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 만난 남자 괜찮을까
홀로 떠난 여행은 결국 어떤 ‘사건’을 꿈꾸게 만든다. ‘치유의 로맨스’를 통해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겠다는 기대와 관계의 회복에 대한 믿음, 기약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겠다는 일탈까지. 그 시한부 연애가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사건’이 아닌 ‘사고’에 불과하더라도 그건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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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저 영화가 애들 다 버려놨다니까.” <비포 미드나잇>을 함께 보고 돌아온 토요일 저녁, 소파에 ‘와불’처럼 누워 케이블 채널을 돌리던 남자친구가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맥주 캔을 땄다. 화면에선 한 쌍의 남녀가 기차 식당 칸에 마주 앉아 뜨거운 공모의 눈길을 주고받고 있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이 유장한 로맨스의 첫 장을 막 써내려 가려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거야. 한창 나이인 미국 남자애가 혼자 배낭 여행하다가 심심해 죽던 차에 웬 귀여운 프랑스 여자애를 만났어. 때마침 여자애가 영어도 좀 하겠다, 보아 하니 혼자 여행 중이겠다, 이건 뭐 멍석이 오토로 깔린 거지. 원래 미국 애들이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잖아. 여자애는 여자애대로 자유분방한 미국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거고.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라는 게 다 저 수준이라니까. 괜히 들떠가지고 애들 불장난하는 거지.”
 
사랑은 원래 유치해야 제 맛 아니겠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팔딱,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너도나도 가슴 한편에 제시와 셀린을 품고 비행기에 오르던 시절, 나 또한 그 대열에 선선히 동참했다. 낯선 땅이 주는 마법 같은 기운에 사로잡혀 그토록 꿈꾸던 나만의 ‘제시’를 만나 찰나의 로맨스도 나눴다. 매일이 일요일이고 크리스마스 같은 날들이었다. 당시 이뤄진 2주간의 로맨스는 훗날 술자리 주전부리로 회자되며 각색에 각색을 거쳐 한 편의 민간인 버전 <비포 선라이즈>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나만의 특별한 경험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김이 팍 샌 건 대한민국 여자 대다수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대학 동창의 결혼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인 자리. 한껏 차려입은 다섯 명의 여자들은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하이힐을 벗고 가부좌를 틀었다. 대화의 물꼬를 튼 건 넉 달 전 파혼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천주교 신자 H였다. 그 순례길이 하마터면 혼례길이 될 뻔했다는 얘긴 어디까지나 그녀의 주장일 뿐이었지만, 어쨌거나 바게트처럼 몸도 마음도 퍽퍽해진 30대 여자들에게 그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뜨겁고 촉촉한 호빵 같은 연애담이었다. “산티아고는 다들 나처럼 사연 있는 사람들이 마음 비우러 오는 분위기라 거기서 남자를 만날 거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어. 근데 웬걸. 출발한 지 딱 일주일 만에 프랑스에서 왔다는 안젤로를 만난 거야. 매일 일정한 속도로 걷다 보니 그 사람이랑 계속 마주치게 됐는데, 한 달 가까이 붙어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파혼이며 뭐며 온갖 얘기를 다 털어놓게 되더라고. 그러다 한 번은 저녁에 같이 산책을 나갔는데 그 사람이 글쎄,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그 아름다운 눈은 대체 얼마면 살 수 있냐고….” “그렇게 좋으면 계속 같이 돌아다니지, 왜 찢어졌대?” 소주에 사래가 들려 캑캑대던 K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는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그 사람이 자긴 스페인에 좀 더 있겠다는 거야. 프랑스엔 갈 곳이 없다고. 자기말로는 히브리인처럼 떠돌이 생활을 한다더라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헤어졌어. 연락처 교환도 안 했으니 그걸로 끝이었지만 뭐, 그게 더 애틋하잖아?” H는 그날의 무아지경을 상상하며 이미 정신줄을 내려놓은 듯했다. 하기야 본래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라는 게 혼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부산 앞바다에 놀러 갔다가 신원미상의 남자애들과 한 번쯤 놀아본 사람이라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거다. 낯선 땅에서 낯선 남자와 보낸 하룻밤은 여자들에게 ‘원 나이트 스탠드’보단 ‘찰나의 로맨스’로 기억된다. 게다가 장기 여행일 경우, 로맨스를 겪을 확률은 곱절로 높아진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이상 우리가 장기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직장을 그만뒀을 때, 남자랑 헤어졌을 때, 남자랑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뒀을 때. 다시 말해 작금의 현실이 지긋지긋할 때, 우리는 작정하고 긴 여행길에 오른다. 수십 년이 넘도록 숨바꼭질 중인 그 망할 놈의 ‘자아’를 찾겠다면서 말이다. 돈 많은 백수 친구를 곁에 두고 있지 않은 이상 장기 여행은  대개 혼자 갈 수밖에 없는데, 이렇듯 가뜩이나 심란한 상태에서 홀로 떠난 여행은 결국 어떤 ‘사건’을 꿈꾸게 만든다.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치유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도만 세 번 넘게 다녀온 여행광 K의 사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히말라야 트레킹하다 만났다는 어린 남자애, 다들 기억하지? 가이드 섭외 때문에 현지에서 만난 한국 애들끼리 조를 짜서 함께 올라갔는데 하필 중간에 고산병이 걸린 거야. 나 때문에 자꾸 처지니까 다들 짜증내는 분위기였는데 걔만 유독 나를 챙겨주더라고. 정 못 올라가겠으면 자기랑 같이 내려가자면서.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안 가는 게 오히려 이상하잖아?”
 
