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한상혁'이 지금 도모하고 있는 것

한상혁은 ‘CD님’에서 디자이너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딴 ‘HSH(Heich Es Heich)’ 안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중이다. 신인 아닌 신인의 마음으로 DDP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일주일 전, 그 미스테리한 한 공간의 문을 두드렸다.

프로필 by ELLE 2015.04.23

 

 

 

문은 정말로 열려 있지 않았다. 갑자기 볕이 좋아진 오후, 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찬 가로수 길 큰길을 뒤로하고 뒷골목으로 몇 걸음 가서, 어지러운 맛집 간판들 사이로 수상하게 생긴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HEICH ES HEICH’. 어떻게 읽어야 하나, 독일어인가? 지하 1층으로 이어진 계단 끝에 갑자기 북유럽 도시에 왔나 싶을 정도로 근사하게 꾸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 매장처럼 누구나 아무렇게나 밀면 열리는 문이 아니다. 안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쳐야 ‘찰칵’하고 문을 열린다. 꼭 벨을 눌러야만 문을 열어준다는 파리의 어떤 편집 매장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훨씬 큰 공간에 주인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면서 주인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행어에 걸린 완벽하게 테일러링된 수트와 코트들, 팬츠, 레더 재킷…. 블랙, 그레이, 화이트와 함께 강렬한 레드와 푸시아 컬러, 차갑게 반짝이는 카퍼(copper) 컬러. 양면성? 너덜너덜하게 오래된 LP들, 세르쥬 갱스부르, 조지 마이클…. 그런데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바흐의 평균율. 의외성? 의상 중간중간 느닷없는 위치에 놓여진 레고 스타워즈 임페리얼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스톰 트루퍼 피규어. 모호함? 무한함?

 

공간의 주인이 나타났다. 한상혁. 이 이름이 패션 업계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진 지 10여 년도 더 지났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패션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결심한 건 최근의 일이다. 남성복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열중해 왔던 그가 이제는 ‘내 것이 너무 하고 싶어서’ ‘죽기 전에 꼭 내 것 같은 옷을 하고 싶어서’ ‘에이치 에스 에이치(참, 이렇게 읽는다고 한다. 생각보단 심플한걸)’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내놓았다. 면도날을 형상화해서 그려넣은 로고 HSH를 놓고 참 고민 많이 한 브랜딩이로구나, 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이었나 싶다. H와 H 사이에 놓여있는 S. 이것과 저것의 경계,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것. 이것인지 저것인지 선을 긋거나 묻지 말아달라는 것. 그래서 이제는 여성복 비중이 많아진 거냐는 내 ‘네모난’ 질문 따위는 사실 한상혁에겐 우문이었다. “일하면서 가장 영향을 받았던 두 명의 디자이너가 있어요. 마르지엘라 그리고 톰 포드. 굉장히 다른 이 두 가지 성향을 어떻게 만들어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가 ‘비트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어요. 여성성이 있는 남성, 남성성이 있는 여성, 제가 그동안 컬렉션에도 이런 스토리를 많이 풀어냈더라구요. 실은 아내의 옷장과 내 옷장을 실제로 쉐어하기도 하거든요. 제 옷 중에 맘에 드는 옷을 아내가 입기도 하고 아내 옷 중 사이즈가 좀 넉넉한 건 제가 가끔 꺼내 입기도 하고요(웃음). 그래서 에이치 에스 에이치는 남녀의 구분을 딱 선으로 긋지 말고 사이즈로만 구분하자 했어요. 디자인으로 남녀를 구분할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형태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사이즈 구분으로 남녀가 선택해 입을 수 있도록 가자 했죠. 그런데 선배 디자이너들이 문제점을 지적했어요. ‘너는 남성복할 때 쇼할 거야, 여성복 할때 쇼할 꺼야? 나중에 백화점 입점할 땐 여성층에 들어가니, 남성층에 들어갈 거니?’ 이런 사정이다 보니 조금 양보했죠. 그래서 주요 사이즈에는 남성 여밈으로 가자, 여성들은 아마 다 이해줄 거야 하는 식으로요(웃음). 서울패션위크 때도 남성 스케줄로 쇼 하는 걸로요. 우리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걸 좋아해 주는 여성은 입을 수 있도록 맞춤으로 제안해요. 테일러링 라인 외에는 남녀 모두 손쉽게 선택할 수 있고요. 비트윈이라는 개념은 저한텐 단지 남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와 어른,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등 모든 상반된 것들의 사이를 오가는 걸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오기 전에 쇼룸을 둘러봤는데 행거와 옷걸이까지 전부 레더를 씌우고 HSH를 넣어 놓은 걸 보면 대단히 치밀한 브랜딩이다, 감탄할 만하다고 칭찬을 건넸다. “브랜드 디렉터로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치중해 왔어요. 중요한 일이긴 한데, 요즘 드는 생각은 아무렇게나 옷을 모아서도 아크네 스튜디오처럼 사진 찍고 이미지 메이킹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아제딘 알라이아가 자신만의 니트 실루엣을 정립시킨 것처럼, 또 릭 오웬스가 자기만의 재단 기술을 구사하는 것처럼, 패션 디자이너라면 시그너처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랜드 이미지도 결국엔 본질적으로 제품에서 나와야 하는 거고 제일 중요한 건 자기만 할 수 있는 시그너처 제품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그래서 봉제나 재단에 대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어요. 사실 기업에 속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목 말랐던 것도 이런 점이었구요. 저한테는 그래서 지금 테일러링이 가장 중요한 화두에요. 옷을 잘 만들고 그걸 보여주는 디자이너가 되는 게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렇게 말하니까 섭섭해지려고 했다. 옷의 본질, 중요하지. 그래도 한상혁의 쇼는 퍼포먼스 아니던가. 일주일 뒤에 있을 쇼에 정말 본질만 덩그라니 있을 건가. “서프라이즈하고 싶은 데 아직 딱 떠오르지 않네요!” 설마, 다 준비해 놨겠지! 음악이라도 이야기해 줄 수 있겠지. 한상혁을 퍼스널 DJ로 두고 싶을 정도로 그의 쇼 선곡은 좋았으니까. “보드카 레인이라는 친구들의 ‘당신의 평화는 연약하다’라는 노래를 틀려구요. 제가 지난해에 가장 좋아했던 노래예요. 음악하는 친구들과 다 친해요.” 그동안 한상혁이 만들어왔던 컬렉션에 틀었던 음악만 ‘좌악’ 모아서 컴플리에이션 음반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파리의 호텔 코스트처럼 만들어서 ‘HSH’ 붙이고 여기서 판매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사업 아이디어까지 제안했다. “그런 것들도 좀 생각하고 있어요.”

 

사무실로 돌아와 그 평화가 얼마나 연약한지,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눈을 감으니 며칠 뒤 HSH의 한상혁이 펼칠 런웨이 쇼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SNS 사진 한 장 따위로는 결코 담지 못할 소름 돋는 패션쇼, 시처럼 서정적이고 영화처럼 감동 어린 그리고 때로는 클럽처럼 섹시한 그런 쇼. 무엇보다 본질에 충실해 있을, 그런 한상혁의 쇼가 보고 싶어 진다.

 

 

 

 

 

1 스톰 트루퍼가 지키는 HSH.
2, 3 모노톤과 강렬한 톤이 공존하는 HSH의 쇼룸이자 스토어 전경.

 

 

Credit

  • editor 강주연
  • photographer 정지은
  • DESIGN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