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비엔나로 향하는 비행기, 읽고 있는 책의 저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공 위였다. 타이밍 좋은 우연이라 해야 할까? 작가의 이름은 1991년생 정치학자 율리아 에브너. 신분을 감추고 전 세계 극단주의 모임에 잠입한 취재기를 흥미진진하게 담아낸 책을 읽으며 곧 마주할 도시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을 상상했다.
19세기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품을 총망라하기 위해 지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첫째, 이렇게 다방면에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저널리스트의 활약이 보장되는 열린 도시일 것이다. 둘째, 이토록 첨예한 극단주의가 대립하는 유럽의 중심으로 향하니 두렵다! 물론 여행 직전에 으레 따라붙는 불분명한 상상력은 비엔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졌지만 말이다. 미리 홈페이지(www.viennacitycard.at)에서 신청해 둔 비엔나의 티머니, 비엔나 시티 카드를 찍고 지하철에 올랐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5분 남짓. 서울의 3분의 2에 달하는 도시 면적을 그의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180만 명이 널찍하게 사용 중이니 내심 아담한 수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비엔나에 머문 1주일은 이 도시에 켜켜이 쌓인 풍요로운 유산과 흔적을 몇 번이고 재확인하는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지난해 12월 레너베이션을 마치고 5년 만에 재개장한 비엔나 박물관의 테라스. 도시의 상징인 카를 성당의 거대한 돔이 보인다.
“비엔나의 물줄기는 알프스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에서는 수돗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것이 일상이죠. 물이 좋으니 와인도 훌륭할 수밖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주말에 근교의 와이너리를 찾는 겁니다. 친구들과 피크닉을 하며 도심을 바라보는 거죠.” 비엔나 ‘토박이’인 비엔나 관광청 소속 마티아스가 이 도시를 구석구석 사랑하는 것에는 의심이 없어 보인다. ‘비엔나(Vienna)’ 혹은 ‘빈(Wien)’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은 대부분 예술가의 것이다. 18세기의 모차르트와 베토벤부터 19세기에서 20세기를 잇는 클림트와 에곤 실레, 쇤베르크, 20세기의 훈데르트바서…. 클림트의 ‘키스’를 만날 수 있는 벨베데레 미술관은 한국인에게 특히 사랑받는 곳이고, 비엔나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조언은 “공연은 꼭 봐. 오페라든, 클래식이든”이었다. 그러나 시티 카드를 찍고 호텔이 있는 지하철역에 내린 나는 묵직한 과거의 문화유산보다 가볍고 발 빠르게, 2024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기록한 비엔나를 살피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했던 쇤부른 궁전의 거대한 녹지. 세계 최초의 동물원인 쇤부른 동물원도 부지에 있다.
비엔나를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 다뉴브와 도나우 강은 도시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독일어로 ‘그레첼(Gra..tzel)’은 영어의 ‘Neighborhoods(이웃 동네)’에 가깝다. 행정적으로 ‘딱’ 떨어지지는 않지만 비슷한 바이브를 공유하는 동네를 돌아보는 것은 지금 비엔나를 모색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호텔이 자리 잡은 슈투버 그레첼(Stuwer Gra..tzel)은 최근 떠오르기 시작한 지역으로, 과거 왕실의 사냥터였던 녹지다. 이곳은 1897년 만국박람회 때 탄생했으나, 여전히 생기 넘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건물이 있는 비엔나 경제경영대학 캠퍼스를 포함하는 프라터(Prater)까지 아우른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즐기는 것은 흔한 풍경. 전통 음식인 슈니첼과 오스트리아 와인을 곁들이길!
그레첼의 중심에는 으레 식료품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 꽃집 등 작은 가게들이 밀집한 ‘마켓’이 자리한다. 주말이면 한층 활기를 띠는 이곳에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안부를 주고받는다. 다음날 아침, 나 또한 호텔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마켓 포르가르텐마르케트(Vorgartenmarkt)를 찾아 건강하고 친근한 브런치와 스무디를 마시며 도시와 낯가림을 없앴다. 그렇게 조금 친해지고 나니 골목골목에 내려앉은 다양한 문화의 어우러짐이 감지됐다. 예를 들어 음식. 레스토랑 ‘차차탐(Zazatam)’은 중국식 바오번과 다타키, 세비체가 한 메뉴판에 공존한다. 프라터 유원지 전경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네니(Neni)는 훔무스와 팔라펠, 샤크슈카 등 지중해 음식이 맛있게 뒤섞인 곳이다. ‘브뢰슬(Brsl)’은 갖가지 채소와 적절한 소스 그리고 치즈가 어우러질 때 얼마나 새롭고 맛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엔나 채식 ‘팜-투-테이블’의 현재다.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프라터 놀이공원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키스 장소로 유명하다. 1897년 지어진 대관람차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부 파괴된 것을 제외하면 원형 그대로 보전 중이다. 네니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풍경.
식사 후 다뉴브 강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만난 ‘멕시코 광장(Mexikoplatz)’은 도시의 역사와 색채를 동시에 환기하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유일하게 항의 서한을 보냈던 멕시코에 헌사한 거리를 지금은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이 채우고 있었다. 눈에 띄는 바로크 성당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교회(St. Francis of Assisi Church)’로 이끌려 들어갔다가 안쪽에서 회당을 발견했다. 빼어난 미모에 암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아 ‘시시’라는 애칭으로 기억되는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지어진 회당이었다. 건립 당시 후원금이 하도 많이 걷혀 진짜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로 13.5m 높이의 돔 천장까지 휘황찬란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는 공간은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아르누보 유산이 됐다. 이 성당의 별명은 ‘멕시코 성당’. 머나먼 대륙에 자리한 국가의 이름을 딴 장소에 오스트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을 위한 헌정 공간이 된 셈이다.