가까스로 정신줄을 찾은 H가 거들었다. “맞아. 가만 보면 장소도 중요한 거 같아. 제주 올레길이나 설악산 등반이랑은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잖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하면 역시 유럽’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디 앨런이 왜 굳이 파리며 바르셀로나며 로마며 주야장천 유럽에서 로맨스영화를 찍어댔겠느냔 말이다. 우리가 ‘아,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유럽은 그 ‘어딘가’에 가까운 풍경이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선 감상적인 여행자는 원 나이트 스탠드를 꿈꾸는 ‘껄떡쇠’에게마저 선선히 마음을 내어주고야 만다(게다가 틈틈이 동양 여자와의 섹스로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확인하려는 유러피언은 어디에나 있다). 제시와 셀린의 로맨스가 유치하거나 세속적이지 않았던 건 오스트리아 빈이란 도시의 우아한 역사와 환상적인 건축물의 공이 컸으리라.
 
이때, 모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P가 돌연 공통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다들 그 사람들이랑 연락해?” 모두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봐. 알다시피 난 뭐 연애도 거의 못해봤고, 혼자 두 달 넘게 배낭 여행하면서 그 흔한 로맨스도 없었어. 길에서 처음 본 여자한테 지분거리는 놈들한테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거든. 너희들 말처럼 고학력에 성공한 이탈리아 남자라면 한국 여자가 아니라 이탈리아 여자를 만나야 정상 아니야? K가 만났다는 그 프랑스인도 그래. 집도 절도 없는 걸 보니 막말로 순진한 여행객들 등쳐 먹고 다니는 놈 아니냐고. 히말라야에서 만났다는 그 어린애는 요즘도 연락하니?” 털털한 S가 먼저 수긍하듯 말했다. “맞아. 네 말처럼 그저 만만해서 한 번 건드려본 걸 수도 있지. 그렇지만 뭐 나도 즐겼으니 결국 피장파장 아니겠어? 뻔한 수작인 줄 알면서 받아준 것도 있어. 솔직히 한국에서 그렇게 과감한 관계를 가지긴 어렵잖아?”
 
P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여행지에서 순진하게 늑대들의 훅 업(Hook up)에 낚인 것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안젤로와 히말라야 연하남과 이탈리아 변호사가 지금 이 시각, 동네 호프집에서 “예전에 여행 중인 여자애를 따먹은 적 있는데…”라며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여자들에게는 다소 섭섭한 결론이지만 결국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는 태생적으로 가벼운 불장난의 운명을 타고난 일종의 시한부 연애다. 그렇다고 해서 순기능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힐링 캠프>처럼 위안을 주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아주며, 관계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준다. 그건 말하자면 일반적인 연애와 구분되는 특수한 장르의 연애다. 미래에 대한 기약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즉흥적인 로맨스. 원 나이트 스탠드보다 무겁고, 사랑보다는 가벼운 한여름 밤의 꿈.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사건’이 아닌 ‘사고’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어차피 모든 로맨스는 교통사고 같은 거니까. 그리고 아주 가끔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셀린이 증명하듯 그 사고가 진짜 사건이 되기도 하니까.
 
 
Credit
- EDITOR 채은미
- WRITER 강보라
- PHOTO MANAIGO CARLOTTA
- DESIGN 하주희
엘르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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