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뒤에서 펼쳐지는 호러 버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백룸'
A24 스타일의 오싹한 미감이 돋보이는 비주얼은 실체 없는 불안을 가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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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백룸>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도시 외곽에서 대형 가구점을 운영하는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은 신경증에 시달린다. 건축가를 꿈꿨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문을 연 가게에는 파리만 날리는데 서른 줄에 대학원에 입학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 밖에 없다. 유명한 상담사 메리(레나테 레인스베)를 찾아가 봤지만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매일 술을 마셔서 아내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클락은 메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 커녕 알콜 중독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불만이다.
영화 <백룸>
해결책 없는 불안의 연쇄는 루틴처럼 굳어졌고, 클락의 판단력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현실을 비관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모두가 클락 탓을 한다고 믿는 것이다. 클락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가구점, '클락 선장의 오스만 제국'이다. 갑자기 TV며 전등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업자를 불러 보니 건물 전기 회로 일부가 '반대 방향'이거나 '그저 붙어만 있는' 상태였다.
새로 길을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은 회로를 일단 방치해 두던 어느 밤, 매장 전체의 전등이 점멸을 반복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다시 회로를 만져보려 내려간 지하에서 클락은 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벽에 손을 대자 그 안의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룸' 괴담을 통해 숱하게 재생산된 노랗고 텅 빈 풍경이 펼쳐지는 건 여기서부터다. 클락은 가구점 아르바이트생인 바비(핀 베넷)와 캣(루키타 맥스웰)에게 벽 뒤의 공간으로 함께 가서 이 기이한 모습을 촬영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백룸>
한편 메리는 점점 이상해지는 내담자 클락에게서 과거의 불안을 떠올린다. 클락의 이야기가 메리의 트라우마와 직접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모종의 트리거로 작용하는 듯하다. 어릴 적 집이 철거되고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메리의 기억은 늘 곁에 두는 시멘트 조각에 깃들어 있다. 그건 어머니와 옛 집에서 남겨 온 단 하나의 증거다. 클락이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잠적하자, 메리는 클락의 가구점으로 향한다.
<백룸>은 감독으로 데뷔한 케인 파슨스가 '케인 픽셀즈' 시절에 구축한 '백룸' 세계관에 클락과 메리의 서사를 입히는 방식을 택했다. 거기서 나오는 서스펜스가 과도한 탓에 '백룸'의 본질,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비롯되는 공포는 기대보다 덜하다. 특히 극 중 인물들을 현실에서 '백룸'으로 옮기는 노클립 현상과 영화의 내러티브를 연결하는 고리가 헐겁다. <백룸>만 두고 보자면 노클립 현상의 발현 조건 중 하나는 자신의 의지다. 그런데 클락이 몇 번이고 '백룸'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현실적인 동기가 부족하다. 따라서 '백룸'은 누군가의 꿈 혹은 뇌 속이거나, 이를 증폭시켜 공간화한 존재로 생각해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백룸'은 클락이 스스로 만들고 그 안에 고립되길 택한 가구점에 생성된다. 여기엔 원작의 '에이싱크 재단'도 등장한다. 세계 곳곳의 '백룸'을 탐색하는 에이싱크 재단이 MRI 기계를 만드는 회사였다는 사실은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듯하지만, 그조차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영화 <백룸>
<백룸>은 비슷하게 리미널 스페이스를 다룬 <8번 출구>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차임>을 떠올리게 한다. 반복되는 스트레스 속에서 감각을 왜곡하는 식으로 삶을 마취하던 현대인이 루틴을 깨는 미세한 균열 탓에 결국 파국까지 치닫게 되는 이야기다. 뒤틀린 자기연민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클락이 가구점 전등의 점멸이라는 자극에 만들어 낸 존재가 '백룸'일지도 모르겠다.
A24 스타일의 호러 미감이 돋보이는 비주얼은 <백룸>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다. 끝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에게 무한히 이어지는 공포를 선사하는 노란 공간의 공기까지 스크린 너머로 전달되는 듯하다. 영화를 보기 전 어느 정도 '백룸' 세계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관람에 도움이 될 것이다. 27일 개봉.
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주)바이포엠스튜디오 · 리바이브콘텐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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