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오버사이즈 다음으로 유행한다는 의외의 핏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입고 있다는 '슬라우치'가 뭐길래?

프로필 by 박지우 2026.09.09

오버사이즈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실루엣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슬라우치(Slouchy)’죠. 부드럽고 넉넉한 볼륨에 일부러 힘을 뺀 듯한 불완전함을 더한 것이 특징으로, 옷의 형태를 반듯하게 고정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너지게 만드는 실루엣입니다.


완벽한 핏에서 힘을 빼면

타임 2026 F/W 컬렉션

타임 2026 F/W 컬렉션

최근 옷장에 작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한동안 오버사이즈에 열광하다가, 보다 몸에 딱 맞는 슬림한 실루엣으로 방향을 틀었던 패션계가 다시 새로운 볼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그 중심에 등장한 것이 바로 슬라우치입니다. 슬라우치의 핵심은 단순히 옷을 크게 입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볼륨은 충분하지만 그 형태가 꼿꼿하게 서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고 구겨지며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흐르는 것이 중요하죠. 마치 옷이 더 이상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슬라우치 실루엣에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분명 여유로운데 무작정 헐렁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꽤 정교한 균형이 숨어 있거든요. 핵심은 ‘적당히 루스한’ 상태를 가장 멋스럽게 구현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걸친 듯하지만 실제로는 소재의 무게와 볼륨, 길이와 비율을 계산해야 완성되는 실루엣이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몇몇 액세서리에 국한된 짧은 유행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흐름은 예상보다 빠르게 커지고 있죠. 슬라우치는 이제 가방과 부츠를 넘어 재킷과 데님, 팬츠 등 옷 전체로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완벽하고 매끈하게 정돈된 실루엣에서 벗어나 조금 더 본능적이고 개인적이며 살아 있는 스타일을 찾는 지금의 패션 감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시작은 부츠

슬라우치 트렌드는 가장 먼저 발끝에서 포착됐습니다. 2024년 겨울, 여러 하우스의 컬렉션에서 슬라우치 부츠가 눈에 띄게 등장하기 시작했죠. 발목에 딱 맞게 떨어지는 전통적인 부츠와 달리, 부드러운 소재의 부츠 통이 힘없이 주저앉듯 발목 주변에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죽이나 스웨이드 소재가 만드는 주름과 볼륨, 때로는 작은 가죽 주름이 만들어내는 ‘군살’ 같은 디테일까지 기존 부츠라면 최대한 없애려 했을 요소들이 오히려 이 스타일에서는 매력으로 작용합니다. 완벽하게 각 잡힌 부츠보다 조금 흐트러진 형태가 훨씬 쿨하고 현대적인 인상을 만들어주죠.


이런 부츠가 사랑받는 이유는 스타일링에 힘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분위기를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룩은 여유롭고 무심해 보이지만 결코 대충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포인트죠. 스웨이드 소재를 선택하면 1970년대 특유의 보헤미안 무드와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살아나고, 매끈한 가죽 소재를 고르면 한층 세련되고 도시적인 느낌을 더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26-2027 F/W 시즌에는 슬라우치 부츠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흐르는 듯한 드레스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는 스키니 진, 미디스커트, 남성적인 실루엣의 코트까지 예상보다 다양한 아이템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죠. 어떤 룩에 매치하느냐에 따라 분위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점도 강점입니다. 패션피플들이 이 부츠를 단순한 시즌 트렌드가 아니라 스타일을 완성하는 하나의 도구처럼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가방도 힘을 빼요

