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아트부산 2024'가 보여준 것

부산은 한국의 마이애미가 될 수 있을까?

프로필 by 이경진 2024.05.29
소소했지만 의미 있었다. 상반기 국내 최대 규모 아트 페어인 ‘아트부산 2024’를 둘러본 소감이다. 경기침체의 그늘이 미술시장에도 드리워져 미술 애호가들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가 아트부산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페어 직전까지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아트 페어가 너무 많이 열렸다는 점도 차분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전에 국내에서는 ‘화랑미술제’ ‘아트오앤오’ ‘디아프(대구아트페어)’ 등이 열렸고, 같은 기간 국외에서는 ‘타이페이 당다이’와 ‘테파프 뉴욕’ 등이 개최되면서 아트부산에 참여했던 기존 갤러리 일부가 불참했다. 자연스럽게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도 갈렸다. 참여 갤러리 숫자는 지난해 145개에서 20여 개가 줄어든, 129개였다. 갤러리 현대, 아라리오 갤러리, 더 페이지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 등 참신한 기획력을 과시했던 일부 갤러리가 빠져 페어의 다양성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대신 보다 쾌적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페어를 즐길 수 있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호황기 때의 ‘오픈 런’ ‘완판 행렬’은 없었지만, 지난해와 비슷하게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페어를 방문해 미술에 대한 관심이 여전함을 보여줬다. 주최 측은 줄어든 갤러리 자리에 ‘메인’ 섹션과 차별되는 ‘퓨처’ 섹션을 마련했다. 비스킷 갤러리, 스페이스 카달로그, 페이지룸에잇, 프람프트 프로젝트 등 신진 갤러리를 적극 유치해 자칫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는 페어의 문턱을 대폭 낮췄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도쿄와 가루이자와에서 참신한 기획력을 바탕으로 청년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해 온 비스킷 갤러리가 미유 야마다 작가의 작품을, ‘옛것에서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뜻의 이름처럼 온고지신의 미학을 내세운 학고재가 미술계의 새로운 물결로 허수영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더불어 망원동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별관은 윤일권 작가의 실험성 강한 작품을 내놓아 판매에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아트부산이 캐치프레이즈로 내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4일장’이라는 컨셉트에 부합하는 현장이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었다. 특별전 섹션을 강화하고 국내외 미술 전문가를 초청해 미술계 주요 이슈를 소개했으며, 아티스트와 관람자의 접점을 높이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갤러리 부스 사이에 배치된 ‘커넥트(Connect)’라는 아홉 개의 특별전 섹션은 주연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가 총괄 기획해 페어가 아닌,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커넥트의 대표 섹션인 ‘허스토리’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일본), 정강자(한국), 샤오 루(중국) 등 아시아 현대미술 1세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현대미술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신디 셔먼, 제니 홀저, 키키 스미스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 ‘존 지오르노’ 섹션은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와의 협업으로 뉴욕 아트 신에 존재감을 드러낸 존 지오르노를 소개하며 그의 역사적 프로젝트인 ‘Dial-A-Poem’을 통해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엄격한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독자적인 추상미술 세계를 펼치고 있는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 주진스와 탄핑, 천원지, 마수칭, 옌레이 등의 작품을 한 데 모은 ‘포커스 아시아: 중국’에도 관람자의 발길이 이어졌다. 메인 섹션의 대형 갤러리 또한 특별전에 호응하는 수준급의 작가와 작품을 내세웠다. 컬렉터의 입맛에 맞는 작가와 작품의 겹침 현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기획전처럼 선보여 페어의 질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탕 컨텀포러리 아트는 웨민쥔과 주진스, 전광영, 우국원 등의 작품을, 가나아트는 전속 작가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으로 시선을 모았다. 무엇보다 제이슨함, 학고재, 선화랑 등 중형 갤러리들의 선전이 돋보였는데, 이들이 내세운 중견 혹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은 볼거리뿐 아니라 판매 실적에도 기여해 향후 이들의 행보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토니 저스트의 ‘I Call Them Joy’(2023).

토니 저스트의 ‘I Call Them Joy’(2023).

CB 호요의 ‘A Stranger Somewhere’.

CB 호요의 ‘A Stranger Somewhere’.

