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OLO BLAHNIKshoes designer시그너처 아이템인 나비 넥타이를 매고 스케치 중인 마놀로 블라닉.살아 있는 패션 레전드와 함께 티타임을 갖는 기회는 인생에서 그리 자주 찾아오는 기회는 아니다. 더욱이 그 레전드가 꽤 흥이 많은 패션계 인사이며, 진정한 젠틀맨이라면 그런 기회는 더더욱 드물다. 내 앞의 레전드는 준비한 차가 입맛에 맞을지 염려하며, 우리의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서둘러 음악의 볼륨을 낮췄다. 그는 바로 여자의 슈즈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슈즈계의 거장, 마놀로 블라닉이다. 73세의 나이지만 여전히 에너제틱하며 누구와 견줘도 밀리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재담꾼이다. 지난해 리졸리(Rizzoli)에서 출간한 자서전 <마놀로 블라닉: 덧없는 몸짓과 집착 Manolo Blahnik: Fleeting Gestures and Obsessions>은 그의 인생 스토리와 인연, 예술과 문화를 아우른 모든 것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나 소피아 코폴라 감독과 제작한 영화에 대한 에피소드, 그의 오랜 벗이었던 패션 뮤즈 안나 피아지(Anna Piage)와의 기억들, 평생 지기이며 책 속의 모든 사진을 촬영한 마이클 로버츠에 대한 이야기는 그중 일례다. 우린 밀란 중심부에 있는 포시즌스 호텔 로비에서 만나 뷰티 시크릿에서 기이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화두를 끄집어내며 수다를 떨었다. 이곳은 블라닉이 밀란에 올 때마다 머무는 집 같은 곳으로, 포 시즌스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를 알고 있는 듯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마놀로 블라닉이 디자인한 파스텔컬러의 새틴 슈즈들. 오스카 수상자인 코스튬 디자이너 밀레나 카노레로가 직접 마놀로 블라닉을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당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럭셔리는 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보모가 신었던 에스파드리유다. 리넨과 가죽 소재에 견고한 스티치가 있는 아주 멋진 신발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카나리 섬에 있는 우리 집으로 배달된 패션 매거진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난 그 매혹적인 페이지를 뚫어져라 보며 엄마에게 묻곤 했다. “이 아름다운 여자들은 진짜인가요?” 이렇듯 내게 럭셔리는 늘 정신적인 기억과 관련이 깊다. 슈즈에 대한 꿈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은 전후의 어려운 시절에도 늘 센스를 발휘해 스타일을 놓치지 않았다. 이를테면, 우리가 프라하에 살 땐, 미다스의 손을 가진 슈즈 장인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재킷의 가죽과 천을 분해해 새 신발로 리사이클링하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운 게 많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교훈 같은 것 말이다. 지금처럼 부족함이 없는 세대에겐 따분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내겐 의미 있는 일이었다. 당신이 만든 슈즈 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은 이름은 밝힐 수 없는 어떤 디자이너를 위해 금과 자수정으로 만든 슈즈. 정작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슈즈는 래퍼 릴 킴(Lil Kim)을 위해 만든 화이트 악어가죽 부츠를 꼽겠다. 모든 부속을 수작업으로 페인팅하고, 안쪽은 화이트 밍크로 트리밍했다. 언뜻 클림트 작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보다 더 아름답다! 이런 부츠의 가치는 어떻게 매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자서전에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멘탈’이 느껴졌다. 특히 이탈리아 고전 소설 <레오파드>에 대한 애정이 깊어 보인다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스페인어 판을 구해서 읽었던 게 1959년, 소년 시절이었다. 당시엔 책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라 어머니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 가며 읽었다. 이를테면, 내가 돈 파브리지오(Don Fabrizio) 부분을 맡고, 어머니가 마리아 스텔라(Maria Stella) 구절을 읽는 식이다. 돈 파브리지오의 우아한 캐릭터는 내게 신과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두 번 다시 없는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약 30년 전, 소설의 배경이 된 산타 마르게리타 디 벨리체(Santa Margherita di Belice)를 찾았다. 지진으로 파손된 건물 사이에서 이 소설의 작가인 토마시 디 람페두사(Tomasi di Lampedusa)가 어떻게 사유했을지를 상상했다. 돈나푸가타(Donnafugata)의 포도밭은 풍성한 문화가 파멸된 자리에 있더라. 리졸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마놀로 블라닉 자서전의 강렬한 레드 톤 커버.정교한 자수 장식이 더해진 마놀로 블라닉 아카이브의 스틸레토 힐 부티.어딘가로 피하고 싶을 때 찾는 시크릿 플레이스가 있나 런던 중심부, 린컨스 인 필스 극장(Lincoln’s Inn Fields)에 있는 존 손 경 뮤지엄(Sir John Soane’s Museum). 건축가 존 손의 자택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안에 손이 열광적으로 컬렉팅한 고대 작품들로 가득하다.고대 시대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세계가 오래전부터 나를 매혹시켰다. 청소년기에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사로잡혔고, 페이디아스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조각에 빠졌다. 자연스럽게 캠브리지 대학의 매리 비어드(Mary Beard) 박사의 열성 팬이 됐는데, 그를 통해 고대 신발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시대의 슈즈는 이데올로기적 사명을 띠고 있었던 독특한 시대다. 비어드 박사는 내게 티레니언 시대의 샌들과 바빌론의 슬리퍼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줬다. 그런 작은 디테일을 찾아가는 작업이 행복했다. 내 인생에 있어 엄청난 시절이다. 당신의 뮤즈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부터 브리짓 바르도, 캐서린 헵번, 안젤리나 휴스턴까지 자서전에 언급된 모든 헤로인들! 하지만 진정한 뮤즈는 내 벗, 안나 피아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70년대 런던에서다. 아주 독특한 주얼리와 별난 소품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녀만의 특별함을 완성했다. 피아지는 엄청난 열정으로 전 세계에 이탈리아 패션을 알렸다. 그녀가 떠난 후, 이탈리아는 ‘피아지의 총명함’이라는 최고의 명품을 잃었다. 밀란에 올 때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 마음속의 위시 리스트가 있다면 일명 ‘스파이 미러’라고 불리는 거울. 난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볼 수 없는 그런 거울 말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난 늘 비슷한 옷을 입고, 똑같은 집에 30년 넘게 살고 있다. 날 흥분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주 익사이팅한 무엇이나 돈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