끌로에 2026 F/W 컬렉션

끌로에 2026 F/W 컬렉션

발끝에서 시작된 슬라우치 무드는 곧 가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사실 부드러운 가방의 귀환은 2023년 겨울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죠. 보헤미안 시크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딱딱한 구조의 백보다 자연스럽게 형태가 무너지는 가방이 패션피플의 선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가방은 형태를 얼마나 완벽하게 유지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각이 정확하게 살아 있는 구조적인 백이 클래식의 상징처럼 여겨졌죠. 하지만 이제는 반대입니다. 팔 아래에 끼웠을 때 자연스럽게 접히고, 소재의 무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며, 들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실루엣까지 변하는 슬라우치 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슬라우치 백은 하나의 정해진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부터 캐주얼하고 편안한 모델까지 폭이 넓고, 미니멀한 형태와 그래픽적인 디자인도 모두 슬라우치 무드 안에서 공존하죠. 가죽이나 스웨이드처럼 소재의 질감이 돋보이는 모델부터 보다 가벼운 데일리 백까지 선택지도 다양합니다. 다만 형태가 살짝 흐트러져 있고, 그 자연스러운 무심함이 룩에 깊이를 더한다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오버사이즈와는 달라요

폴로 랄프로렌 2026 F/W 컬렉션

폴로 랄프로렌 2026 F/W 컬렉션

그렇다면 슬라우치는 오버사이즈와 정확히 무엇이 다를까요? 오랫동안 패션계에서 볼륨을 담당했던 것은 단연 오버사이즈였습니다. 거대한 코트와 과장된 어깨, 몸을 거의 덮어버릴 정도로 넓은 팬츠까지, 옷의 크기 자체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방식이었죠.


그러다 한동안 보다 몸에 가까운 실루엣이 돌아왔습니다. 허리와 어깨의 선을 또렷하게 잡고 신체의 형태를 드러내는 옷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죠. 그렇다고 우리가 오랜 시간 익숙해진 풍성한 볼륨을 완전히 버리기는 아쉬웠을 겁니다. 슬라우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합니다.


슬라우치는 오버사이즈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석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단순히 몸을 거대한 천으로 감싸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옷 자체에 태도와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이죠. 볼륨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형태가 지나치게 그래픽적이거나 딱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짝 무너지고, 접히고, 구겨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생동감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계산된 불완전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나치게 정교한 XXL 실루엣이 잠시 힘을 뺀 듯한 모습입니다. 재킷의 어깨선은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고, 데님은 더욱 넉넉해지며, 팬츠 역시 몸을 타고 흐르듯 여유를 갖기 시작했죠. 앞으로는 이런 슬라우치 무드가 의상의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인디 슬리즈와 메시걸 트렌드

끌로에 2026 F/W 컬렉션

끌로에 2026 F/W 컬렉션

슬라우치의 인기는 단순히 새로운 실루엣이 필요해서만은 아닙니다. 최근 패션 전반에서 지나치게 매끈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스타일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죠. 모든 요소가 정확한 위치에 놓인 듯한 스타일보다 조금 더 즉흥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을 선호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대의 '인디 슬리즈(Indie Sleaze)'입니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 듯한 자유분방함과 어딘가 흐트러진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이 미학이 다시 돌아오면서, 완벽하게 다듬어진 스타일과는 다른 매력이 주목받고 있죠. 여기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된 ‘메시 걸(Messy Girl)’ 무드 역시 이러한 변화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메시 걸 스타일은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머리부터 옷차림까지 조금 흐트러져 있어도 괜찮고, 오히려 그런 자연스러운 불완전함이 스타일의 일부가 되죠. 중요한 것은 ‘대충 입은 것’과 ‘대충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것’ 사이의 미묘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슬라우치가 등장합니다. 슬라우치는 메시 걸 특유의 무심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옷의 형태로 옮겨온 듯한 실루엣이죠. 반듯하게 각을 잡는 대신 조금 흘러내리게 하고, 완벽한 균형 대신 의도적인 흐트러짐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그렇다고 오버사이즈가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슬라우치는 오버사이즈가 가진 넉넉한 볼륨에 한층 더 느슨하고 자유로운 태도를 더한 새로운 버전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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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Laura Londas
  • 사진 Launchmetrics Spot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