Highlights in Art Busan 2024
조지 콘도, 게르하르트 리히터, 쿠사마 야요이, 이우환, 박서보, 이배 등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대가의 작품 대신 참신한 기획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음 행보가 주목되는 갤러리와 이들이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을 ‘팬심’으로 뽑았다. 에프레미디스와 토니 저스트 독일 베를린 기반의 에프레미디스는 세계적 아트 페어 참여 노하우를 가진 갤러리로 지난해 서울에 분점을 열었다. 페어에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 한 점으로 관람자의 발길을 묶었던 곳 중 하나. 아우라 로젠버그, 어니 왕 외에 에프레미디스는 서울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토니 저스트(Tony Just)의 작품을 소개해 주목을 끌었다. 그의 불완전한 추상 형태와 반복적인 수행성은 한국 컬렉터들이 좋아하는 단색화와 맞닿아 있다. 위 콜렉트와 씨비 호요 마드리드를 베이스로 하는 위 콜렉트는 스페인에서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갤러리 중 하나다. 올해 처음으로 아트부산에 참여해 아나 바리가, 카를라 후엔테스 등 세계적 스페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중 쿠바 하바나 태생의 씨비 호요(CB Hoyo)는 텍스트 기반의 시니컬하고 도발적인 작품으로 급부상한 작가. 그의 수백만 원짜리 판화 작품도 젊은 컬렉터들의 위시리스트에 포함돼 있다.

 데이비드 서먼의 ‘Deeply Ordered Chaos’(2023).

데이비드 서먼의 ‘Deeply Ordered Chaos’(2023).

샤 은디아예의 ‘Badou Boy’(2022).

샤 은디아예의 ‘Badou Boy’(2022).

띠오와 데이비드 서먼 띠오는 국내외 작가를 가리지 않고 동시대 미술을 조명하는 전시를 선보이며, 컬렉팅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갤러리 중 하나다. 최근까지 영국 출신 데이비드 서먼(David Surman)의 개인전을 치렀는데, 아트부산에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데이비드 서먼의 작품은 인간 중심적 사고로 위기를 맞은 자연을 그린다. 다소 진부한 주제지만, 부조화적인 색들의 충돌, 비정형적 구도와 모티프의 배치, 거친 붓 터치 등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제이슨함과 샤 은디아예 아프리카 세네갈 출신 샤 은디아예(Cheikh Ndiaye)는 수도 다카르의 건축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아프리카 특유의 색채를 잘 구현한 작가로 알려졌다. 2020년부터 제이슨함 갤러리가 각종 페어와 전시로 그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올해는 아트부산뿐 아니라 8월에 열릴 ‘부산비엔날레 2024’ 참여 작가로 일찌감치 선정돼 행보가 기대된다.


구정아의 ‘SS GW[Grey White]’(2023).

구정아의 ‘SS GW[Grey White]’(2023).

제프리 가브리엘라 몰리나의 ‘Swimmers’(2021).

제프리 가브리엘라 몰리나의 ‘Swimmers’(2021).

PKM 갤러리와 구정아 구정아 작가는 현재 열리고 있는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 향기를 매체로 국경을 초월한 예술적 경험을 제시하는 ‘오도마라 시티’로 주목받고 있다. 조각과 설치미술 작가로 더 유명하지만,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라는 타이틀 덕에 아트부산이 진행되는 내내 그녀의 추상화 한 점 앞에 무수히 많은 컬렉터들의 발길이 머물렀다. 이아 갤러리와 제프리 가브리엘라 몰리나 갤러리도, 이들이 소개하는 국내외 작가들도 모두 젊은 곳. 컬렉팅의 대중화를 위해 주로 국내외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컬렉팅 입문자라면 눈여겨볼 만한 갤러리다. 이아 갤러리는 시카고 예술대학을 졸업한 베네수엘라 출신의 제프리 가브리엘라 몰리나(Jeffly Gabriela Molina)의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리넨 위에 흙을 섞은 물감으로 채색한 작품은 특유의 정서를 자아내며, 사실적이되 진부하지 않은 구도와 공간 처리, 인물 묘사를 보여줬다.


 파올로 살바도르의 ‘Visitantes del Oeste’(2023).

