즈 컬렉션이 다양한 문화와 사람 간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완성된 다국적 프로젝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런웨이에서 느꼈던 생경함도 과감한 컬래버레이션의 결과였다. 특히 이번 크루즈 컬렉션에 사용된 모든 프린트를 아프리카산 원단을 취급하는 공장이자 스튜디오인 유니왁스와 협력해 개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00% 메이드 인 아프리카’의 특별함은 물론이고 현지 산업과 경제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의 원단과 패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인류학자 앤 그로스필리(Anne Grosfilley)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그런가 하면 2016 LVMH 남성복 디자인 부문 수상자인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Grace Wales Bonner)에게는 디올의 아이코닉한 ‘뉴 룩’을 그녀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도록 요청했다. 자메이카 출신이자 영국인인 그녀는 자신의 두 혈통에서 비롯된 문화유산에서 영감을 끌어내 독특한 바 재킷과 스커트를 완성했다. 흑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작품으로 유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티스트 미칼린 토머스(Mickalene Thomas)도 합세해 ‘뉴 룩’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담았다. 아프리카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파테 우에드라오고(Pathe′ Oue′draogo)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기리는 프린트가 장식된 셔츠를 선보였고, 런웨이 위의 모델 머리에 두른 모자와 터번은 모자 디자이너 스테판 존스(Stephen Jones)가 카리브해 출신인의 마틴 헨리(Martine Henry), 나이지리아 출신의 다니엘라 오세마데와(Daniella Osemadewa)와 협업해서 만든 것. 그리고 이 방대한 컬래버레이션은 런웨이 밖으로도 이어졌다. 공식 런치와 디너에 사용됐을 뿐 아니라 쇼가 열린 엘 바디 궁전에 장식된 도자기와 쿠션, 패브릭은 전부 모로코 부족 여성의 전통 공예 기술을 되살리고자 설립된 수마노협회(Sumano Association)에서 제작했다. 개인적으로 런웨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첫 번째 룩의 프린지 코트 역시 수마노협회 여성 장인들이 직접 직조한 패브릭에 수작업으로 컬러를 입혀 완성한 것이다. 붉게 타오르던 런웨이의 불이 꺼진 후, 엘 바디 궁전은 1970년대로 변신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함께 시작된 애프터 파티의 분위기는 팝 디바 다이애나 로스가 무대에 오르자 더욱 고조됐고, 무르익어가는 파티와 함께 마라케시의 밤은 저물 줄 몰랐다.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통해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모로코의 풍부한 문화와 전통뿐 아니라 디올의 유산과 노하우를 향한 마리아의 열렬한 애정과 존경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단순히 미적 측면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각 고유의 특성을 포용해 디자인으로 구현했다는 것, 나아가 전 세계적 화두인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 무엇일지, 그녀가 머릿속에 그리는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