비엔나가 살기 좋은 도시 1위 순위를 매년 경신하는 것은 공공임대주택이 발달한 덕도 있다. 건축적으로도 아름답다.
보다 활기차고 아기자기한 비엔나의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다음 장소는 카르멜리터피어텔(Karmeliterviertel)로 정해도 좋다. 숍과 갤러리, 근사한 레스토랑이 즐비한 이 그레첼을 소개하는 또 다른 ‘축’은 수많은 코셔 상점을 비롯한 식료품점, 학교와 종교 기관이 자리한 비엔나 유대인 생활의 중심지라는 것. 마침 주말을 맞아 장을 보고 브런치를 즐기러 나온 주민으로 가득한 카르멜리터 마켓에서부터 산책을 시작했다. 비에니스답게 ‘아아’ 대신 ‘아인슈페너’를 손에 들고 말이다! 체코 출신 여성 아티스트의 전시가 한창이던 갤러리 칸 아트 스페이스(Kahan Art Space)와 디자인 숍 바이 톰(by Thom), 편집 숍 분데르튀(Wundertte)를 구경한 뒤 코셔 기준까지 충족한, 아름다운 비건 초콜릿을 파는 상점 둘체 리아(Dulceria)에 들러 당 충전을 마쳤다.
워킹 가이드 투어인 레벨 투어( rebeltoursvienna)를 운영하는 남매, 바스티와 가비는 브라질 이민자 2세로 이 도시에 대해 누구보다 높은 애정과 관심을 자랑한다.
점심 식사로는 난생처음 조지아 요리를 맛봤으니 이쯤 되면 비엔나 식탁에는 없는 게 없는 것 아닐까? 아! 비엔나에 정착한 송명일 대표가 운영하는 근사한 부티크 편집 숍 ‘더 송(The Song)’이 자리한 곳도 바로 카르멜리터피어텔이다. 널찍한 공간은 독창성 넘치는 브랜드의 아름다운 피스로 가득하며, 전시도 진행 중이다. 호텔로 돌아가는 내 손에는 와인 바 비니페로(Vinifero)에서 구입한 내추럴 와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이곳의 대표이자 오스트리아 와인 산업 현장의 여성을 연결하는 모임 ‘와인 컬렉티브( femalewinecollective)’ 설립자이기도 한 클레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로컬 숍과 식당이 주민들과 뒤섞인 마켓은 그레첼의 중심이 된다. 카르멜리터 마켓의 전경.
비엔나 사람들의 강아지 사랑은 엄청나다. 대부분의 가게가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니 어디서든 귀여움과 마주칠 각오를 할 것.
“박물관 건물 밖의 의자와 테이블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앉기 위해 뭔가를 살 필요가 없죠. 정부를 설득해 입장료는 무료가 됐고요. 어릴 때 이곳에 왔던 비엔나 시민들이 ‘거기, 나쁘지 않았어’ 하고 몇 번이고 다시 오게끔 하는 것이 지금 미술관의 목표입니다.” 도시 역사를 아카이빙한 비엔나 미술관의 커뮤니케이션 헤드, 플로리안은 이곳에서 수십 년째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런 그가 “특히 미술관이 자리한 카를스플라츠(Karlsplatz)는 비엔나 산책을 시작하기에 최고의 장소죠!”라고 덧붙였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를 성당’과 마주한 박물관을 중심으로 벨베데레와 레오폴트 미술관, 알베르티나 미술관, 국립 오페라극장, 호프부르크 왕궁 같은 거대한 유산이 지척이니까.
과거 군사 시설을 호텔로 개조한 졸라 호텔 ( zola.hotel)의 감각적인 로비.
모두가 반드시 봐야 할 명소지만 트램과 자전거가 가로지르는 도시 중심부를 따라 내 발길이 닿은 곳은 호프부르크 왕궁 맞은편에 자리한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650년간 머물렀던 곳이자 여전히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 중인 왕궁 앞 정원은 늦은 봄 햇살을 만끽하기 위해 나온 비에니스들로 가득했다. 그 앞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또한 이 화려한 왕가가 번성했던 명백한 증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지은 웅장한 4층짜리 박물관은 기존 궁을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루브르나 에르미타주와는 달리 오로지 처음부터 왕가의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20년에 걸쳐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출신 가족이 운영하는 네니 레스토랑. 다양한 지중해 음식을 맛보는 것은 비엔나에서 어렵지 않다.
거대한 중앙 계단을 오르면 20대의 클림트가 작업한 아름다운 프레스코 천장화가 관람자를 맞이하고, 루벤스와 카라바조 · 벨라스케스 · 브뤼헐의 명화가 수 점씩 걸려 있는데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카페로 꼽히는 ‘쿠폴라 홀’이 있는 이곳에서 이상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18세기 비엔나 풍경화들이 걸린 벽이었다. 화가의 이름은 베르나르도 벨로토. 이탈리아 출신으로 전경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는 베두타 기법으로 잘 알려진 그는 드레스덴과 뮌헨 · 바르샤바 등 여러 도시 풍경을 남겼고, 대여제 마리아 테레사의 초대로 약 3년간 다양한 비엔나의 도심과 왕궁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이 18세기 보헤미언이 그린 비엔나에 마음이 끌린 건 내가 이 도시와 조금 친해졌다는 증거일까? 여전히 걷지 못한 수많은 골목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