파올로 살바도르의 ‘Visitantes del Oeste’(2023).

김길후의 ‘Untitled’(2022).

김길후의 ‘Untitled’(2022).

로비 드위 안토노의 ‘Lani’(2021).

로비 드위 안토노의 ‘Lani’(2021).

학고재와 김길후 이번 아트부산에서 학고재는 강요배, 김현식, 법관, 전광영 등 서울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부산 출신 김길후 작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해 이번 페어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 김길후의 작품은 거침없는 필선에서 속도와 힘이 느껴진다.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다작하며, 끊임없이 정진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중견 작가다. 갤러리 스테파니와 로비 드위 안토노 필리핀 마닐라에서 2007년부터 갤러리를 운영해 온 갤러리 스테파니는 전시와 국제 페어를 통해 차별화된 작가 라인업을 구축해 왔다. 올해 아트부산에서는 킴 보르하, 눈지오 파치, 젬 마그바누아 등 한국에서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중 인도네시아 스타 작가이자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로비 드위 안토노(Roby Dwi Antono)의 작품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MZ 컬렉터로 유명한 노재명의 컬렉션 중 하나로 유명해졌다.

미술의 향연은 계속된다
아트부산 이후에도 숨 고를 틈 없이 미술 축제는 이어질 예정이다. 6월 ‘울산국제아트페어’와 ‘아트페스타 서울’, 9월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 등을 비롯해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리면 7월 ‘도쿄 겐다이’, 11월 상하이 ‘아트 021’과 ‘웨스트번드 아트 & 디자인’, ‘도쿄 아트위크’,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 등이 이어진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민국 미술 축제로서 아트 페어뿐 아니라 8월 ‘부산비엔날레’와 9월 ‘광주비엔날레’까지 하나의 미술 축제로 묶어 민관 미술 행사와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미술의 향연에 흠뻑 빠지기에 앞서 ‘아트부산 2024’가 보여준 것을 바탕으로 알아두면 좋을 미술계 이슈들.
1 이제껏 아시아 미술의 허브 역할을 담당했던 홍콩이 정치적 불안을 이유로 컬렉터들의 발길이 주춤한 가운데 서울· 도쿄· 싱가포르· 대만 등 다음 주자들의 발 빠른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외 각 도시의 아트 페어는 지역 특성을 강조한 문화예술 관광 콘텐츠라는 복합 경험을 선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아트부산의 경우 ‘아트위크 프로그램’을 통해 부산의 예술과 문화 공간, 로컬 F&B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서를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했다. 특히 부산은 처음으로 <미슐랭 가이드> 발간 도시로 선정돼 아트 페어를 즐기면서 미식 여행을 겸한 관람자들이 많았다.
2 전 세계적인 부동산 시장의 불안과 임대료 상승은 미술시장에서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하고, 오프라인에서 진행하던 기존 업무의 상당 부분을 온라인으로 연계해 병행하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품 거래 플랫폼인 ‘아트시(Artsy)’의 ‘2023 아트 컬렉터 인사이트’에 따르면, 응답자의 80%가 지난 12개월 동안 온라인으로 미술품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아트부산 2024’에도 물리적 공간에 디지털을 결합한 아트 플랫폼을 제시했다. ‘아트라운드’라는 자체 앱을 개발해 갤러리 작품을 소개하고 가격을 명시하는가 하면,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비대면으로 문의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는 단순히 페어가 1회성으로 소모되지 않고, 갤러리와 컬렉터를 지속적으로 연계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페어뿐 아니라 최근 미술관 전시에 가면 작가와 작품 소개를 QR 코드로 대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3 2023년부터 미술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2023년 경매 현황에서 주목할 점은 세계적 대가의 작품이 추정치에 못 미치거나 유찰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가의 작품 판매 부진은 ‘아트부산 2024’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에 반해 대형 혹은 중급 갤러리가 선보이는 중견 작가나 블루칩 작가들의 판매가 호조를 보였다. 또, 작품을 파는 이보다 사는 이들이 유리한 시장이 형성돼 신뢰할 만한 갤러리가 제안하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거나 비엔날레 같은 굵직한 미술전 참여 작가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글 손지혜
  • 아트 디자이너 이소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ART BU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